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장항동에서 상류암을 거쳐 영랑대까지(200110~12)

도솔산인 2020. 1. 13. 02:32


장항동에서 상류암을 거쳐 영랑대까지(200110~12)



▣ 일  시 : 2020년 01월 10일(금)~01월 12일(일)

▣ 코  스 : 새재-상류암지-청이당터-행랑굴-영랑대(원점회귀)

▣ 인  원 : 6명[두발로팀 3명(홍운님, 如鳥님, 마래엔님), 김산님, 도원님]

▣ 날  씨 : 최저 기온(영하 12도)



홍운(弘雲) 송창준(宋昌浚) 선생의 초대를 받아 지리산 600회 기념 산행에 참석하였다. 연초에 一丁 선생이 알려주신 대원사 앞 석각도 확인할 겸, 금요일 출발하여 상류암 지에서 일박(一泊)을 하고, 토요일 아침 일행들과 합류하여 청이당을 거쳐 영랑대에 올라갔다. 600회라는 숫자의 의미는 집념과 열정 그리고 건강과 성실의 상징이기도 하다. 약관의 나이에 공직에 투신하여 진주시청 과장, 동장, 면장을 10년 넘게 두루 역임하시고, 정년 퇴임 이후에는 시인, 수필가로 활동하시면서, 현재는 법무부 법사랑 위원 진주지역연합회 운영실장(창원지방검찰청 진주지청 203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이다. 


영랑대에 오르니 송선생님의 號와 같이 반야봉 위로 홍운(弘雲)의 파노라마가 펼쳐졌고, 600회 기념 산행 축하 이벤트로 홍운(弘雲) 선생 앞에서 如鳥님이 거풍(擧風) 공연(?)을 하였고, 김산님은 웃통을 벗어젖히고 반의지희(斑衣之戱) 대신 알몸 공연을 펼쳤다. 상류암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면서 그동안 무엇을 해왔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였고, 영랑대에서 일몰을 보면서 반야의 붉은 구름처럼 아름답게 정년을 마무리할 것을 다짐하였다. 새벽의 기온은 영하 12도이고 체감 온도는 영하 18도이다. 삭풍(朔風)이 거세게 몰아치는 영랑대는 弘雲 선생께 태양의 붉은빛이 곧추선 일출과 반야의 운해를 선물하였다. 배낭을 패킹하는데 홀연 운무가 영랑대를 감싸고 사위(四圍)를 분간할 수 없었다. 청이당을 지나 두발로팀은 감수재 박여량 투트를 좇아 계곡으로 내려갔고, 우리는 제 길을 따라 키 큰 산죽밭으로 천천히 하산하였다. 덕산에 내려와 주민들이 운영하는 덕산 목욕탕에서 사워를 하고, 산청 덕산의 맛집 '권수경 황칠천국'에서 점심을 먹은 뒤 작별을 하고 각자 출발한 곳으로 돌아갔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 장항동 석각 인물들을 검색하니 대원교 직전 석각 성명 도사(都事) 강재순(姜在淳)은 한말 지방 관료로 1919년 3월 18일 진주 정촌(井村)에서 3.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나오고, 유석근(劉錫謹)은 1921년 남천(南川) 이도묵(李道默 ; 1843~1916)의『南川集』을  간행한 기록이 있고, 대원사 앞 바위 석각의 박응종(朴膺鍾,1893~1919)은 字가 경우(景愚) 號는 이당(易堂), 면우(俛宇) 곽종석과 회봉(晦峰) 하겸진先生의 門人으로,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 논문(*)에 나와 있어, 남사 마을 분으로 판단하고, 이사재 주인 박우근 선생께 연락을 하여, 밀양 박씨 세보에서 동일인임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나머지 네 사람은 아직 밝히지 못했다. 


