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내원수행처&불일협곡 1박2일(201219~20)

도솔산인 2020. 12. 20. 21:25

내원 수행처&불일 협곡 1박 2일(201219~20)

 

 

▣ 일 시 : 2020년 12월 19일~20일

▣ 코 스 : 쌍계사 주차장-내원 수행처-불일 협곡-쌍계사

▣ 인 원 : 홀로(일요일 김성채 님)

▣ 날 씨 : 맑음

 

 

    山 行

 

                            宋翼弼(15341599)

 

山行忘坐坐忘行 : 산길을 걸으면 앉는 것을 잊고 앉으면 걷는 것을 잊어,

歇馬松陰廳水聲 : 솔 그늘 아래 말 멈추고 물소리 듣는다.

後我幾人先我去 : 내 뒤에 몇 사람이 나를 앞질러 갔어도,

各歸其止又何爭 : 각기 돌아갈 곳이 다르니 또한 무엇을 다투랴.

 

* 宋翼弼(송익필: 1534~1599) 학자 字雲長(운장) 호는 龜峰(귀봉)

 

 

내 주변에 지리산 선인들의 유람록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일정(一丁) 閔선생님, 단사천 님, 솔박사 님, 조박사 님, 칠성 님, 하동군청 김성채 님 정도이다. 대개 유람록에 관심이 없거나, 선답한 사람들의 산행기를 읽고 '그런가벼!'라고 이해하는 정도이다. 현장 답사를 병행하지 않으면 선인들의 유람록은 이해할 수 없다. 시행착오를 겪고 수업료를 내야 한다. 초창기 선답자들의 답사 기록은 유람록 답사의 안내서 역할을 하였다. 그 파급 효과는 대단했고 지리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영신사지와 청학연못은 세석의 명소가 되었고, 김종직의 유두류록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다. 내가 어느 날 그분들의 논리에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세석산장 앞 습지의 영신사지와 적석동(磧石洞) 소지(小池)인 청학연못이 국회 전자도서관에 전자문서로 보존된 박사 학위 논문(☞)에 실려있다. 선답자들의 오류가 그대로 박사학위 논문에 인용이 되었으니, 기록의 정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뒤늦게라도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에서 습지의 가짜 영신사지를 영신대로 수정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 군데를 고치는데 무려 10여 년이 걸렸다.

 

조선시대 유람록에 나타난 지리산 경관자원의 명승적 가치 = (The)scenic site value of scenic resources in Mt. Jiri documented in the Joseon era travelling records / 상명대학교 이창훈

 

 

비로봉에서 바라본 영신사지

토요일 미산 선생님은 영랑대로 가시고, 조박사는 오봉에서 새재를 넘어 중산리로 넘어가는 가축 이동길을 찾으러 갔다. 나는 홀로 옥소암 동쪽 계곡 내원 수행처를 찾았다. 산길은 선조들이 물류의 이동과 문화 교류의 동맥이라고 할 수 있다. 조박사님은 지난 11월 28일 묘정암 터를 찾았고 독녀암에 대한 비밀도 풀었다. 금계 마을과 새별들의 지명에 막혔을 때에도, 새벽에 추성에서 찍은 그믐달과 샛별 사진을 보내왔다. 그때 줄탁동시(啐啄同时)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계명조림(鷄鳴照臨) 금계동(金鷄洞)과 금성조림(金星照臨) 새별들(샛별들)이 풀렸다. 계명성은 금성이다. 새별들 덕암 바위에는 천문도를 그린 성혈이 있다. 유람록 복원을 하는데 카톡이 일등공신이다. 답사기를 작성하고 함께 답사한 분들과 윤독을 하고 내용을 첨삭한다. 생각이 다른 부분은 토론을 하는데, 카톡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몰입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는 것이다. 산류천석(山溜穿石)의 심정으로 몰입을 한다. '작은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결국 바위를 뚫듯이' 사물을 관찰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여러 번 시행착오 끝에 만나는 새로운 발견의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묘정암 뒤 상대날등에서 바라본 독녀암 독녀의 형상이다.(사진 산영님)
사진 : 지리산아님(201219)

