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어우당길

1611년 유몽인 선생 용유담에서 두류암 가는 길(180526~27)

도솔산인 2018. 5. 27.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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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유몽인 선생 용유담에서 두류암 가는 길(180526~27)

 

 

▣ 일   시 : 2018년 05월 26일 ~ 27일

▣ 코   스 : 군자사 - 용유담 - 마적동 - 송대마을 - 어름터독가 - 두류암터 - 광점동

▣ 인   원 : 5명(미산님, 최정호님, 윤선생님, 정삼승님)

▣ 날   씨 : 아침 최저 기온 10도, 낮 한여름 날씨

 

 

1. 용유담 나무다리(略彴) 를 건너서...

 

1611년 4월 3일 어우당 유몽인 선생은 군자사를 출발하여 의탄과 원정동을 지나 용유담을 유람하고 마적암지 들렀다가 송대 마을을 지나 두류암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4월 4일] 두류암출발하여 석문, 옹암(진주독바위), 청이당, 영랑대, 소년대를 거쳐 천왕봉으로 올라간다. 이번 산행에서는 용유담 건너는 나무다리(略彴)부터 두류암까지의 여정을 확인하고자 한다.

 

 

가. 1610년 9월 3일 감수재 박여량 두류산일록

 

潭之少東南偏有龍王堂創未久也略彴以往來汝昇與其婿能越畧작而驀上最高石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무다리(略彴)를 설치해 왕래하는데, 박여승과 그의 사위는 그 다리를 건너 가장 높은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다.

 

나. 1611년 4월 3일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

同行者遂褰裳徑渡. 略彴走投于荒祠中以竢焉.

동행한 사람들이 옷깃을 거머쥐고 곧바로 통나무다리(略彴)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

 

☞ 略彴(약작) : 한 개의 통나무로 놓은 다리. 독량(獨梁), 독목교(獨木橋), 외나무다리

 

다. 1790이동항[방장유록] 

潭之西岸有古廟祀神龍爲巫覡祈禱所編木爲橋以通往來而爲嵐湍所眩往往有墜水而死者云 

[417] 못의 서쪽 언덕에는 오래된 사당이 있는데, 무당들이 신룡(神龍)에게 기도 드리는 곳이었다. 나무를 엮어서 다리를 놓아 오가게 하였다. 여울물에 바람이 일어 현기증이 나서 지나는 사람들이 물에 떨어져서 죽는 일도 가끔 있다고 하였다.

 

 

 

 


불일계곡 보조암터 앞 통나무다리(略彴)

 

 

마천에서 일행들과 만나 점심을 먹고 광점동에 차를 파킹하고, 미산 선생님 차로 용유담을 향한다. 용유교에 차량을 주차하고 반야정사 산신당에서 나무다리(略彴)로 가는 희미한 옛길을 찾아 진입하여, 용유담 상단 계곡으로 내려가 독목교(略彴)의 바위 홈을 확인하고 마적동을 향한다. 오늘은 차량으로 마적동을 거쳐 송대마을까지 이동할 계획이다. 마적동 초입을 놓쳐 경로를 이탈하여 문수사를 들렀다가 세동마을에서 임도로 송대마을을 향한다. 임도의 중간 마적동에 세진대와 마적사터가 있지만 하이패스하고 송대 주차장에 닿았다.    

 

 

 

 

 

 

 

 

 

 

 

略彴(약작)을 설치한 인공 바위 홈 

 

 

 

 

 

 

 

 

 

문수사부도

 

 

문수사

 

2. 마적동을 지나 송대에서 듀류암 가는 길

 

송대마을에 차량을 주차하고 장구목으로 가는 길은 험란(?)했다. 송대마을 주민 <안보살>이라는 여자에게 걸려 사유지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혼줄이 난다. 끝까지 쫓아와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귀를 못알아 듣느냐?'라고 심하게 훈계를 하기에 '이렇게 심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 사유지인지 모르고 길을 따라 왔다. 미안하다.'라고 사과를 하고 조금 올라가니 지리의 은자 임보선씨 댁이다. 인기척이 나고 임보선씨가 불청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보선루에서 솔잎차를 마시고 보선씨 안내를 받아 장구목을 향한다. 아마 <안보살>이라는 여자가 송대마을을 지나는 둘레길을 막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첩첩산중 오지에 이방인들이 갑자기 몰려와서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나물이나 버섯과 약초를 약탈해가니 둘레길을 막았을 것이다. 인간사 새옹지마라. 인심 사나운 <안보살> 덕분에 지리의 은자를 만나 산중에서 얼음을 띄운 동동 솔잎차를 얻어 마시고, 솔잎 엑기스 한 병을 얻었으니 사람의 일이란 예측할 수 없다.

