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을 좇아서(201121~1122)
▣ 일 시 : 2020년 11월 21일(토)~11월 22일(일)
▣ 코 스 : 삼화마을-소통폭포-영대-흑담-황계폭포-남부종복원센터-황석산 오두막
▣ 인 원 : 4명(산영님, 하늘바위, 정선생)
▣ 날 씨 : 맑음
1611년 3월 28일 어우당 유몽인은 남원(용성) 관아를 출발하여 재간당에서 일행들과 만나 하룻밤을 留하고, 3월 29일 요천을 거슬러 반암→황산 비전→인월을 지나 백장암에 이른다. 유몽인의 4월 1일의 일정은 백장암을 출발하여 →황계 하류→영대촌→흑담→환희령→내원→정룡암에서 1박을 한다.
2020년 1월 7일 재간당에서 반암, 황산 비전과 백장암을 찾아가 보기로 하고, 산동면 목동에 있는 재간당을 향했다. 목동 마을 앞에 도착하니 버스 정류장 이정표에 400여 년 전의 지명인 요천과 번암(유람록에는 반암 磻巖)이 눈에 들어왔다. 재간당과 수용암을 확인하고 요천을 건너 고개를 넘어 황산 비전을 둘러보고 백장암까지 답사를 마쳤다. 산내에서 신강님의 안내로 백장암에서 넘어오는 옛길을 따라 매동 마을 지나 소동폭포에 들러 옛길의 초입을 확인했다. 영대에서 '도탄변사정선생유대' 각자도 보고, '도탄과 도탄정사'의 위치도 살펴보았다.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내원(반선)을 지나 정룡암과 대암의 위치를 가늠하였다.
지난 2월부터 줄곧 점필재 길과 감수재 길에 집중하여 아홉 모롱이 길과 상류암에서 초령 길을 복원하였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유몽인 길 답사에 나섰다. 전 구간을 일괄하여 답사하지 않았지만 백장암에서 갈월령까지 이으면 어우당길은 마무리가 된다. 유몽인의 1611년 4월 1일과 4월 2일의 일정이다. 4월 1일은 백장사→황계하류→영대촌→황계폭포→흑담→환희령→내원→정룡암(1박)이고, 4월 2일 일정은 정룡암→월락동→황혼동→와곡(와운)→갈월령(영원령)→영원암→장정동→실덕리→군자사(1박)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지명들을 확인하면 된다.
소동폭포에서 일행들과 만나 일정을 논의하였다. 오늘의 일정은 오후 3시까지만 걷기로 하고 무리하지 않기로 하였다. 소동폭포 주변에는 각자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옛길의 길목임을 알 수 있다. 하늘바위님이 석각 사진을 찍어서 의은대와 습자암 위치만 위치만 확인하였다. 지난밤 비로 만수천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지난번 답사에서 영대 건너편의 길을 봤기 때문에 계곡을 따라 진행하였다. 물안개가 걷히니 날씨는 화창하기만 하다. 영대 아래에는 '도탄변선생유대' 석각이 있다. 물을 건너서 확인할 수 없어서 데크에서 잠시 쉬었다. 대개 사람들은 이 석각을 '도탄변선생유기'로 읽고 있다. 오류의 근원은 향토지(운성지)를 근거로 농어민신문에 보도되었고, 지리 99에 그대로 소개되어 확정된 듯하다. 다르게 읽은들 어떠랴!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닌 것을.... 계곡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영대의 모습은 신령스럽기만 하여라.
■만수천 영대(靈臺)의 도탄변선생유대(桃灘邊先生遺䑓)의 석각
산내에서 뱀사골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영대(靈臺 : 산신령 바위) 앞 만수천 계곡가의 외진 곳에 도탄 변사정 선생 관련 석각이 있다. 桃灘邊先生遺䑓(도탄변사정선생유대)의 석각은 도탄 변사정의 제자들이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에 쓰여있는 영대(靈臺)와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영대촌(嬴代村)과 한자가 일치하지 않아 영인본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영대촌(嬴代村)이라.' 유몽인의 오류인 듯하다.
