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년 유몽인 선생길 갈월령에서 군자사까지(180714~15)
▣ 일 시 : 2018년 07월 14일 ~ 15일
▣ 코 스 : 영원사-빗기재-영원봉-벌바위-영원령(갈월령)-영원사-군자사
▣ 인 원 : 3명(이용훈님, 안창식님), 박지합류 2명(김자준님, 조바님)
▣ 날 씨 : 찜통, 맑음
지난 5월 군자사에서 두류암까지(180526~27), 지난달 양류암 산행(180623~24)에 이어서 유몽인 길을 逆으로 이어간다. 이제 갈월령(葛越嶺)을 넘어 와곡(臥谷)까지만 이으면 산길은 끝이 난다. 최석기 교수님이 유산기 국역을 하신 이후, 100편이 넘는 관련 논문이 나왔다고 하니, 궁금한 것은 논문을 읽기로 하고 대략 코스만을 짚어 성큼 대충 지나갈 생각이다. 나머지 남원 용성 관아에서 와운까지는 차량으로 답사할 예정인데, 남원의 두류실 조용섭 선생께 안내를 요청할 생각이다. 답사 산행을 하며 느끼는 것은, 퇴계 선생의 말씀처럼 '백 번을 누여야 실이 하얗게 되고, 천 번을 갈아야 거울이 밝아진다.'라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솔박사의 지명 바로잡기 시리즈를 읽으며, '후생가외(後生可畏)와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성현의 말씀은 바로 이 경우인 듯하다. 글을 읽는 것이 산을 읽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같은 글을 읽으며 생각이 다른 것은 어째서인지? 산은 하나인데 사람마다 보는 것이 같지 않음은 어째서인가?(山一也. 而人所見不同. 何也.)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貪·瞋·痴(탐·진·치)때문일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담 정시한 선생의 영역에 들어왔으나, 우담 정시한 선생의 길은 남겨둘 생각이다. 끝.
강청마을 초암당 조필제 선생댁
지리산 황토민박 '두지방' 예약문의 010-7131-1915
艸庵堂에서 마늘 3통 취함.
1.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
○ 4/2 : 정룡암→월락동→황혼동→와곡→갈월령→영원암→장정동→실덕리→군자사(1박)
♣ 황혼동을 지나 갈월령을 넘어 영원암에 이르다.
○ 1611년 4월 2일 신미일. 새벽밥을 먹고 월락동(月落洞)을 거쳐 황혼동(黃昏洞)을 지났다. 고목이 하늘에 빽빽이 치솟아 올려다봐도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밝은 대낮일지라도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월락동․ 황혼동이라고 부른다. 와곡(臥谷)으로 돌아들자 수목이 울창하고 돌길이 험하여 더욱 걷기 힘들었다. 천 년이나 됨직한 고목들이 저절로 자라났다 저절로 죽어, 가지는 꺾이고 뿌리는 뽑혀 가파른 돌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가지를 베어내고 문을 드나들 듯이 구부리고서 그 아래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문지방을 넘듯이 걸터앉아 넘기도 하고, 사다리를 밟고 오르듯이 밟고서 지나기도 하였다. 그 외에 공중에 선 채로 말라죽어 반쯤 꺽이거나 썩은 것도 있고, 가느다란 줄기가 우뚝 위로 천 자나 솟구쳐 다른 나무에 기대어 쓰러지지 않은 것도 있고, 푸른 등나무가 오랜 세월 뻗어나가 가지를 드리우고 잎을 늘어뜨리고서 장막처럼 펼쳐져 있는 것도 있었다. 수십 리에 걸쳐 굽이굽이 뻗은 시내는 높은 언덕이 없어 맑은 바람이 항상 가득하고 상쾌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았다. 함께 유람온 사람들이 봄옷을 입은 지 한 달 남짓 되는데, 이곳에 이르러 모두 두터운 솜옷을 껴입었다. 해가 뜰 때부터 등산을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 비로소 갈월령(葛越嶺)을 넘었다. 갈월령은 반야봉(般若峯)의 세번째 기슭이다. 가느다란 대나무가 밭을 이루고 몇 리나 펼쳐져 있었지만, 그 사이에 다른 나무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사람이 개간하여 대나무를 심어놓은 듯하였다.다시 지친 걸음을 옮겨 영원암(靈源菴)에 이르렀는데 영원암은 고요한 곳이면서 시원하게 탁 트인 높은 터에 있어서, 눈앞에 펼쳐진 나무숲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왕대나무를 잘라다 샘물을 끌어왔는데, 옥 구르는 소리를 내며 나무통 속으로 흘러들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암자는 자그마하여 기둥이 서너 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깨끗하고 외진 것이 사랑할 만하였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마이봉(馬耳峯)을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상무주암을 등지고 있다.이 암자에 사는 이름난 승려 선수(善修)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풀어내어 사방의 승려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순지와 퍽 친한 사이여서 우리에게 송편과 인삼떡, 팔미다탕(八味茶湯)을 대접하였다. 이 산에는 대나무 열매와 감과 밤 등이 많이 나서 매년 가을 이런 과실을 따다 빻아 식량을 만든다고 한다.해가 기울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산 봉우리에 구름이 모여들어 비가 올 징조가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떠나 사자항(獅子項)을 돌아 장정동(長亭洞)으로 내려갔다. 긴 넝쿨을 잡고서 가파른 돌길을 곧장 내려가 실덕리(實德里)를 지났다. 그제야 들녘의 논이 보였는데 처음으로 물을 대는 도랑에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내렸다.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고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 하는데, 가져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칠 동안 세상 밖에서 청량한 유람을 하여 신선의 세계에 오른 듯하였는데, 갑자기 하루 저녁에 속세로 떨어지니 사랑의 정신을 답답하게 하여 밤에 마귀에 시달리는 꿈을 꾸었다. 공자께서 “군자가 살면 어찌 비루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신 말씀은 늘 가슴속에 새기기 어려운 듯하다.