 

송대에서 어름터로 넘어가는 장구목을 통과하는 길 외에는 없다. 능선에 올라 내려서다 보면 왼쪽으로 어름터로 가는 지름길이 있지만, 우리는 장구목에서 어름터로 내려섰다. 그 길은 장구목에서 어름터로 내려가는 길과 결국 합류한다. 한참 내려서면 머위가 가득한 마을 터가 있고, 곧바로 광점동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만나고  어름터 독가 턱밑이다. 아마 이곳이 1580년 4월 초파일 아침 변사정이 두류암을 출발하여 지나간 자진동(紫眞洞)일 것이다. 오늘의 산행은 여기까지이다. 청수정에 젤트를 설치하고 마천석 위에서 지리산 黑豚이 익어가는 밤, 박준현군이 모처럼 마신 술 기운에 양은솥에 불을 때서 한 밥은 粥(죽)이 되어 버렸다.

 

 

 

寶仙樓에서

 

 

송대마을 지리의 은자 임보선씨 댁

 

 

얼음터 독가

 

 

 

 

3. 두류암 가는 길

 

처음 ○○암을 부도터를 찾았을 때 이곳이 두류암이려니 생각했지만, 언젠가부터 선답자들의 기록이 믿기지 않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류암에서 쉬어간 선인들의 유산록을 읽으며 더욱 그 의문은 커져갔고, 유산기 외에 다른 기록은 없나 궁금했으나 달리 확인할 길도 없다가, 최근 고서점에서 함양군지 1冊 한 帙을 구했으니, 어느 곳이 두류암 터가 맞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다. 아무튼 산행을 마치고 함양군지를 보면 확인이 가능할 수도 있고, 확인이 되지 않는다해도 애가 탈 일도 아니다. 여기가 두류암이면 어떻고 저기가 두류암이면 어떻랴. 결과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산행을 하면 되는 것이고, 이곳이 두류암이 아니라는 확실한 고증이 있더라도 상류암 터처럼 억지를 쓰고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암 부도터 가는 길은 참으로 부드럽다. 산길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산길 또한 인간의 발길을 가로막지 않는다. 물을 만나면 건너고 커다란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면 된다. 화전민들의 전답 터를 보면 이 험준한 골짜기에 들어와서 석축을 쌓고 다락논을 만들어 벼 농사를 지으며 살았을 것이다. 논이라는 증거는 경작지가 대부분 수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폐경작지가 나무로 울창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머리 속에서 상상의 그림으로 그려내며 산길을 오른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마소가 다니고 농부가 지게를 지고 오르내린 길이라 산 길이라도 유순하다. 

 

 

가. 두류암에 대한 선인들의 기록

 

1) 邊士貞[1529(중종 24)1596(선조 29)] 조선 중기의 의병장

 

[1580年 4月 初七日]. 早食發行. 過龍遊潭. 至頭流庵. 層崖削出. 壁立萬仞. 百花爭發. 襲香一洞. 竟日坐玩. 不覺其暮遂入禪房. 共宿焉.

 초7일에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四月 初八日]. 晨朝促喫. 紫眞洞. 攀巖飛杖. 登天王峯. 是日也天氣淸朗. 極目無碍. 精神灑落 

4월 초8일 아침 (두류암에서) 일찍 밥을 먹고 자진동(紫眞洞)을 지나 바위를 잡고 지팡이를 날리며 천왕봉(天王峯) 에 올랐다. 이 날은 날씨가 매우 맑고 화창하여 시계가 막힘이 없었고 정신이 씻은 듯 상쾌하였다.

 

紫眞洞(자진동) : 어름터 주변으로 추정함.

 

 

 

2)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

 

[4월 3일] 遂入頭流菴. 菴之北有臺. 直南而望之. 有飛瀑瀉于巖間. 如懸玉簾數十仞. 雖竟夕坐玩. 不覺其疲. 而會雨新晴. 谷風淒緊. 以爲過爽不可久淹. 遂入禪房安頓焉.

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었다.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頭流菴 - 柳夢寅

 

虛壁脩縑繟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

淸光碎石縫 : 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

傳聲通翠筧 흐르는소리는 푸른 대통을 통해 들려오고

飛注作寒舂 : 떨어지는 물은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

雙柏西僧老 : 두 그루 잣나무 서쪽 승방 가에서 늙었고

層壇北斗封 : 층층의 법단은 북두성인듯 우뚝하구나

長風生萬籟 : 긴 바람 불어와서 온갖 소리 일으키니

深省寄前峰 : 깊이 성찰하며 앞산 봉우리에 기대 섰네.