*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http://cafe.daum.net/jangdalsoo/ZdH1/67



장항령(장항치) 추정지



贈貞夫人 密陽朴氏有功碑丙午四月/都事姜在淳 夫人南平文氏有功碑丙寅三月[위치 : 대원교 직전]


都事 姜在淳 : 진주 정촌 사람. 한말 지방 관료. 1919년 3월 18일의 진주군 정촌면(晋州郡 井村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추정.[丙午:1906년.丙寅:1926년]



우로부터 유석근(劉錫謹), 유석정(劉錫鼎), 박규삼(朴奎參)[위치 : 대원교 직전]


유석근(劉錫謹) : 남사마을의 남천(南川) 이도묵(李道默 ; 1843~1916)의 제자로 추정. 1921년 유석근(劉錫謹)이남천집』을  간행함, 유석정(劉錫鼎), 박규삼(朴奎參[미상]



우로부터 권달용(權鐽容), 박응종(朴膺鍾), 양화용(梁華容) [위치: 대원사 앞 계곡 바위]

 

☞ 박응종(朴膺鍾) : 字 경우(景愚) 號는 이당(易堂), 곽면우(郭俛宇, 곽종석)와 하회봉(河晦峰, 하겸진) 先生의 門生으로 한말 유학자. 파리장서운동의 숨은 협력자 논문에 나옴.

* [密陽朴氏世譜] 字景愚號易堂。一八九三癸巳生。郭俛宇河晦峰先生門生。文學夙就。不幸短命。世皆惜之。有文集二卷行干世。河晦峰先生序。一九一九年己未四月三日卒。享年二十七。○墓望椒亭後谷巳坐。有石物。碣濟南河經洛撰。行狀滄溪金銖撰。墓碣銘重齋金榥撰。<자료제공 : 남사마을 이사재 박우근님> 



김병석(金炳錫) [위치 : 대원사 앞 石杠(석강 : 돌다리) 직전 도로변]


☞ 고종 15년 무인(1878)125(을해) 서원을 복구해 설립하라는 명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경상도 유생 유학 박주종(朴周鍾, 1813년∼1887) 등의 상소에 이름이 보이나 동일인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장항동을 유람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상우도 사림 유생들로 동일인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건물 석축


맷돌


촉스톤(chock stone)


상류암 샘터


천례탕


청이당 터


청이당 석축


점필재가 쉬어간 청이당 앞 溪石
























점필재 계석(송필재 송창준 선생)




장항령에 멈추어 다시 한번 옛길의 흔적을 확인하고 대원교와 대원사 주차장 앞 석각을 살펴보았다. 대원교 앞 석각 도사(都事, 종 5품 관찰사 보좌관) 강재순(姜在淳) 진주 정촌(井村) 사람으로 한말 관료이다. 1919년 3월 18일의 진주군 정촌면(晋州郡 井村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추정되고 석각의 시기는 1926년이다. 그 옆에 세 명의 성명 석각이 있는데,  유석근(劉錫謹)1921년 남천(南川) 이도묵(李道默, 1843~1916)의『남천집』을 간행한 인물로 남천(南川)의 제자로 보이며, 유석정(劉錫鼎)은 유석근의 형제로 추정, 박규삼(朴奎參)은 미확인, 남천 이도묵은 자는 경유(致維), 호는 남천(南川)이며 성산인(星山人)으로 한말 남사 마을에 살았던 유학자이다. 1877년 남천은 효효재 문진영, 후산 허유, 물천 김진호, 면우 곽종석, 월연 이도추, 약헌 하용제 등과 대원암을 경유하여 천왕봉을 유람하였다.


대원사 앞 바위에 있는 석각 박응종(朴膺鍾,1893~1919) 號는 이당(易堂), 곽종석과 하겸진의 제자이다. 한말 유학자로 '파리장서운동의 숨은 협력자' 논문에 그이름이 보이며, 이분은 남사 마을 밀양 박씨이다. 석각 김병석(金炳錫)고종 15년 무인(1878)125(을해) 서원을 복구해 설립하라는 명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경상도 유생 유학 박주종(朴周鍾, 1813∼1887, 예천 용문 출신)의 상소에 이름이 보인다. 아무튼 성명 석각은 대부분 남명 선생의 발자취를 좇아 장항동을 유람한 사람들은 졍상우도 사림 유생들이다. 남사마을 이사재(尼泗齋)를 관리하시는 박우근 선생께 전화를 하여 박응종 선생의 생몰 연대를 묻고, 석각의 존재를 알고 있는가를 확인하니 모르고 계셨다. 이당(易堂) 박응종(朴膺鍾)선생은 밀양박씨 세보에 '문학(文學)을 일찍 성취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단명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文學夙就。不幸短命。世皆惜之).'라고 한다. 향년 27세로 단명하여 사후에 양자를 들였고 이사재 박선생님의 당숙이다.


* 1893년 : 대원사에서 남명집 교정,

* 1904년 6월 ~ 1905년 9월 : 대원사 남천 이도묵 주자어류 重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