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면 의탄리 금계동과 새별들 덕암의 성혈 이야기
지난 11월 6일 탄수(灘叟) 이종식(李鐘植, 1871~1945) 선생의 손자 이○○ 의원에게 '방장산 제일문이 금대사에 있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와유강산(臥遊江山)에 방장산 제일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금대사에 '數間石室 정케지어 方丈山 第一門을 門上에 새겼다.'라는 내용이다. 이 의원의 말에 따르면 금대사에 있던 방장산 제일문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 방장제일문은 탄수(灘叟) 공의 유언에 따라 사후 6.25가 끝날 무렵 후손들이 새긴 것이다. 탄수(灘叟) 공의 아버지 죽포(竹圃) 이규현(李圭玹, 1848~1935) 공이 정미(1907년) 의병장 석상용(石祥龍, 1870~1920) 의병진에 총과 군자금을 제공하여 장형 이종순(李鐘純 1866~1913) 공이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에 잡혀가는데, 처형 직전 탄수 공이 대신 인질이 되고 장형의 목숨을 구한다. 그 내용은 탄수 공의 비결 명문 논집에 나와 있다. 이 일을 겪고 탄수 공은 금대사에 들어가 10년 동안 주역(비결) 공부를 한 후, 금계동(金鷄洞)으로 내려와 부인 남원 양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는다.(1919년 李崙雨 공 출생) 일제 강점기에 탄수 공 장조카인 은계(隱溪) 이진우(李璡雨, 1897~1954)선생은 1930년대 초 향토교육을 위해 마천초등학교를 세운다. 탄수 공은 해방이 되는 것을 예측하고 마천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금계동에서 광복을 기다린 것이다. 탄수 공은 해방이 되는 것을 보고 눈을 감는다. 최근까지 금계동 마을에서 백억 대가 넘는 자산가 8명이 나왔다고 한다.
☞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전쟁에 뜻을 함께한 113명의 명단을 기록한 면암집의 ‘동맹록(同盟錄)’에 죽포(竹圃) 이규현(李圭玹, 1848~1935) 공의 이름이 남아있음. 죽포 이규현 공과 석상용 장군 집안은 사돈 간이다.
금계동에서 내려다 보이는 새별들에는 탄수 공의 장조카 은계(隱溪) 이진우(李璡雨, 1897~1954) 선생이 새긴 '德巖' 석각 명문이 있다. 이 덕암 위에 15개~20개 정도의 성혈이 있는데, 이 인근의 지명에는 칠성동, 추성동, 새별들, 금계동, 천진(天津)폭포, 성교대(星橋臺) 등 별과 관련된 지명들이 있다. 삼송(三松) 공의 와유강산에 '碧松寺를 지낸後에 七星洞을 살펴보니 北斗楸城 照臨이라.'라는 내용이 나온다. 우연인지 몰라도 현재 추성동의 추성(楸城)은 북두칠성 1번 별인 추성(樞星)과 음이 일치한다. 추성(楸城)은 추성(樞星)에서 온 지명인 듯하다. 새별들은 '샛별이 조림하는 들판'이라는 의미로 이해가 된다. 금계동(金鷄洞)은 탄수공이 창시한 마을인데 새벽에 금마대(金馬坮) 아래 계명성(鷄鳴星 혹은 啓明星)이 조림하는 곳에서 이름을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금계동에는 탄수 이종식 공의 금계동 창시 비가 있다. 성혈의 별자리에 대해서는 순천산님께 자료를 받았다. 성혈의 별자리는 북두칠성, 남두육성, 하고성(河鼓星)으로 밝혀졌고 두 개의 별자리는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북두 추성이 조림하는 칠성동에 가야겠다.