☞ 변사정 (邊士貞, 1529~1596) : 조선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ㆍ의병장. 본관은 장연(長淵).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옥계 盧禛(1518~1578)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움.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참판(參判)을 지낸 수정(水亭) 변처후( 邊處厚)의 5 세손이며, 생원(生員) 변호(邊灝)의 아들로 1529년(중종 24)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남원의 운봉(雲峰)의 뱀사골 도탄에 桃灘精舍(도탄정사)를 짓고 은거하여 도탄(桃灘) 선생이라 칭하였다.
☞ 靈臺(영대)의 어원과 유래
유교 경전 가운데 '시경'과 '맹자'에 '靈臺(영대)'가 나온다. 주문왕이 만든 대인데, 원문에 "經始靈臺 經之營之(영대를 지으려고 헤아리기 시작해서, 그것을 헤아려 보고 그것의 위치를 정하니)"라. 그 주석에 "靈은 별안간 만들어져 마치 신령이 만든 것 같음을 이르는 말이다. [謂之靈者 言其焂然而成 如神靈之所爲也]"라는 구절이 있다. 당시는 유교 사회여서 '영대'란 이름은 아무래도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靈臺(영대) 이름을 지은 것은 도탄 변사정 선생으로 '도탄 변 선생이 이름을 남긴 靈臺(영대)'라고 이해가 된다.
길은 계곡 옆으로 순탄하게 이어진다. 전답이 없는데도 길의 폭이 넓은 것으로 미루어 어떤 목적으로 길을 확장한 듯하다. 후에 알고 보니 수로와 겸용이었다. 우리는 도탄을 향해 나아갔다.(소동 폭포~도탄 : 1.2km) 차를 타고 지나가면 볼 수 없는 만수천의 풍경을 보는 것이다. 유람록 복원은 욕심을 낸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아야 하고 발품을 팔아야 한다. 독서(讀書)와 독산(讀山), 답산(踏山)의 결과물이다. 내게 유람록 답사에 왜 빠져들었는지 묻는다면 '선답자들의 오류'라고 답할 것이다. 영신사지, 청학연못을 비롯하여 영랑재, 소년대, 마암, 지장사터, 두류암, 상류암, 청이당터, 정걸방묘, 화암, 마적사터, 상내봉(향로봉), 미타봉은 물론이고 고령대, 고령암터 등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할 수가 없다. 함양독바위, 산청독바위, 한신능선 등은 새롭게 개명을 하였다. 일부 지역에서 내가 확인한 것만 이러한데 지리산 전역에는 얼마나 될까.
계곡을 따라 인공으로 구축된 길과 수로의 흔적을 좇았다. 절벽 구간에는 인공 석축과 콘크리트 수로 구조물이 남아 있다. 계곡 건너편 대숲으로 도탄정사의 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도탄정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내령 마을 앞에는 실제로 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얕은 여울이 있는데, 이곳을 도탄(桃灘)이라고 한다. 도탄(桃灘)은 '복숭아 꽃잎이 흐르는 여울물'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지명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수로의 흔적은 계곡의 절벽으로 이어진다. 산길을 내려서니 넓은 암반이 펼쳐진다. 통나무 다리를 놓기 위해 바위에 홈을 판 흔적과 계곡가에 통나무 다리가 밧줄에 매여 있다. 유람록에 나오는 약작(통나무 다리)이 바로 이것이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수로이다. 이런 난공사를 누가 했을까. 소동 폭포의 보(洑)가 설치되기 전에 이 먼 곳에서 실상사 부근까지(약 3km) 물을 끌고 간 것이다. 그래서인지 길은 거의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폭포 굿당 앞 수월대 들마루에 배낭을 내려놓고 점심도 먹고 한참을 쉬어간다. 굿당 입구를 지나면 수로의 취수구가 나오는데 전체가 암반으로 된 자연 수로가 기묘하다. 이물질이 수로에 들어가지 않도록 수문과 여과 장치를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자리에 인공으로 파놓은 커다란 바위 구멍이 있다. 이 공사를 누가 공사를 하였는지 대역사였을 것이다. 아마 일제 강점기가 아닐까 짐작이 된다. 이후에 계곡 좌측을 따랐으나 계곡에는 길의 흔적은 없다.
