♣ 六友堂記/산행기록

서불과차(徐市過此) 영신대를 찾아서(201023~25)

도솔산인 2020. 10. 26. 18:01

서불과차(徐市過此) 영신대를 찾아서(201023~25)

 

 

▣ 일 시 : 2020년 10월 23일(금)~25일(일)

▣ 코 스 : 덕암-방장제일문-용유담-백무동-가내소-세석-영신봉-비로봉-좌고대-영신대-바른재능선-백무동-인산가

▣ 인 원 : 4명(서복회 문회장님, 조박사님, 이경호님)

날 씨 : 맑음(0도)

 

 

와유강산(臥遊江山)을 남긴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마천면 의탄리 의중 마을에 살았던 인물이다. 저작 시기는 산청 등의 지명으로 보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로 추정한다. 세석평전에 대해 상대, 중대, 하대를 언급하고 있는데, 서불(徐市, 徐福)에 관한 기록이 흥미를 끈다. 상대(上坮)는 영신대, 중대(中坮)는 창불대, 하대(下坮)는 음양수 샘으로 추정한다. 우연인지 몰라도 우천(宇天) 허만수 선생이 돌로 쌓은 기도터와 일치한다. 와유강산에 '상대(上坮)의 백 척 절벽 석면 위에 徐市過此(서불과차 :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한 제명(題名)'이라는 기록이 있다. 같은 시기에 함양군수 민인호의 「지리산지」에는 '서불이 지리산에 다녀갔다.'라고 하였지만 세석평전의 언급은 없다. 서불의 불로초와 방장산은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본기」가 그 출발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서불의 불로초에 관한 전설은 남해와 거제도, 제주도 서귀포 등 여러 곳에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서불에 관련된 지명과 석각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아마 '서불과차'의 석각은 후대 사람들이 신선이 된 서불을 동경하여 새긴 것으로 생각한다. 세석평 상대(영신대)의 '서불과차'의 스토리는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의 와유강산(臥遊江山)의 기록이 유일하다. 와유강산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1920년을 전후하여 창작된 작품으로 본다. 서복의 이야기는 서편제 판소리 가사에도 등장한다.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와유강산(臥遊江山) '상대(上坮)의 백 척 절벽 석면 위에 徐市過此 한 제명(題名)'

 

얼마 전 지리산 국립공원 역사문화단 정혜종 주무관이 명문이 있는 도기 편 사진을 보내왔다. 이것은 영신대에서 나온 도기 편이다. 이 명문 내 눈에는 자꾸 '徐(서)'로 보이는데, 공교롭게 서불(徐巿)의 '徐(서)'와 일치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서불 이야기는 사실 유무를 떠나 막연한 전설로 생각한다. 그러나 와유강산의 기록에 있는 서불과차의 석각이 상대인 영신봉 주변에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불과 100년 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도기 명문(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 제공)

 

가.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본기에 서불에 대한 기록

 

사기에는 진시황이 서복을 통해 불사약을 구하려는 내용이 매우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시황 28년(기원전 219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미 일을 마치자 제나라 사람 서불(徐市) 등이 글을 올려 ‘바다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그 이름이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고 신선들이 거처한다’며 재계齋戒하고 동남동녀들과 함께 이를 구하길 청했다. 이에 서불을 보내 동남동녀 수천 명을 선발해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게 했다.』

 

☞ 徐市(徐福) : 중국 진(秦)나라 때의 사람(?~?). 진시황의 명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 3천 명을 데리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바다 끝 신산(神山)으로 배를 타고 떠났으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 봉래산(蓬萊山)은 금강산, 방장산(方丈山)은 지리산, 영주산(瀛洲山)은 한라산을 가리킴.

 

 

나.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의 와유강산(臥遊江山)

 

中坮를 다 본 후에 上坮를 살펴보니 소새한 연무 중에 仙境宛然하다. 百尺絶壁 石面上에 徐市過此한 제명(題名) 六國統合秦始皇帝 方士徐市의 말을 듣고 不死藥을 구하라고 童男童女 五百人을 海中三山 보낸 後에 徐市도 此에 仙人이 되고 童男童女 藥캐다가 仙童玉女 되었으니...

 

 

다. 함양 군수 민인호(閔麟鎬)의 지리산지(智異山誌)

 

支那秦始皇時代에 方士韓終徐福을 遣하야 三神山不死藥을 求하랴 하얏는데 韓徐(韓終과 徐福)가 此山을 經由하야 南海錦山을 過하야 日本에 入하야 仍히 土着의 氓이 되얏나니 今 日本에 徐市(即徐福)村이 有함은 實로 此時代의 事이라.