군자사(君子寺) : 지리산(智異山)에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진평왕(眞平王 579년∼632년)이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서 살다가 태자를 낳고 환국할 때에 집을 회사하여 절을 만들었다.” 하였으나, 사서(史書)에는 다 보이지 않는다. [《여지승람》에 함양(咸陽)]
[원문]
♣ 황혼동을 지나 갈월령을 넘어 영원암에 이르다.
辛未. 褥食. 歴月落洞. 過黃昏洞. 古木參天. 仰不見日月. 雖淸晝猶昏黑. 故稱月落黃昏. 轉入卧谷. 樹木猶蓊蔚. 石路崚嶒益艱. 千年老木. 自長自死. 枝摧根拔. 橫截石磴. 經過者刋其枝. 伏出其下如門戶然. 跨而越履而登. 如閾闑梯級然. 其他空中立枯半折半朽者. 纎纖莖擢. 上聳千尺. 依附衆木而不顚者. 蒼藤耉造. 垂梢倒葉而羃䍥如帷帳者. 彌亘澗溪數十里. 㒺有垠鍔. 淸風恒蓄. 爽氣不散. 同遊者春服月餘日. 至此皆重綿. 自日出攀登. 至日將午. 始躋葛越嶺. 嶺卽般若峯之第三麓. 翠篠成畛. 漫衍數里. 無雜樹間之. 有若人墾而藝之者. 又蹭蹬抵靈源菴. 靈源. 靜界也. 喬基爽塏. 俯臨群木. 剖篔簹引飛泉. 琮琤鳴玉. 㵼下木槽中. 淸瑩可以解渇. 菴小不滿三四楹. 而淸僻可愛. 南對馬耳峯. 東望天王峯. 北負上無住. 有名僧善修居之. 率徒第演經. 四方釋子多歸之. 與詢之頗相善. 餉之以松餻蔘餅八味茶湯. 是山多竹實柹子栗子. 每秋收而舂之以爲粻云. 日晩風色颯然. 前峯雲氣苒苒而生. 知有雨候. 遂促行轉獅子項. 下長亭洞. 牽脩蔓直下絶磴. 過實德里. 始見野田初決渠. 白水決決. 暮投君子寺. 寺野刹也. 埃氛滿堂. 獨牧丹對禪房方敷榮. 可賞. 寺前舊有靈井. 號靈井寺. 今改以君子. 未知取何義也. 數日間淸遊雲表. 有若羽化淸都. 忽一夕擠落黃塵. 使人神精逼塞. 夜夢將魘. 夫子所謂君子居何陋者. 恐難服膺也.