쌍계사는 주지 스님이 바뀐 후에 내원골 초입에 문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이제 내원골은 봉산골(?)이 되었다. 선조 대부터 이용하던 산길을 막은 것이다. 소은 산막을 가려면 마을로 돌아서 올라가야 한다. 그 길도 한가운데를 자르고 템플스테이 관을 지어 길을 막았다. 이렇게 세상에는 이런 파시즘이 존재한다. 마을로 돌아서 올라가는 길은 나무가 쓰러져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 그 길을 겨우 벗어나니 쌍계사 뒤 계곡을 건너는 도로가 나온다. 도로에는 작업 차량 두 대와 바위가 길을 완전히 막고 있다. 굴삭기는 쉴 새 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공사하는 인부들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쌍계사에서 땅속에 석빙고를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건축 허가를 받고 하는지 모르겠다. 문을 걸어 잠그고 공사하는 것으로 보아 해당 관청에 확인할 필요가 있다. 내원골에 사람이 살고 있고 사유지가 있는데, 산에 의지하여 사는 지역 주민들의 불편은 눈에 보이듯 뻔하다. 어디에도 중생(衆生)들의 길을 막으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없다.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0번지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쉬었다.'라는 문구에서 엄천은 지명이다. 만약 엄천이 냇물이라면 '渡(건널도)'나 '越(넘을월)'을 썼을 것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엄천과 화암의 선후가 맞지 않는다. 점필재는 함양에서 출발하여 팥치재(팥두재)를 넘어 화암에서 쉬고 당두재를 넘었다고 본다. 이 길이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한말에 함양군에는 17개의 면이 있었고, 1914년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휴지면(休知면)과 엄천면(嚴川面)을 통합하여 휴천면(休川面)이 된다. 통합 이전의 엄천면은 화장산 아래 화촌리와 유평리 일원(현재는 유림면)과 대천리, 남호리, 동강리, 운서리, 송전리, 용유담 일원을 포함한 듯하다. 1888년(고종 25) 간행된 천령지에 엄천면(지명)의 영역은 당북(堂北, 당두재 북쪽), 초정(初亭), 소연(所淵), 음법(陰法), 탄촌(炭村, 문정), 용당(龍堂, 용유담)을 포함하고 있다. 용당은 용유담의 당집을 가리키는 듯하다. 1472년 당시 엄천사가 많은 토지를 소유했을 것이고 그 영역 전체를 엄천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화암 앞의 넓은 들판이 옛 엄천면의 행정 구역일 수도 있다. 사숙재 강희맹의 시를 보면 화장사에서 국계로 가는 길도 엄천(현재 유림면 화촌리)이다. 1472년 엄천면의 영역을 먼저 밝히는 것이 화암을 푸는 열쇠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걸으니 오래지 않아 내원 수행처에 닿았다.

 

☞ 1914년 이전 함양군(咸陽郡) 행정구역
원수면(元水面), 북천면(北川面), 병곡면(甁谷面), 지내면(池內面), 백토면(柏吐面), 도북면(道北面), 관변면(官邊面) 사근면(沙斤面), 유등면(柳等面), 휴지면(休知面), 마천면(馬川面), 예림면(藝林面), 석복면(席卜面), 백전면(柏田面) 모간면(毛看面), 덕곡면(德谷面), 엄천면(嚴川面)

 

다음날 아침 자봉 스님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은 14세에 쌍계사로 출가를 하셨고 평생 토굴에서 수행을 하신 분이다. 이야기 끝에 소림선방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소림선(少林禪)의 종지(宗旨)에 대한 질문을 드렸다. 의논대 시를 써서 보여 드리니, 화엄경의 종지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불교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으니 목소리만 들릴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분들은 소림선의 종지로 보는 것 같다.'라고 하시며, '의논대 시의 소림선(少林禪)은 선승들이 참선하는 장소로 소림 선방(소림굴)이다.'라고 하셨다. 마침 하동군청 학예연구사 김성채 씨가 내원 수행처로 올라왔다. 자봉 스님이 해주시는 점심을 공양한 후 수행처 뒤 허리길로 불일 협곡으로 들어갔다. 산죽이 눈을 찌르고 나뭇가지는 재킷을 찢었다. 이 길은 짐승 길이다. 불일 협곡 초입에 내려서서 천천히 불일 협곡을 올라갔다. 김성채 씨는 불일 협곡이 초행길이다. 용추폭포는 얼음이 얼어붙었다. 하산 길에 오암(㹳巖, 원숭이 바위)에서 '시온 형제'의 석각 흔적을 확인하고 쌍계사로 내려왔다.

 

40년 넘게 토굴에서 수행 중인 선승(禪僧) 자봉(慈峯) 스님, 「북창(北窗)」 漢詩集(한시집)을 내신 반산(半山) 한상철(韓相哲) 선생님, 한시를 전문적으로 국역하시는 돌지둥 송석주(宋錫周) 선배님, 서예가 지원(志原) 박양준(朴洋濬) 교수가 '소림선방' 국역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대학에 있는 두 분은 유두류 기행시를 국역한 사람들과 아는 사이로 입장이 곤란한지 답이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