 

 

금요일 백무동에 내려가 드론으로 새별들 덕암의 성혈, 탄수대의 방장제일문과 성교대, 용유담을 촬영하였다. 용유담에서 덤으로 용유동천과 심진대 석각을 확인하였다. 천진 폭포는 위치는 어디인지. 천진 폭포는 은하수를 건너는 나루터라는 의미이다. 은하수를 건너는 다리인 약작(略彴)이 아닐는지 생각했다. 드론 촬영은 지리산 국립공원 경남사무소 함양분소에서 지원했다. 저녁에 인산가 김윤세 회장님과 우성숙 인산가 연수원장님 부부가 숙소로 찾아오셔서 만났다. 김 회장님은 인산가의 명주 '탁여현'을 따르시며 이백의 월하독작을 낭낭하게 읊으셨다. '탁주는 현인과 같다.'라는 시구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두 분과는 점필재의 구롱 길이 인연이 되었다.

 

 

성교대
방장제일문
덕암 성혈
용유담 약작 위치
용유동천 석각
인산가 김윤세 회장님, 우성숙 연수원장님, 서복회 문호성 회장님

 

한신계곡은 만산홍엽을 한창 吐해내고 있었다. 눈에 가득 들어오는 오색의 단풍과 들려오는 물소리에 구봉 송익필의 시구가 떠오른다. '산길을 걸으면 쉬는 것을 잊고 앉으면 걷는 것을 잊어/ 말 멈추고 솔그늘 아래 물소리 듣는다./ 내 뒤에 몇 사람이 나를 앞질러 갔어도/ 각기 돌아갈 곳이 다르니 무엇을 다투랴.' 평생을 마천에서 살았던 문 회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한신 지곡 입구까지 도벌꾼들이 도로를 냈다고 한다. 제석봉에서 가내소 입구까지 나무를 끌어내려 실어냈던 것이다. 군데군데 인부들이 사용했던 산막터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가내소는 실제로 기우제를 지냈다는 말씀도 하셨다. 돼지의 피를 뿌려 놓으면 산신령이 피를 씻어내기 위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세석대피소에 오르니 산행객들이 가득하다. 점심을 먹고 영신봉으로 이동하였다. 영신봉 바로 아래 축대가 있는 넓은 터는 군부대 막사 자리라고 설명하셨다.

 

 

가내소 폭포

 

배낭을 내려놓고 주변의 모든 바위를 살폈다. 삼송 공이 말한 상대(上坮)가 영신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석각의 흔적을 발견하였지만, 오랜 세월 풍화되어 판독할 수 없었다. 조박사님이 비로봉(1625봉)에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이봉은 영신대에서 바로 보이는 봉으로 1463 이륙 선생은 유지리산록에서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이 죽지 않고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1611년 유몽인은 이 봉우리에 직접 올라갔다. 비로봉에 올라서니 이를 어찌 표현해야 할까. 최고의 전망대이다. 반야봉을 마주하고 영신대가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사물을 보는 눈이 뛰어난 유몽인의 탁월한 선택을 409년 만에 확인하는 순간이다. 영신대와 창불대 삼거리인 헬기장 아래 바위를 살펴보았으나 석각의 흔적은 없었다. 아마 누군가 석각을 새겼다면 그곳에 새기지 않았을까 판단한다. 내 눈에 뜨이지 않은 것은 아직 인연이 닿지 않아서 그러하리라 생각하고 좌고대로 향했다. 좌고대는 관련 내용을 링크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 坐高臺(좌고대)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0808) : blog.daum.net/lyg4533/16488053

 

 

가. 1463년 이륙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뜰아래 작은 샘이 있는데 물이 세고 매우 맛있어서 신천(神泉)이라고 불리는데 흘러 내려가 화개천이 된다. 동쪽에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부도(浮屠) 모양처럼 생겼다. 여기 사는 승려들은 귀사(龜社)의 주인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이 죽지 않고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庭下有小泉. 水性堅. 香甚味. 號神泉. 下而爲花開川. 東有石峯. 如浮屠狀. 居僧以爲龜社主崔文昌. 不死在此云.

 

 

나.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 4월 5일 <중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 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毗盧峰)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坐高臺)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毗盧峰)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仍降萬丈蒼壁. 抵靈神菴. 諸峯環拱面内. 如相向而揖. 毗盧峰在其東. 坐高臺峙其北. 阿里王塔樹其西. 迦葉臺壓其後. 遂投杖. 手足行陟毗盧峯上. 凜乎不可久留也.

 

 

 

영신봉 석각 흔적
석각인지 자연 문양인지?
비로봉과 반야봉
비로봉(조박사님은 어우당 만큼이나 사물을 보는 눈이 뛰어나다.)

1463년 이륙은 유지리산록에서 이곳을 부도 모양, 1611년 유몽인은 유두류산록에서 비로봉이라고 기록함.

 

서복회 문회장님
비로봉에서 바라본 영신대
좌고대와 추강암 : 좌고대는 실제로 시야가 트인 천왕봉부터 반야봉까지 지리의 동서남북을 조망할 수 있다.

 

선답자들이 영신사지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발표가 10년 넘게 지명에 대한 오랜 혼란을 빚어왔다. 세석산장 앞 습지의 엉터리 영신사지와 가짜 청학연못이 국회 전자도서관에 전자문서로 보존된 박사 학위 논문 [조선시대 유람록에 나타난 지리산 경관자원의 명승적 가치 = (The)scenic site value of scenic resources in Mt. Jiri documented in the Joseon era travelling records / 상명대학교 이창훈 이용률 높음]에 버젓이 실려있으니, 문제의 파급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자신들의 탐구 결과물을 점검하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리산 역사 문화복원은 먼저 지명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있다.

