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어우당길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석문과 옹암에 대하여

도솔산인 2020. 3. 1. 20:18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석문과 옹암에 대하여

 

유몽인 선생은 1611년 4월 4일 새벽 두류암을 출발하여 석문옹암→청이당→영랑대→소년대→천왕봉→향적암에 이르는데, 여기에서는 석문과 옹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유몽인의 기행시와 두류산일록에 석문과 옹암이 등장하는데, 전후 어떤 유람록에도 옹암에 대한 언급은 없다가, 1937년 김학수의 유방장산기행에도 옹암이 보인다. 여기에서는 독바위 아래 독바위양지 마을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석문에 대해서는 1922년 권도용 방장산부에서는 금강문, 1924년 강계형의 유람록에서는 통천문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옹암에 대한 언급은 없다. 유람한 분들이 옹암에 대하여 기록을 누락할 수도 있지만, 전하는 기록대로 본다면 석문을 지나가면서 옹암에 들르지 않을 수도 있고, 사립재(洞府)에서 새봉과 석문·옹암을 경유하지 않고 쑥밭재를 잇는 다른 상 허리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472년 김종직 선생과 1871년 배찬 선생은 동부(洞府)와 사립재(扉峴:비현)에서 청이당(천녀당)으로 올라왔지만, 석문과 옹암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상 허리길 루트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번 박여량 루트 답사를 하면서 산영(山影) 曺교수님을 통해 산길에 대한 이해의 폭이 한층 넓어졌고, 답사 자료의 공유와 소통 그리고 토론을 통해 의견을 나눈다면 유람록의 복원 속도를 높일 것으로 기대한다.

 

어름터 독가 박준현씨

 

 

 

옹암(甕巖, 瓮巖)은 항아리 모양의 바위라는 뜻으로 다른 이름으로 진주독바위라고 하는데, 옛날 지명이 진주목 단성현이어서 晋州독바위라는 설과 독바위 인근에 진주암이라는 암자가 있어서 眞珠독바위라는 설[一丁 閔선생님은 서산정씨 무덤이 있는 곳을 진주암으로 추정, 쌍계사 순원 스님께서는 진주의 주가 珠(주)나 주(住)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으나 근거를 확인할 수 없어 설명은 보류한다. 아무튼 옹암과 진주독바위로 부르다가 어느 날부터 지리산 갑자기 산행기에 산청독바위로 쓰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대개 산청독바위로 부르고 있다. 그 근원을 추적해보니 지리 99의 지리산길지도에 아무런 근거와 고증이 없이 산청독바위라고 표기한 것이 오류의 근원이었다.

 

잘못된 지명이 한 번 유포되면 영신사지청학연못처럼 온라인의 파급성으로 인해 되돌리기가 어렵고, 바로잡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제멋대로 이름을 창지개명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행랑굴과 영랑재처럼 아무도 모르게 슬그머니 지우던지, 아니면 솔직하게 오류라고 떳떳이 밝히고 옹암이나 독바위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독바위양지도 오류이다. 지명에서 산의 남쪽과 물의 북쪽을 陽(양)이라고 하고 산의 북쪽과 물의 남쪽을 陰(음)이라고 한다. 정작 현지 주민들도 독바위 능선 자락의 경작지와 마을터를 독바위양지라고 부른다. 소년대, 영랑재, 행랑굴, 말봉, 청이당, 두류암, 상류암, 독바위양지, 상내봉, 지장사은 위치가 다르고, 옹암산청독바위로, 독녀암함양독바위로 아예 성과 이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나마 유람록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은 삼열암과 의논대, 환희대, 마암당과 쑥밭재뿐이다.

 

☞ 솔레이님의 지명 바로잡기 옹암(독바위) : https://blog.naver.com/ylee6517/221331632486

 

 

 

1. 기행시와과 유람록에 나오는 석문에 대한 기록

 

가. 頭流菴 贈慧日 兼示修師 - 柳夢寅(1611년 어우당 유몽인이 두류암 승려 혜일에게 준 시)

(두류암 혜일에게 주고 아울러 수선사에게 보여주다.)