북두칠성의 시곗바늘을 1919년으로 돌려보자. 이 해가 이○○ 의원의 아버지 적선(積善) 이윤우(李崙雨, 1919~1984) 공이 태어난 해이다. 얼마 전 허상옥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오늘 임사천 씨와 통화를 하였다. 한일 합방이 되자 일본은 1910년 중국의 침략을 위해 대륙 항로가 열린다. 일본 시모노세키-부산-인천-단둥-대련-상해 노선이다. 이 배의 선주는 양인(洋人)이고 선장은 조선인으로 임사천(거제 거주) 씨의 증조부 諱는 임성진(林星辰, )이다. 임사천씨는 가문의 지정 상속 장자에게만 전해지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증조부께서 1919년 김구 선생이 중국 상해로 망명할 때 이배에 태웠다는 것이다. 3.1 운동 독립선언서 선포하는 자리(태화관)에 증조부가 계셨다고 한다. 손병희 선생이 민족 대표 서명 인원을 33인으로 한정을 하면서, 동지들의 희생을 줄이고 미래를 위해 나머지 사람들은 남겨두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같은 시기에 '중국(당시 중화민국)제 3 연발 화승총과 화약을 다량 구입하여 지리산 조개골로 반입하였다.'라는 것이다.' '당시 총의 가격은 집 한 채 값이었다.' '증조부께서 중국에서 총기를 구입하여 지리산 조개골로 운반했다.' '김해 조개섬에서 진주까지는 배로 운송하고, 진주에서 조개골까지는 육로로 이동했다.' '지리산 깊은 산속에 천석꾼의 부자가 있다.'라는 이야기에 의중 마을 죽포 이규현 공의 이름이 문득 떠올랐다. '산속에 숨어든 독립군들이 굶어 죽을 수가 없어 총을 주고 곡식을 바꾸었다.'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선대께서 세상이 바뀌기 전까지는 기록도 하지 말고 입밖에 꺼내지 말라.'라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분을 알고 있을 듯하다. '학자들의 강연에서 증조부 함자를 들었다.'라고도 하였다. 임사천 선생은 1991년부터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임사천 씨는 왜 홀로 선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일까. 100년 전 그분 선대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기 위해 11월 말 칠성동(七星洞)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별星과 별辰을 이름에 쓴 임성진(林星辰) 그분은 누구일까?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 끝.
천상열차분야 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초기부터 석각본, 목판본, 필사본 등으로 제작·보급된 한국의 전천 천문도(全天天文圖)이다.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 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은 조선조 태조 4년(1395)에 고구려 시대 평양에서 각석한 천문도(‘평양 성도(星圖)’)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돌에 새긴 천문도이다. 중국의 순우 천문도(淳祐天文圖, 1247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이다. 상단의 천문도 원 안에는 모두 1,467개의 별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단에는 ‘天象列次分野之圖(천상열차분야 지도)’라는 천문도의 명칭과 권근(權近)의 발문과 우주론, 제작 참여자들의 이름과 관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다.
1. 북두칠성(北斗七星)
북두칠성(北斗七星) : 북쪽 하늘. 큰 곰 자리의 일부 동양 점성술에서 인간의 수명을 주관(죽음),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믿음 고인돌 등에 많이 새김. 동양에서는 독립된 별자리이지만 서양에서는 큰 곰자리의 일부분으로 여긴다. 현대 천문학의 별자리 그림에서는 큰 곰자리의 꼬리에 해당하는 α별에서 η별까지 7개의 별이며, 동양에서는 각각 천추·천선·천기·천권·옥형·개양·요광으로 부른다. 7개의 별 모두가 2등급보다 밝은 별들이다.