황계폭포(?)로 추정되는 곳에서 폭포 상단으로 올라가니 굿당에서 폭포로 길이 이어진다. 폭포에 배낭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폭포 위를 지나는 길도 확인하였다. 길이 오래 묵어 희미하다. 그 이후에도 계곡을 건너는 다리(철다리) 흔적이 있으나 옛날 다리는 아닌듯하다. 이곳부터 검은 암반이 넓게 펼쳐진다. 대략 폭 20m 길이 50m의 커다란 담이 있는데 깊이가 서너 길은 되는 듯하다. 이곳은 소동 폭포와 반선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다. 담(潭)으로 쏟아지는 하얀 포말과 검은 소를 바라보았다. 오후 햇볕에 흑과 백이 대비를 이룬다. 계곡을 건너서 도로에 올라오니 반달곰 종복원 센터 창고 건물이다. 오늘의 답사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황석산 봉전골 봉전 산막으로 이동하여 뜨끈뜨끈한 황토방에서 뒹굴뒹굴 하룻밤을 보냈다. 지난 1월 유몽인 길을 안내해준 신강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믿지 마소서.... 끝.
※ 자료 정리 요약
1. 소동 폭포-도탄 : 1.2km(직선거리)
2. 소동 폭포-굿당 취수구 : 2.4km(직선거리)
3. 흑담 수월대와 굿당 초입 주변 확인 필요함.
4. 횡계(橫溪) 폭포에서 황계(黃溪) 폭포로 변음된 것은 아닐는지.
5. 환희령(?)
6. 지도
▶ 2020.01.07(재간당에서 백장암까지)
▶ 2020. 11. 21(소동폭포에서 황계폭포를 지나 흑담까지)
의은대(疑銀臺) : 만수동 아래에 있음. 소동폭포 위에 반석이 널찍하고 은처럼 깨끗이 다듬어져 있으며 폭포는 수십 길이나 되며 물거품에 연기가 어린 듯하니, 운봉 제1의 절경이다. 율포 박상호(栗圃 朴相湖), 통덕랑 연포 박동한(蓮浦 朴東漢), 삼은 박상래(三隱 朴翔來), 춘강 김창순(春崗 金昌珣) 등이 터를 다듬어 집을 짓고 두레를 마련하여 춘추로 시를 읊은 장소로 활용하여, 그들의 원운(原韻)과 기문(記文)이 있는데, 이는 모두 구지(舊誌)에 나타나 있다. [출처 : 운성지]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4월 1일 경오일. 동행한 사람들은 각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새끼로 동여매고서 남쪽으로 하산하였다. 물가 밭두둑을 따라 굽이굽이 난 길을 가니 큰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황계(黃溪)의 하류였다. 동네가 넓게 열리고, 돌이 구를 정도로 물이 세차게 흘렀다. 북쪽은 폭포이고 아래쪽은 못인데, 못 위의 폭포수는 노하여 부르짖는 듯 쏟아져 내리며 벼락이 번갈아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아! 얼마나 장대한 모습인가. 길을 가다보니 푸른 소나무는 그늘을 드리우고 철쭉은 불타듯이 붉게 피어 있었다. 남여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서서 쉬었다. 골짜기에 두세 집이 있는데 영대촌(嬴代村)이라 하였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마을로, 깊은 골짜기와 많은 봉우리들 사이에 있었다. 참으로 하나의 무릉도원이었다. 이 마을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
한 곳에 이르니 높은 언덕에 가파른 협곡이 나타났다. 양쪽 언덕으로 길을 내놓았는데 협곡이 매우 깊었다. 그 협곡 안은 모두 돌이었다. 시냇가에도 큰 돌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이곳의 이름을 흑담(黑潭)이라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세상에 단청(丹靑)의 그림을 좋아하여 자신의 솜씨를 최대한 발휘해 화려하게 꾸며놓은 사람이 있었다네. 지금 이곳을 보니, 돌이 희면 이끼가 어찌 그리 푸르며 물이 푸르면 꽃이 어찌 그리도 붉은가? 조물주도 한껏 화려함을 뽐냈으니 그 화려함을 누리는 자는 산신령인가?” 