 

先賢曾訪頭流境 路由義呑村之南 : 선현들이 두류산 선경을 찾아 나섰으니/ 길은 의탄촌 남쪽을 경유하였지

我今尋眞入頭流 偶然一宿頭流菴 : 내 이제 진경을 찾아 두류산에 들어와서/ 우연히 하룻밤을 두류암에 묵었네

頭流菴在義呑上 我行適與先賢同 : 두류암은 의탄 마을 위쪽에 있으니/ 내 산행이 마침 선현들의 유람 길과 같네

先賢之跡不可追 攀躋欲上天王峯 : 선현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없지만/ 더위잡고 오르더라도 천왕봉에 오르고자하네

學士投詩潭龍怒 雲雷作風雨獰 : 학사가 용류담에 시를 던져 용이 노하니/ 구름이 일고 천둥이 쳐서 비바람이 몰아쳤네

山靈借我快眺望 却掃雲翳俄淸明 : 산신령은 나에게 즐거운 조망을 빌려주고/ 구름을 걷어 한순간 대기를 청명하게 했네

冷風颯颯爽籟發 客懷憀慄如三秋 : 서늘한 바람이 불고 상쾌한 소리가 일어나니/ 나그네 회포는 늦가을인 듯 처량하네

山花杜宇啼幾層 令人半夜生閑愁 : 진달래꽃 두견새는 어디에서 우는가/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수심에 잠기게 하네

慧僧慇懃覓詩句 秉燭起坐强吟呻 : 혜일이 은근히 시를 지어달라고 하여/ 촛불을 켜고 일어나 앉아 억지로 읊어보네

詩不驚人○○焉 爲緣重見情相親 : 시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니...../ 인연이 되어 다시 만나 정이 서로 친하기 때문일세

明朝我向石門去 師在頭流雲水間 : 내일 아침 나는 석문으로 떠날 것이고/ 선사는 두류산 구름과 계곡 사이에 머물겠지요

師憶江南老太守 祖溪秋月倘來看 : 선사는 강남땅 늙은 태수를 생각하리라/ 조계에 가을 달 뜨면 혹 와서 보려나

 

雲翳 : 햇빛을 가린 구름의 그늘. 祖溪 : 두류암 [출처 : 지리산유람 기행시 1권 최석기/강정화]

 

 

 

나. 1922년 권도용 방장산부〔1922.4.16 함양 출발-지안재‧오도재-벽송사(1박)-두리(폐사지)-마암(부근 1박)-천왕봉 일출-백무동(1박)-고정(1박)-화산12곡 일부〕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過杜里之廢寺 有兩巖之交粘 問奚名則曰金剛門 亦禪師之權辭以拈眡) [지리 99 국역 이재구 선생]

 

다.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1924.8.16 오후 문정동-세동(1박)-마적동-송대(1박)-마당바위-장구목-사립재-통천문-쑥밭재-천례탕-마암당-하봉-중봉-천왕봉(1박)〕

아래 위의 석문을 지났다. 문의 양쪽은 모두 바위이고 가운데로 한 줄기 좁은 길이 통하였다. 바위의 모양은 위가 붙어있고 가운데가 비어 십여인을 수용할 수 있으며 흰 글씨로 통천문(通天門)세 글자가 석면에 쓰여 있었다.(過上下石門 門之兩傍皆石 而中通一逕 巖形上合 而中虛 可容十餘人 以白書通天門三字於石面) [지리 99 국역 이재구 선생]

 

 

2.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옹암에 대한 기록

 

가. 1611년 어우당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옹암 

 

○ 4월 4일 계유일. (두류암에서)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그늘진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어두컴컴하였다. 머리가 멍하고 현기증이 나서 나무를 잡고 기대섰다. 놀란 마음에 눈이 휘둥그레져 굽어볼 수가 없었다. 영랑은 화랑의 우두머리로 신라시대 사람이다.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바닷가를 마음껏 유람하였다. 우리나라의 명산마다 이름을 남기고 있다.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淸夷堂. 穿森木亂石叢. 永郎臺. 俯臨陰壑. 然昏黒. 魄遁眼眩. 攀木却倚. 愕眙而不能稽. 永郎者. 花朗之魁也. 新羅時人也. 率徒三千人. 遨遊山海. 我國名山水. 無不寓名焉.