2. 군자사(君子寺) - 이덕무 청장관전서
계묘년(1783, 정조 7)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霤)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天嶺 경남 함양(咸陽)의 옛이름)의 남쪽 50여 리에 지리산(智異山)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아래 큰 시냇가에 이 절이 있다. 진(陳) 나라 대건(大建 선제(宣帝)의 연호) 10년(578) 무술,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이 즉위하기 전에 왕위를 피해 이곳에 있을 때 여기에서 태자를 낳았고 환도(還都)하여서는 이곳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군자사라 한 것이다. 그후로 거듭 난리를 만나 흥폐(興廢)를 거듭하다가 고려(高麗) 경원(慶元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4년(1198) 무오에 불일국사(佛日國師)가 이 산 위에 있는 무주암(無住庵)에 와 머물면서 내관(內觀)에 정진(精進)하였다. 얼마 후 그가 승평선사(昇平禪社)로 돌아갈 때 이 산 아래를 지나다가 이 절터를 보고 절을 지으려다가 유감스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사법(嗣法) 제자인 진각국사(眞覺國師)에게 명하기를 ‘나의 뜻을 잘 이어받아 그곳에 가서 절을 지으라.’ 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그 영수(領袖)로 하여금 먼저 불당을 새로 짓고 점차로 승사(僧舍)를 완성하게 한 다음 대중에게 고하기를 ‘절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내가 감히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하고 그의 문제(門弟)인 신담(信談)을 시켜 이곳을 주관하게 하고 금대암(金臺庵)에 물러가 있다가 다시 단속사(斷俗寺)로 옮겨갔다.
그후 세상이 많이 바뀌면서 이 절은 또다시 흥폐를 거듭하다가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4년(1317, 충숙왕 4) 정사에 혜통화상(慧通和尙)이 이 절에 와서 절을 크게 수리하고 증축하였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도이(島夷 일본을 말한다)의 침략을 거치면서 이 절 또한 불에 타서 파괴되었다. 홍무(洪武) 37년 갑신에 천태(天台)의 영수(領袖) 행호 대선사(行呼大禪師)가 새로 크게 확장하므로 옛 규모보다 더 커져서 상실(像室)과 경대(經臺) 등 모두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19년(1680, 숙종 6) 경신에 청신사(淸信士) 순일 운석(淳一韻釋)이 옛 누(樓)를 고쳐 새롭게 하고 신관도인(信寬道人)이 기와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단청은 올리지 못했다가 갑자년(1684) 봄에 통정(通政) 태감법사(太鑑法師)가 유악(幼堊)을 칠하였다. 강희(康熙) 23년(1684)에 방호(方壺)의 필추(苾芻 비구(比丘)를 말한다) 형곡 복환(荊谷復還)이 쓰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원문에 ‘自爾厥?’ 라고 한 것의 ‘?’ 자는 ‘后’ 자인 듯한데 이 글에 ‘?’로 썼으니 생각건대, ‘后’자가 비록 ‘後’자와 통용되기는 하나 아마도 후왕(后王)의 후(后)자를 혐의쩍게 생각하여 고의로 ‘口’를 빼고 ‘?’로 쓴 것인가 보다. 이 절은 현재 퇴폐(頹廢)하여 단지 비구승(比丘僧) 10여 명이 있을 뿐이다.
[주-D001] 내관(內觀) : 불교 용어. 바깥 경계를 떠나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기를 관찰하는 공부를 말한다.[주-D002] 홍무(洪武) 37년 갑신 : 홍무는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로서 31년으로 끝나고 37년은 없다. 갑신년은 태조 사후 6년째가 되는 명 성조(明成祖) 영락(永樂) 2년(1404)에 해당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승운 (역) | 1981
출처 : 장달수 한국학카페
3. 황준량의 장항사동
〔君子寺洞〕 - 황준량
웅장한 두 협곡 사이로 냇물이 흘러가니 / 一水中開兩峽雄
깊은 산 물상에도 정녕 봄바람 부는구나 / 深山物色正春風
영원동에 문득 꽃 찾는 길손이 이르니 / 靈源忽到尋花客
옥동에서 약초 캐는 노인을 만날 듯하네 / 玉洞疑逢採藥翁
험준한 기암은 그림 병풍보다 낫고 / 錯落奇巖勝畫幛
맑고 깊은 못에는 신령한 용 숨어 있네 / 泓澄深竇隱神龍
청산이 홍진의 꿈을 앗아간 듯하니 / 靑山如奪紅塵夢
소유와 인연 맺어 이 비경에 살고 싶네 / 好結巢由此祕蹤
[주C-001]군자사(君子寺) : 경상도 함양에 있는 사찰로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조성했다고 한다.
[주D-001]소유(巢由) : 요(堯) 임금 때의 고사(高士)인 소보(巢父)와 허유(許由)를 가리킨다. 소보와 허유는 기산(箕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요 임금이 허유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고 하자 허유가 그 소리를 듣고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면서 영수(潁水)의 물에 귀를 씻었다. 소보가 소를 끌고 와서 물을 먹이려고 하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물으니, 허유가 “요 임금이 나를 불러 구주의 장을 삼으려고 하므로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귀를 씻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소보가 그 귀를 씻은 물을 먹이면 소의 입을 더럽히겠다고 하면서,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 《高士傳 許由》
출처 : 장달수 한국학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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