라고 하였다. 이에 산유화(山有花) 녹복(祿福)은 비파를 타게 하고, 생이(生伊)는 젓대로, 종수(從壽)와 청구(靑丘)는 태평소(太平蕭)를 불게 하였다. 음악이 산골짜기에 울려 메아리치고, 시냇물 소리와 서로 어우러지니 즐거워할 만하였다. 어린아이에게 통을 열어 먹과 붓을 준비하게 하고, 암석 위에서 시를 지었다.황계 폭포(黃溪瀑布)를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어 이어진 30리 길이 모두 푸른 노송나무와 단풍나무였으며, 비단 같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다녔다.
내원(內院)에 이르니 두 줄기 시냇물이 합쳐지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수를 놓은 비단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소나무 주변의 단(壇)은 숫돌처럼 평평하였고, 금빛․푸른빛의 단청이 숲 속 골짜기에 비추었다.또 천 번이나 두드려 만든 종이에 누런 기름을 먹여 겹겹이 바른 장판은 마치 노란 유리를 깔아놓은 듯,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허연 늙은 선사(禪師)가 승복을 입고 앉아 불경을 펴놓고 있었다. 그의 생애가 맑고 깨끗하리라 여겨졌다. 이에 머무는 대신 시를 지어놓고 떠났다. 동쪽 시내를 따라 오르니 산은 깊고 물은 세차게 흘러내렸다.
한걸음 한걸음씩 올라 정룡암(頂龍菴)에 이르렀다. 앞에 큰 시내가 가로막고 있는데 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건장한 승려를 뽑아 그의 등에 업혀서 돌을 뛰어넘으며 건넜다. 낭떠러지에 가까이 있는 바위가 자연스럽게 대(臺)를 이루었는데 그 바위를 대암(臺巖)이라 하였다. 그 아래에 시퍼렇게 보이는 깊은 연못이 있었지만 겁이 나 내려다볼 수 없었다.그 연못에 사는 물고기를 가사어(袈裟魚)라 부르는데, 조각조각 붙은 논 혹은 한 조각씩 기워 만든 가사(袈裟) 같은 모양의 비늘이 있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없는 물고기로, 오직 이 못에서만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이에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게 하였으나, 수심이 깊어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이 날 저녁 伯蘇(백소)[雲峰 수령李復生(이복생)]가 하직하고 돌아가다가 내원에서 묵었다. 나는 내원이 깨끗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처음에는 그곳으로 돌아가 자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룡암에 이르자 지쳐서 그럴 수 없었다. 심하구나! 나의 쇠함이여. 정룡암 북쪽에 한 채의 집이 있었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말하기를,“이곳이 바로 판서(判書) 노진(盧禛) 의 서재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옛날 옥계(玉溪) 노진(盧禛) 선생이 자손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선생도 봄날의 꽃구경과 가을날의 단풍놀이를 하러 왔으며, 흥이 나면 찾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아!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산 속 외딴 곳에 자제들을 위해 집을 짓고 살게 했으니, 선생의 깨끗한 지취는 후학을 흥기시킬 수 있겠구나.
○ 노진(盧禛)[1518~1578] 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예악에 밝았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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