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영신대의 아리왕탑

도솔산인 2020. 11. 18. 06:23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영신대의 阿里王塔

 

 

김종직의 유두류록과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영신사의 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신사 서북쪽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이 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웠다. 그 중심에 철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개층이 유실되었다.(김종직)'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다.(유몽인)'라고 설명하고 있다. 탑의 위치가 서북 쪽과 서쪽이 방향이 일부 일치하나 같은 탑을 설명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현재 남아 있는 서쪽에 있는 돌무더기가 있는 곳을 아리왕탑 지로 추정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아리왕탑에서 좌고대와 추강암이 보인다. 탑의 형태에 관한 기록은 '조그마한 탑이 있는데 그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웠다.(김종직)'라는 것이 유일한 단서이다. 혹시 영신대 제단의 몽돌 청석(靑石)이 아리왕탑의 부재는 아니었을까. 아리왕탑의 기단석(基壇石)은 정을 맞지 않은 호박돌 자연석이다.

 

영신대 제단과 기도터에는 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운 청석 몽돌이 있다. 크기가 크다. 마치 계곡에서 수마가 된 것 같은 둥근 형태의 청석(靑石)이다. 청석(靑石)은 무게는 다른 돌에 비하여 무겁고 단단하다. 이 돌은 어디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을까. 용유담에서 돌개구멍에서 수마가 된 둥근 몽돌을 간혹 볼 수 있다. 앞으로 조사와 관찰이 더 필요하겠지만 박회성에서도 주먹만 한 몽돌이 발견이 된다. 산간의 주민들의 마당이나 장독대에서도 수마가 된 돌이 있다. 같은 형태의 돌이지만 크기와 재질이 다르다. 용도는 크기에 따라 무기도 될 수 있고, 고추나 양념을 가는 확이나 곡식의 껍질을 벗기는 확의 몽돌(숫돌), 두부를 만드는데 누르는 돌일 수도 있다. 영신대의 둥근 청석은 무슨 용도였을까. 왜 영신대의 신성한 제단에 청석을 신석(神石)으로 모아 놓았을까. 둥근돌로 쌓은 탑은 다른 곳에서도 가끔 볼 수 있다. 탑의 부재로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선과(善果) 임병기 선생께서 보내온 사진 한 장이 흥미를 끈다. 장흥 천관산 연화동의 아육왕탑(阿育王塔)은 영신사의 좌고대와 형태가 비슷한 자연석으로 된 석탑 모양의 바위이다. 아육왕탑(阿育王塔)에도 마하가섭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육왕탑(阿育王塔)과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자료를 찾아보니 아육왕(阿育王)과 아리왕(阿里王)은 7세기가 넘게 차이 나는 인물이다. 따라서 아육왕탑(阿育王塔)과 아리왕탑(阿里王塔)은 탑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전혀 다른 이름이다. 요약해서 정리하면 김종직 선생의 탑은 치석(治石)한 석탑으로 삼층석탑에서 일부 옥개석(屋蓋石)이 결실된 탑이다. 그 근거는 찰주(擦柱)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유몽인 선생은 탑에 대한 설명이 없으니 치석(治石)인지 자연석(自然石)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아리왕탑의 위치가 유몽인의 기록에 나와있고 그 위치에 기단석(基壇石) 호박돌이 쌓여있어 아리왕탑은 치석(治石)을 한 석탑은 아닌 듯하다. 한 바퀴를 크게 돌고 돌았지만 결국 제 자리에 도로 왔다. 영신대와 제단에 있는 청석 몽돌의 비밀은 무엇일까.

 

 

注 청석(靑石) : 푸른 빛깔을 띤 응회암. 몽돌 청석은 땅속에서 감자나 고구마처럼 파면 나옴. 영신사 주위 영계에도 광맥이 있음.  물에서 침식되어 몽돌이 된 것이 아니고 양파껍질 벗겨지듯 벗겨짐. 영신사 주위와  창불대 가는 경사면 골에도 광맥이 있음. 그 돌이 둥글어서 단단하고 무거워서 힘이 있고 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짐. 청동기시대 문묘에서도 출토됨(조교수님). 청석은 쇳소리가 나고 마천석과는 다름. 광맥이 있어 나오는 곳에서만 나옴. 확의 용도는 양념과 고추를 갈고 곡식의 가루를 낼 때 사용 숫돌을 몽돌이라고 함(송대님). 청석 몽돌은 영신사 터를 확장하면서 나온 것으로 추정됨(칠성님). 몽돌 청석에 지기가 응축되어 있음. 원적외선이 방출되어 수행자들의 혈액 순환을 돕고 피를 맑게함.(청풍인)

