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묘정암과 독녀암

도솔산인 2021. 4. 16. 05:25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묘정암과 독녀암

 

 

▣ 일 시 : 2021년 04월 14일(수)

▣ 코 스 : 적조암-돌배나무-지장사터-넓은터-금낭굴-묘정암 터-상대날등-독녀암-상대날등-기와막터-적조암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영상 4도

 

 

함양독바위를 독녀암(노장대)으로 부르자고 처음 제안한 분은 솔레이 이용훈 박사이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獨女巖)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말 마적동에 은거했던 강지주(姜趾周, 1856~1939)의 세진대기(洗塵臺記)와 문정동에 살았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 노장대(老將臺)라고 하였다. 또 다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편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에는 독녀성(獨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강지주(姜趾周 , 1856~1939)

 

 

1. 1472년 유두류록에 나오는 묘정암과 독녀암

 

가. 묘정암에 대한 기록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덩굴藤蔓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해공은 군자사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유람하러 가고, 나는 등구재(登龜岾)를 넘어 바로 군재(郡齋)로 돌아왔다.

 

 

나. 독녀암에 대한 기록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2. 고 문헌에 나오는 노장대와 독녀성

 

 

가.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

 

방장산은 바다 가운데 삼산의 하나로 크고 깊고 넓기가 인간세상에서 으뜸이다. 거기서 가장 높은 곳을 천왕봉이라 하며, 천왕봉에서 시작된 높고 가파른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그 한 가지가 다시 북쪽으로 십여 리를 달려 불룩하게 솟았으니 각산(角山)‧배산(背山)이라 한다. 마을이 있고 마적동(馬跡洞)이라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이다.

 

 

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봉우리(향로봉)에서 곧장 뻗어 내린 것은 노장대(老將臺)(*독바위)가 되었고, 노장대(老將臺)의 왼편 어깨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거슬러 나아가 문필봉(*솔봉)이 되었으며, 그것은 문수사의 주봉을 이루고 문헌동의 바깥 안산(案山)이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가운데 줄기는 비스듬히 ○里쯤을 나아가서는 굽이돌아 북쪽으로 나아가 문헌동의 안산인 채봉(釵峯 *비녀봉. 양화대 정남의 524m봉)이 되었고, 얼굴을 내밀고 머리를 드리워 양화대를 안으로 감싸는 형세[砂]가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흩어져 내린 여러 줄기는 봉우리와 봉우리가 중첩되고 지맥(*곁다리)이 널리 퍼져 물을 거슬러 서쪽으로 나아가 양화대를 바깥에서 감싸는 형세가 되었다.

 

 

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1권 경상도, 산음현

 

【고적】 개품부곡(皆品部曲) 다른 이름은 장계(長溪)이다. 현 서북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옛날에는 단계(丹溪)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송곡소(松谷所) 현 북쪽 13리 지점에 있다. 고산성(古山城)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3백 46척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독녀성(獨女城)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백 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 17 권 변어전고 (邊圉典故)폐지된 산성

 

- 산음 고산성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화장산과 화암 마을
당산나무터
노장동 돌배나무에 꽃이 피었다.
지장사터
금낭굴
금낭굴에서 상대날등 오르는 길 와편
샘터
독녀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