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어우당길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두류암

도솔산인 2020. 4. 8. 15:38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두류암

 

선인들의 유람록에서 두류암에 대한 기록은 1580년 변사정의 유두류록과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1867년 김영조의 유두류록에 주변의 풍광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변사정과 유몽인은 두류암 북쪽에 있는 대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고, 높은 대에 올라가 바라본 폭포와 암자 앞 봉우리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세 사람은 송대에서 미타봉 능선을 넘어 두류암으로 넘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서 나는 송대에서 두류암으로 직접 이어지는 길을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송대에서 장구목을 지나 어름터와 두류암 삼거리 고개에는 길이 깊게 파여있어 가축이 이동한 흔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당시 광점동에서 두류암으로 올라오는 길도 있었겠지만, 두류암이나 어름터로 들어오는 주 통로는 광점동이 아니고 송대 마을이나 벽송사로 추정하는 것은 가축을 끌어올리는데 의탄천이 큰 장애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옛 문헌을 읽고 폐사지나 고 지명을 고증하는 것은 첫 번째 유람록과 고 문헌을 이해하는 능력과, 두 번째는 당시 산촌 사람들의 생활 공간이라는 눈높이에서 산을 읽는(讀山) 방법과, 세 번째 무엇보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영신사지와 지장사터, 상류암터에 이어 두류암터도 논란이 있었지만,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6번지(임야)에 있는 승탑 터는 선인들의 유람록과 천령지에 나오는 두류암과는 무관하다.

 

 

유몽인이 오른 두류암 북쪽 대(정면)

어쨌거나 선인들의 유람록에 두류암 북쪽 대에 대하여 1580년 변사정은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고, 1611년 유몽인은 두류암 오언율시 首연에서 '虛壁脩縑繟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淸光碎石縫 : 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라고 하였으니, 북쪽 대에 올라가 주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쪽 대에 오르는 길은 돌을 쌓아 조성한 흔적이 있고 좌선할 수 있는 대가 세 곳(확인 要)이 있으며, 이곳에서 앞을 바라보면 와폭포가 내려다 보이고, 두류암 시에 나오는 분기봉이 바로 눈앞에 들어온다. 아래 지적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90번지(畓)와 91번지(田 : 샘터가 있음)를 두류암터로 추정하는 것은 옛 문헌에 나오는 기록과 현장 주변의 정황을 종합·분석한 것이다. 장구목에서 두류암으로 내려오는 길은 어름터로 내려가는 3거리 고개에서 두류암쪽으로 능선을 따르다가 계곡으로 내려서면 대나무 숲과 마을터가 나온다. 마을터는 감나무와 대나무 밭만 남아 있지만 지적도에 진입 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두류암 추정지는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90번지(畓), 91번지(田)

 

1867년 김영조의 유두류록에 두류암이 존재하는데, 1656 정수민이 편찬한 천령지(天嶺誌)는 간행되지 않고 후손에 의해 집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한 시점인 1888에 '지금은 없음(今無)'이 추가 기입한 것으로, 두류암은 한말인 1867년과 1888년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한다. 아무튼 두류암은 폐사된 후에는 90번지와 91번지는 전답(田畓)으로 개간(開墾)한 듯하다. 근년에 옛 두류암 터에 어떤 사람(최○○氏)이 절을 세우려고 토지를 매입하여 축대를 쌓고 범종까지 갖다 놓았으나, 중단된 이유와 전후의 사정은 잘 모르니 언급하지 않겠다.

 

 

장구목에서 어름터 3거리 고개에서~두류암 가는 길목 추정(사진 산영님)

 

☞ 의문의 요약

1. 현 지도의 마적암 터는 상류암, 두류암 등의 사례를 비추어 검증이 필요함.

2. 유몽인 루트는 용유담-송대-두류암-어름터-구롱 길로 연결-석문-옹암-청이당 추정

 

 

▶ 두류암에 대한 유람록과 천령지의 기록

 

1 . 1580년 도탄 변사정의 유두류록

 

4月 初七日, 아침에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원문] 早食發行. 過龍遊潭. 至頭流庵. 層崖削出. 壁立萬仞. 百花爭發. 襲香一洞. 竟日坐玩. 不覺其暮遂入禪房. 共宿焉.

 

2. 1611년 유몽인의 두류암 오율시 首연

 

首연에...'虛壁脩縑繟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淸光碎石縫 : 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

 

 

유몽인이 올라간 북쪽 대(측면)
두류암 북쪽 대 상부 I
두류암 북쪽 대 상부 II
두류암 북쪽 대 상단 너럭 바위
유몽인이 올라갔던 북쪽 전망대
북쪽 대 위에서 바라본 와폭 II
와폭 근경 사진(200404)

3.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 4월 3일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四月三日壬申, 菴之北有臺. 直南而望之. 有飛瀑瀉于巖間. 如懸玉簾數十仞.

 

직폭포 I

 

 

4. 유몽인의 두류암 오율시 尾연

 

傳聲通翠筧 : 흐르는소리는 푸른 대통을 통해 들려오고/飛注作寒舂 : 떨어지는 물은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

 

5. 김영조(金永祚)의 유두류록

 

[1867년 8월 26일~29일] 向文殊寺. 境甚幽僻. 暮抵松臺村. 村在頭流山下. 四山簇立. 林壑蔚然. 川聲滾滾. 亦一別景也. 訪朴德元. 因畱宿. 踰一嶺. 至林下石澗盤上. 各啖梨一枚. 歷大坂至頭流菴. 田家數十戶. 皆升茅構木爲居也.

 

문수사(文殊寺)를 향하니, 장소가 매우 깊숙하고 치우쳐 있었다.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생초-엄천사지-문정동-세동마을-송대리-벽송사능선-어름터-두류암-말바우산막-중봉-천왕봉]

 

☞ 金永祚(1842~1917) 字 五兼(오겸) 號 竹潭(죽담), 본관 金海(김해), 거주지 山淸 丹溪(산청 단계)

 

6. 정수민이 편찬한 천령지

 

[원문] 頭流庵. 在君子寺東三十里. 東有松臺. 韻致幽閑.今無.(천령지130)

두류암은 군자사 동쪽 삼십리에 있다. (두류암) 동쪽으로 송대가 있는데, (두류암은) 운치가 그윽하고 한가하다. 지금은 없다.

 

정수민(鄭秀民)이 천령지(天嶺誌)를 편찬한 시기(1656)에는 두류암이 있었고, 천령지(天嶺誌)家藏(가장 : 간행되지 않고 후손에 의해 집에 보관 됨)되어 있다가,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한 시점(1888)今無가 추가 기입한 것으로 추정한다. 간행 시점(1888)에는 이미 두류암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천령지는 정환주(鄭煥周)의 간행본이다.

 

7. 기타 문헌의 기록

 

임진왜란 때 작성된 조경남의 난중 잡록,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 일록, 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 등에 두류암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인용하지 않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