 

 

. 1937년 김학수의 유방장산 기행(816~20)

 

옹암(瓮岩) 사람[독바위양지사람] 박양환(朴亮煥)이 마침 이곳에 와서 산에 올라갈 계획이라고 하였는데 일기가 맑을 때라서 그 말을 들어줄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회천이 뱃속이 편치 않다며 식사를 하지 않았으며 존곡은 다리에 병이 나서 돌아가려 하였다. 일행이 모두 무료하여 주저하다가 시간을 보내었는데 존곡과 회천이 점차 회복되고 날씨 또한 맑아져서 기쁨을 헤아릴 수 없었다. 드디어 천천히 가다가 이사중(李士仲)의 집에 이르렀다. 사중은 본래 우리 동네 사람인데 이곳에 산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주식(酒食)의 범절이 성시(城市)와 다름이 없었다. 서로 함께 배불리 먹고 유숙(17)하였다.

 

瓮岩人朴亮焕適來此. 爲言上山計劃. 及日氣開晴之期. 亦可聽也. 及朝. 晦川以腹中不安不食. 存谷有脚病. 欲回程. 一行皆無聊. 躊躇移時. 存谷晦川漸次向蘇. 日氣又晴. 喜不可量也. 遂徐行. 至李士仲家. 士仲本吾同里之人. 而寓此已有年. 酒食之凡節. 無異城市. 卽相舆飽喫留宿.

 

다음날(18) 드디어 출발하였다. 이의헌(李宜軒)이 이전에 갔다 온 적이 있어서 앞으로 갈 길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니 참으로 기연(奇緣)이다. 그러나 수풀이 삼처럼 어지럽고 풀들이 길에 가득하여 인적이 드물고 산줄기 작은 길이 혹은 끊어지다가 혹은 이어져 앞사람이 부르면 뒷사람이 응답하면서 옹암(瓮巖) 아래에 이르러 잠시 쉬었으니 이곳은 조개곡(朝開谷)의 입구이다. 사는 사람들 말로는 만약 애전령(艾田嶺)에 이르면 길이 비록 약간 멀더라도 사람의 힘을 덜 수 있을 것이요, 만약 조개곡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힘이 다소 고되더라도 길은 매우 빨라질 것이라고 하기에 분분히 토론을 오래하던 끝에 마침내 지름길로 가기로 하였는데 빽빽한 숲과 등나무 넝쿨, 무성한 풀들이 덮고 있어서 지척을 가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목을 숙이고 엎드려 가다가 거봉(耟峯:써리봉)에 도착하니 집 한 채가 있었으니 바로 목공이 그릇을 만드는 곳이다.

 

* 耟峯 : 鋤屹山 耟는 쟁기, 보습, 따비의 의미로 서리봉의 이칭.

 

翌日遂發行. 宜有軒曾有經歷. 詳知前路. 亦奇緣也. 然樹林如麻. 草卉滿逕. 人跡罕到. 一線微路. 或斷或續. 前者呼後者應. 瓮巖下少憩. 此爲朝開谷入口也. 居人云. 若從 艾田嶺. 則路雖稍遠. 人力可寬. 若入朝開谷. 則人力少苦. 而路勢甚捷. 紛論久之. 竟從捷逕. 叢薄藤蔓. 蒙茸被覆. 咫尺不辨. 縮頸俯行. 耟峰. 有一屋. 乃木工製器所也.

 

* 유람록 출처 : 문화콘텐츠 닷컴

 

 

 

☞ 위 내용은 저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