북두칠성은 밝고 모양이 뚜렷해서 항해의 지침이나 여행의 길잡이로 이용되었다. 또한 북극성을 중심으로 일주운동을 하고 북반구에서는 사계절 어느 때나 볼 수 있으므로 그 위치를 보면 밤에도 시간을 알 수 있어 밤에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도 쓰였다. 한국의 민간신앙에서는 칠성을 신으로 모시기도 했는데, 칠성은 비, 수명, 인간의 운명 등을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 칠성단을 쌓고 그 위에 정화수를 놓아 빌기도 했다. 출처 : 다음 백과
2. 남두육성(南斗六星)
남두육성(南斗六星) - 남쪽 하늘. 궁수(사수) 자리의 일부. 하늘 제사를 모시는 하늘 사당 별자리. 사람의 탄생 결정, 행복, 장수를 관장한다고 함. 남쪽 하늘에서 북두칠성을 닮은 국자 모양의 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남두육성이다. 사람들은 남두육성에 육성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고, 육성신은 행복과 장수를 관장하는 신으로 생각했다. 집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삼신할머니에게 이야기해서, 삼신할머니가 남두육성께 아이를 점지해달라고 빌었다. 말이죠. 아이가 태어나면, 북두의 칠성신과 남두의 육성신이 바둑을 두어 그 사람의 수명을 정한다고 생각했다.
3. 하고성(河鼓星)
하고성(河鼓星) - 여름철 별자리 -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 견우성. 은하수 서쪽 가에 있는 독수리자리의 수성(首星)인 알타이르(Altair)의 딴 이름. 칠월 칠석에 오작교 위에서 직녀성을 만난다는 전설이 있음. 오작교(烏鵲橋) 즉 星橋臺와도 연관이 있음.
4. 확인 별자리
5. 미확인 별자리
■ 칠성 신앙의 요약[펌]
우리 조상들은 인간의 길흉화복은 물론 수명까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칠성님이 주관하고 있다고 믿었다. 북두칠성은 우리 조상들이 믿던 삼신 상제님을 별로 나타낼 때 붙여지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칠성신앙은 신교신앙의 하나였다.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표현들로서는 칠성님 외에도 칠성신(七星神), 칠성여래(如來), 칠원성군(七元星君)등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북두칠성을 섬겼다. 북두칠성은 배달국과 단군조선시대, 그리고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는 물론 고려와 조선의 별이었다. 고조선 시대에 만든 고인돌의 뚜껑 돌 위에 이미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고구려 왕릉의 천장 벽화에서는 북두칠성의 형상이 다량으로 발견된다. 광개토대왕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하늘 북두칠성의 자손 즉 천손 민족으로 적고 있다.
절에 가보면 대웅전 뒤편에 칠성각(또는 칠성당, 칠성전,삼성각)이라는 전각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불교 사찰내에만 존재하며, 원래 불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던 것이다. 이 전각은 한민족의 칠성신앙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사찰내에 수용되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이라는 널판을 관 밑바닥에 깔고서 그 위에다 시신을 눕혔다. 여기서 죽는 것을 '칠성판 짊어지고 간다'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 칠성판은 널판에다 북두칠성의 모양을 형상화하여 아래와 같이 7개의 구멍을 뚫거나 먹으로 표시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장례풍습은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민족만의 독특한 풍습이다. 이것은 그 영혼이 본래 온 고향별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면서 맨 먼저 지내던 초례(醮禮)는 칠성님께 드리는 인사였다. 우리나라 역대 임금들이 지내던 초재(醮齋)도 칠성님께 올리는 인사와 기원이었다. 이 칠성신앙인 초재는 조선 중종·명종조에 유명무실해졌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과 북두칠성을 호위하는 28수(宿) 별자리를 본 따 조경한 독창예술품인 동시에 북두칠성 신앙과 삼신상제 신앙의 대표작품이었다. 우선 광화문 앞과 경복궁 안에 있는 해치('해태'라고도 호칭)는 자미궁(자미원을 궁궐에 비유한 표현)의 남쪽 하늘을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경복궁 근정전 실내는 자미궁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조선시대의 고궁은 북두칠성이 있는 하늘의 궁궐, 자미궁을 본 따 지은 대궐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민족 고유의 칠성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출처: https://bud1080.tistory.com/152 [불교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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