 

영신대는 영신사지로 이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회장님은 아직도 세석산장 앞 습지를 영신사지로 알고 계신다. 지리99에서 검증 없이 마구 발표한 내용을 지역민들이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별이 쏟아지는 영신대에서 산신령이 노하였는지 기온이 떨어지고 밤새 젤트는 요동을 쳤다. 아침을 일찍 먹고 주변 탐색에 나섰다. 조박사님은 영신대에서 창불대로 가는 지름길을 찾았다. 전괄과 거상을 산책한 뒤에 영신대 석문으로 직접 내려선 것이다. '전괄과 거상을 산책하고 돌아가니 방장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라는 시구의 의문이 드디어 풀렸다. 영신사 앞에 보이는 좌선대 봉에는 케른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석가섭은 불두의 형상이다. 내눈에만 그렇게 보이는가.

 

 

영신대
일몰
좌고대와 석가섭
석가섭
영신대 앞 암봉에서 바라본 좌고대
좌선대 암봉
기도터
석가섭
좌고대
1463년 이륙은 부도 모양, 1611년 유몽인은 비로봉이라고 기록함.
영신대
곧은재 능선 진입 지점
곧은재 능선 거목
점필재가 하산음을 읊은 굽은 물가

 

下山吟[산에서 내려와 읊다]

 

杖藜纔下山 : 명아주 지팡이 짚고 겨우 산에서 내려오니

澄潭忽蘸客 : 갑자기 맑은 연못이 산객을 담그게 하네.

彎碕濯我纓 : 굽은 물가에서 앉아 내 갓끈을 씻으니

瀏瀏風生腋 :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나오는구나.

平生饕山水 : 평소 산수 욕심을 부렸는데

今日了緉屐 : 오늘은 나막신 한 켤레가 다 닳았네.

顧語會心人 : 여정을 함께한 사람(제자)들에게 돌아보고 말하노니

胡爲赴形役 : 어찌 (우리가)육체의 노역에 나아갔다고 하겠는가?

 

 

인산가 농공 단지 조성 중 발견된 거대한 암괴

 

점필재의 하산 길에는 직지 유감(直旨遺憾)의 사연이 있다.  2011년 06월 28일 지리 99 '지명탐구방' [유두류록] 탐구팀을 몇 년간 붙잡고 늘어졌던 두 글자 [직지(直旨)] 꼭대님 글에 [遊頭流錄 '徑由直旨而下'의 國譯에 대하여....]라는 Re129 글을 올렸다. 어느 날 내 글은 조용히 사라졌고, 김종직 선생의 하산 길이 어느 날 슬그머니 오공 능선에서 바른재 능선으로 수정되었다. 후에 지리산길 지도를 확인하니 바른재 능선이 한신능선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도를 만드는 자가 본인이 직접 답사 없이 시키는 대로 맹신하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 지리99 [지명탐구]129 直旨遺憾 : blog.daum.net/lyg4533/16487666

 

 

여하튼 많은 시간이 흘렀고 지금 생각하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와우각지쟁이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나쁜 습성은 집단 체면에 빠져 자기보다 나은 사람, 잘하는 사람, 열심히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것을 왕따라고 한다. 실력이 달리니 반칙이 나올 수밖에 없다. 리더의 아만(我慢)은 공든 탑이 일순간에 무너진다. 나는 그런 차원으로 지난 일들을 이해한다. 기록은 정확성이 그 생명이다. 그분의 기록은 오류가 없다. 나는 그 점을 높이 존중한다. 그러나 글을 아는 자가 사리가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나만 못한 자를 벗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를 벗 삼지 남을 벗 삼지 않는다고 감히 말한다. 내가 허교(許交)도 하지 않았거늘 도대체 무슨 도반이란 말인가.

 

이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영신사지에서 나왔다. 바른재 능선 진입 지점 전망대에서 빛을 거슬러 영신사지를 바라보았다. 누가 곧은재 능선을 왜 한신 능선이라고 개명하였는지 궁금하다. 하산 길을 내려서며 만감이 교차한다. 시그널은 능선을 고집하여 험한 길로 자꾸 인도한다. 곧은재 능선의 옛길을 읽지 못한 것이다. 시그널은 길을 바꾸기도 하고 간혹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시그널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름이 있는 시그널이 더욱 그렇다. 고도 1,350m까지 천왕봉이 보인다. 1,170m에서 영랑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1,100m에 이르니 중봉이 창암능선에 묻힌다. 능선의 거석군을 우회하여 점필재가 하산음을 읊은 굽은 물가로 내려와서 배낭을 내려놓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삼봉산 아래 인산가에 들러 김 회장님 부부와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김 회장님은 인산 김일훈 선생의 유업을 이어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자연치유와 대체의학을 전도하는 탄탄한 벤처 기업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