 

 * 1구 맨 끝자 享+單은 자전에 없어 느슨할 단, 계속될 선(다른 표현: 띠 늘어질 천)으로 보았고 春(춘)이 아니고 舂 : 찧을용이 맞음,

 

 

頭流菴 贈慧日 兼示修師 - 柳夢寅

(두류암 혜일에게 주고 아울러 수선사에게 보여주다.)

 

先賢曾訪頭流境 路由義呑村之南 : 선현들이 두류산 선경을 찾아 나섰으니/ 길은 의탄촌 남쪽을 경유하였지

我今尋眞入頭流 偶然一宿頭流菴 : 내 이제 진경을 찾아 두류산에 들어와서/ 우연히 하룻밤을 두류암에 묵었네

頭流菴在義呑上 我行適與先賢同 : 두류암은 의탄 마을 위쪽에 있으니/ 내 산행이 마침 선현들의 유람 길과 같네

                                                                                       [출처 : 지리산유람 기행시 1권]

 

 

 

3) 김영조(金永祚)(1842~1917)

 

[1867년 8월 26일~29일]

向文殊寺. 境甚幽僻. 暮抵松臺村. 村在頭流山下. 四山簇立. 林壑蔚然. 川聲滾滾. 亦一別景也. 訪朴德元. 因畱宿. 踰一嶺. 至林下石澗盤上. 各啖梨一枚. 歷大坂至頭流菴. 田家數十戶. 皆升茅構木爲居也.

 

 문수사(文殊寺)를 향하니, 장소가 매우 깊숙하고 치우쳐 있었다.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어름터]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생초-엄천사지-문정동-세동마을-송대리(1박)-벽송사능선-어름터-두류암-말바우산막-중봉-천왕봉]

 

 

 

 

4) 배찬裴瓚[1825(순조 25)~1898(광무 2)] 조선 후기 유학자교육자

 

[1871年 9月 初7日]하산길

須臾四山忽黑海風. 甚冷凜乎. 其不可乆留也. 因促行還到馬巖幕. 從者先詣. 朝飯已熟矣. 飯後. 遂直下頭流菴. 小憇. 至五峯村後麓. 村人員簞食壺漿而來. 一行皆頼此免飢. 侯命給其價而謝之.

 

조금 있으니 사방 산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해풍이 매우 차가워서 떨려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마암의 산막으로 돌아왔다. 시종이 먼저 도착해서 조반을 이미 지어놓았다. 밥을 먹은 후에 마침내 바로 두류암으로 내려와 잠시 쉬고 오봉촌 뒤의 산촌[오봉리상류 폐독가 근처]에 이르렀는데, 마을 사람이 밥과 음료수를 지고 와서 일행은 모두 이로 인해 갈증과 배고픔을 면하였다. 수령이 값을 쳐주어 사례하게 하였다.

 

[화림암-오봉리-사립재-쑥밭재-청이당-마암(1박)-중봉-천왕봉(2박)-마암산막(조반)-중봉-두류암-사립재-폐독가(늦은중식)-화림암]

 

 

 

5) 1922년 권도용 방장산부(方丈山賦)

 

 

4월 기망(旣望 *16) 벽송사 출발

惟禪應之指路 幾俗臘之古稀 得般若之道力 倏登陟而如飛 憩氷峙徐進 得盤陀之石磯 出二派而匯合 成 自然之淸潿 蒼藤古木湲依依 山禽效吟樵歌忘機 遂乃弛擔午䭜脫略交譚 太守請余而錫名 名之曰三乂巖 溪壑荵蒨於耳 郭峯巒糾紛於眼簾 過杜里之廢寺 有兩巖之交粘問奚名 則曰金剛門 亦禪師之權辭以拈眡

 

[국역] 승려 응지가 길을 인도하였는데 세속 나이로 거의 고희에 가까웠지만 빠르게 산을 오를 때는 마치 나는 듯하였다. 빙치(氷峙)에서 쉬었다. 천천히 나아가 너럭바위에 이르렀는데 여울이 두 갈래로 흘러오다가 합쳐 저절로 맑은 웅덩이가 되었다. 푸른 등나무 고목은 물가에 푸릇푸릇하고, 산새는 나무꾼의 노래를 흉내 내어 울어 세상일을 잊게 하였다. 마침내 짐을 내리고 점심을 먹으면서 간단히 얘기를 나누었다. 태수가 내게 바위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삼예암(三乂巖 *물결이 세 갈래로 둘러싼 바위)이라 이름 붙였다. 골짜기의 물소리 또렷이 귓가에 들리고 산봉우리들 중첩되어 눈앞에 보였다.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출처 지리99 글쓴이 이재구 선생]

 

☞ 권도용(1878-1959)은 근세의 유학자이자 언론인‧독립운동가

 

 

 

어름터 독가

 

 

 

 

무명암자 부도터

 

 

 

 

 

 

 

 

 

 

 

 

 

 

○○암 암자터의 흔적

 

 

 

 

辛酉年(1923년) 正月 初 十日 竪(세움)

 

 

 

 

 

 

 

 

 

 

 

 

 

 

송대에서 장구목으로 내려오는 길

 

 

지산대(芝山䑓) 석각이 두류암을 푸는 열쇠다.