 

 

注 아육왕(阿育王, Ashoka)과 아리왕(阿里王) 

 

1. 아육왕(阿育王, Ashoka) : 무우왕(無憂王)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제국의 제3대 왕. 아소카 왕은 불교의 가르침을 국가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아 불교의 보호와 전파에 큰 업적을 남김. 심장이 없는 왕. 정복군주에서 위대한 군주를 넘어선 현인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음. 2,000년 전 전설에서 1915년에 왕의 본명을 '아소카(Ashoka)'로 적은 기둥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그가 바로 전설 속의 인물인 아소카 대왕임이 밝혀짐.

 

2. 아리왕(阿里王)  7세기 때, 내지(內地)와 네팔로부터 불교가 티베트로 들어옴. 아리(阿里) 티베트 남부의 지명. 아리왕은 티벳에서 불교의 재흥기의 8세기의 인물. 아리왕(阿里王)은 인도의 아저협존(阿底峽尊)을 티베트로 초청해 불교를 전도하고, 그의 제자 중돈파(仲敦巴)가 갈당파(噶当派)를 창립했다. 이때를 불교 후 흥기(後興期)라고 함.

 

※ 위 내용은 함께 답사한 산영 조박사님과 카톡으로 나눈 대화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저의 주관적인 생각이니 여과에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탑의 부재를 발견하시거나 아리왕탑에 대해 아시는 분은 제보를 바랍니다.

 

♣ 六友堂記/산행기록 서불과차(徐市過此) 영신대를 찾아서(201023~25)

 

 

아리왕탑 추정지(사진 토산 칠성님)
영신대
기도터 청석
유몽인의 비로봉(유몽인은 이곳에 올라갔다고 기록에 남겼다)
비로봉에서 바라본 영신대와 아리왕탑지
좌고대(좌고대와 추강암에서 아리왕탑지가 보임)
장흥 천관산 의상암 아육왕탑(阿育王塔)

 

☞ 아육왕탑(阿育王塔) : 장흥 천관산 연화동(蓮花洞)서쪽 꼭대기에 있으니 거석이 겹쳐져 오층(五層)으로 이루어 외로이 서 있다. 청람(晴嵐)이 반쯤 거둘 때에 계곡 저쪽에서 바라보는 것이 으뜸인데 참으로 절관(絶觀)이다. 제4층의 서로 겹쳐진 곳 한쪽이 비어 있는데 긴 돌조각이(밭 가는 기구) 모양을 하고 옆으로 걸쳐 받치고 있다. 탑 아래쪽의 조그만 석대(石臺)는 가섭(迦葉)이 쉬던 돌이요. 그 동쪽 아래 석봉(石峯)이 나즈막히 길게 연달아 있는 곳을 가섭봉(迦葉峯)이라고 한다. 선조(宣祖) 때에 상층 절반이 무너져 떨어졌다.(출처 : 안내판)

 

 

창불대에서 영신대로 내려오는 암봉에서 바라본 석가섭(창불대-암봉-사면길-석문-영신대)
곧은재능선 초입에서 바라본 영신대와 아리왕탑지

 

☞ 문화유산 자유기고가 선과 임병기 님의 의견

 

좌고대는 아육왕탑(阿育王塔)으로 보입니다. 아리왕탑(阿里王塔) 또한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탑이라고 봅니다. 유람록에 나오는 두 개 탑은 서로 다른 탑으로 추정됩니다. 김종직 선생의 탑은 자연석이 아니라 치석(治石)한 석탑이며 삼층석탑에서 일부 옥개석(屋蓋石)이 결실된 탑입니다. 그 근거는 찰주(擦柱)가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찰주(擦柱)는 석탑의 3층 탑신석 또는 옥개석 상부에 홈을 파고 상륜부를 지탱하는 철기둥입니다. 김종직 선생이 표현한 탑은 고려 전기에 유행했던 암반 위에 세운 풍수 비보 석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자연석으로 된 탑 형태를 이르는 것 같습니다.

 

 

산청 석남암수 석탑 삼층옥계석 찰주공(擦柱孔)
상륜부가 망실된 경주 감은사지 석탑의 찰주(擦柱)

注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  탑 보륜에 끼운 쇠로 주조(鑄造)된 원뿔형 구조물로, 세계의 기둥을 의미함.

 

지리산 법계사 산천비보탑

자료 제공 : 선과 임병기 선생님

 

 

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높이 솟아서 우뚝함),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이 있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개의 층은 유실되었다.

 

나.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 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