 

 

1611년 4월 3일 오후 유몽인 선생이 저곳에 올라 폭포를 바라보고 '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1580年 邊士貞 :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1611년 유몽인두류암 시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

1611년 유몽인 :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1611년 유몽인 :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1611년 유몽인 두류암 시 : '떨어지는 물은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

 

 

1611년 유몽인두류암 시 : '層壇北斗封 : 층층의 법단은 북두성인듯 우뚝하구나.'

 

 

 

 

 

 

 

 

4. 두류암지(頭流菴) 과연 어디에 있는가?

 

부도가 있는 무명 암자 터를 답사해보니 암자 터라는 것은 확실하나 암자의 남서쪽에 대가 있고, 너럭바위에 올라가도 폭포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천재지변이나 산사태로 계곡의 지형이 다소 변할 수 있으나, 선인들의 문헌에 나오는 두류암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또 한 가지는 두류암을 지나간 어떤 선인들의 유산기에도 부도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함양군지를 확인해 보니 아쉽게도 두류암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594<조경남>선생의 [지리산 난중일기] 1124일에 그래서 피차에 기뻐하고, 그와 같이 동행하여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니, 온 마을이 텅 비어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둘 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頭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무술년 만력 26, 선조 31(1598)사천의 적 5백여 명이 진주를 경유하여 지리산으로 난입하여 두류(頭流)ㆍ금대(金臺)ㆍ안국(安國) 등의 절을 뒤지고 살육과 약탈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에 '氷峙'가 나오는데 두류암에서 어름터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번 산행에서 크게 얻은 것은 없으나, 얻은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유몽인의 두류암 시구에 '폭포수가 차갑게 절구질'하는 야한 현장을 다시 보았으니, 두류암으로 한 발 다가선 느낌이다. 유산기의 답사가 논문을 제출할 일도 아니고, 산은 늘 그 자리에 있고 변하지 않으니, 다음에 한 번 더 갈 이유를 남겨놓는 것도 좋을 듯하다. 변사정이 언급한 자진동(紫眞洞)이 어름터라는 생각을 하였으니, 자진동(紫眞洞)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산대(芝山䑓)라고 한 것은 아닐까? 자진동(紫眞洞)의 紫는 '붉을자'이고 지산대(芝山䑓)의 芝는 지초(芝草)지로 '붉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름터는 자진동(紫眞洞)으로 추정한다. 그럼 두류암(頭流菴) 터는 과연 어디인가?

 

광점동 주차장에 내려와서 박준현군에게 약속한대로 캠프라인 등산화 한 켜레를 전달하고 칠선 휴게소에 내려와 맥주 한 캔씩을 마시고 산행을 마쳤다.  끝. 

 

 

지초(芝草) : 자초(紫草)·자근(紫根)이라고 한다. 학명은 Lithospermum erythrorhizon S. et Z.이다. 크기는 50100이며 전체에 강모(剛毛)가 밀포되어 있다. 뿌리는 인삼 모양으로 갈라져 있다. 비후(肥厚)하며 자색 색소가 외피 주위에 형성되어 자색이 강하다. 따라서, 지치가 자라는 주위의 흙색도 자색이다.

자진동(紫眞洞) : 자진(紫眞)은 선경(仙境), 즉 자진동(紫眞洞)은 신선이 사는 洞天을 뜻한다. 자진(紫眞)이라는 어휘가 唐 崔峒,<送韋八少府判官歸東京詩>의 玄成世業紫眞官/文似相如貌勝潘에서 紫眞官은 선경(仙境)에서 벼슬살이하는 仙官을 뜻함.

☞ 자지(紫芝) : 眞菌類의 하나. 일명 木芝. 영지버섯과 비슷하여 약재로 쓰이는데, 정기를 보강하고 근골을 튼튼하게 하는 데 효험이 있다. 옛부터 상서로운 풀로 여겼고 도가에서는 仙草라고 여겼다.

☞ 자진단(紫眞檀) : 紫檀香. 자단을 잘게 깎아서 만든 향. 불에 피우기도 하고 약으로 쓰임. 약독, 풍독, 곽란, 명치 아래가 아픈 것, 중악, 헛것에 들린 것 등을 낫게 함.

 

 

 

함양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