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대(隱井臺)를 찾아서(191123~24)

도솔산인 2019. 11. 25. 08:50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의 은정대(隱井臺)를 찾아서(191123~24)

 

 

▣ 일  시 : 2019년 11월 23일(토)~11월 24일(일)

▣ 코  스 : 대성교-능인사터-대성주막-수곡골-수곡폭포-마을터-은정대(원점회귀)

▣ 인  원 : 4명(一丁 선생님, 송연목님, 완폭대 조박사님), 다음날 鄭주무관

▣ 날  씨 : 밤에 비, 최저온도 4도

 

 

지난 11월 8일 경 완폭대 조박사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화개(花開)에 언제 내려올 수 있습니까?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를 메일로 보내주세요. 불일암 부분 발췌된 것은 있는데 은정대(隱井臺) 부분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나는 오두인의 두류산기 국역본을 메일로 보냈다. 그리고 두 주일 후인 11월 17일(일) 조박사로부터 석각 사진이 한 장 카톡으로 날아왔고, 11월 23일(토)~24일(일) 양일간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 합동조사를 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또다시 11월 20일(水) 사전 기초조사를 하면서 탁본한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고, 나는 그 사진을 토대로 오두인 두류산기 답사를 위한 기초자료를 만들었다. 나는 박여량 두류산일록의 상류암을 찾고 확인하는데만 꼬박 4년이 걸렸는데, 완폭대 석각을 발견한 조박사는 이번에도 단 번에 은정대(隱井臺)를 찾았다. 은정대(隱井臺)에 처음 왔을 때에 전생에 이곳을 다녀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니 선인들의 유람길과 인연이 깊은 듯하다.

 

11월 23일(토) 오전 10시에 출발 쌍계사에 도착하니 12시 30분, 쌍계사에서 내원골 자봉스님을 만나 김장 김치를 드리고, 지리산 국립공원 하동분소에서 一丁 閔선생님과 조박사를 만나 점심을 먹은 후에, 대성교에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1651년 11월 4일 오두인은 기담(妓潭)에서  휴식을 취한 후 이 길로 능인사(能仁寺)를 향했을 것이다. 이 길은 가파르지만 여느 옛길처럼 S코스로 이루어져 있어 그래도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솔 갈비를 밟으며 큰 숨을 토해낸 뒤에야 의신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합류가 된다. 능인사(能仁寺) 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암자터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암자터에 대한 식견이 없으니 아무런 감응이 없다. 다만 작은 암자터는 아니라는 것과 오두인 일행이 368년 전인 1651년 11월 4일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였다는 것, 그리고 장군샘과 대나무 숲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대성골 민박집을 지나 계곡을 건너 수곡골로 접어들었다. 계곡을 두 번 건너고 너덜지대를 지나 왼쪽 마을터로 접어드니 군데군데 거대한 암괴가 버티어 서있고 전답의 축대가 이어진다. 조박사의 전언에 의하면 이곳은 마을터로 화전민들이 콩 농사를 지어 두부를 만들어 쌍계사 앞까지 내려가 팔았다고 한다. 전답 흔적이 끝나고 공지선이 나타날 즈음 거대한 암괴(가로 10m×높이 15m) 앞에 넓은(25m×15m) 암자터가 나타난다. 오두인의 두류산기 내용 그대로 『암자 뒤쪽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아래에 샘이 솟았다. 이른바 은정(隱)이라는 것이 바로 이 샘터이다.이 샘물은 허리를 굽히지 않는 자는 마실 수 없다.

 

다음날 아침 암자터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위 능선에는 헬기장이 있으며 암자터 왼쪽으로 조금 위에 석축이 있는 터가 있고,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가면 通政大夫 慶州鄭氏基朝之墓가 있다. 그리고 무덤 앞은 수직 절벽 낭떠러지로 은정대보다 시야가 트이고 조망이 넓게 보인다. 은정(隱井) 앞에 있는 바위에 오르니 황장산과 왕시루봉이 조망된다. 은정(隱井)에 쌓여있는 토사를 긁어내고 보수 작업을 한 후에야 늦은 아침을 먹었다. 탁본을 하고 시간을 보니 점심때가 넘었다. 은정대(隱井臺)에서 내려오는데 어제는 자세하게 보지 못했던 커다란 바위들이 따라 움직이며 진법을 펼치고 있는 듯하다.  잠시 계곡에서 걸음을 멈추고 쉬는데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두 분의 모습이 보인다. 순천에서 같은 집에 사시는 두 분이 이 늦은 시간에 이곳에 어찌 나타나셨는지요. 지도장을 발부받았지만 그래도 아무튼 반갑습니다.^^ 수곡 폭포로 내려가는데 낙엽이 미끄러워 뒤로 넘어져 스틱을 깔고 앉아 그만 부러져 버렸다. 주인을 잘못 만난 불다 스틱은 제 수명도 다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가 그만 가버렸다.

 

내려오는 길에 조박사 曰 '석각 발견의 환희 뒤에는 커다란 공허함이 밀려온다.'라며 '오두인의 두류산기를 읽고 은정대가 항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나 또한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은 1648(인조 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649년 오두인은 별시문과에서 장원 급제한 후, 1650년 사헌부 지평으로 있으면서, 1651년 경상도 지방의 재상(災傷)을 살피러 내려왔다가 경상우도 수령들과 선고(先考)와 계부(季父 : 막내 숙부)가 선답한 길을 좇아 지리산을 유람하고 두류산기를 남겼다. 두류산기의 특징은 구간별 거리를 상세히 기록했다는 것과 쌍계사를 출발하여 홍류교(삼신동 각자) 신흥사 터, 능파각, 세이대, 사자곡, 기담 등의 지명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신흥사와 의신사는 이미 폐사되어 오두인 일행은 대성교에서 능인사로 올라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은 계곡에 축대를 쌓고 다리를 놓아 옛 모습이 아니지만, 당시 기담(妓潭)의 위치는 단천골 입구 정류석으로 추정한다. 답사를 마칠 즈음 최석기 교수님, 이호신 화백님, 기근도 교수님 등을 모시고 최종 답사를 하기로 의견이 모아졌고,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 정혜종 주무관이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기로 하였다. 참고로 1651년 유람할 당시 오두인의 나이는 스물여덟이다. 끝.

 

 

 

오두인 길

 

 

능인사 터

 

 

 

 

 

 

 

 

 

 

 

 

은정대<사진 순천 이선생님>

 

 

 

 

隱井(은정)

 

 

은정대 석각 右로부터 '金釘 李尙逸 李震馝 吳斗寅 金緝 辛卯 仲冬'

 

 

 

 

 

 

 

 

 

 

 

 

 

 

 

 

은정(隱井)

 

 

 

 

 

 

돌개 구멍인지 아니면 다리 교각 흔적(?)

 

 

 

 

 

 

 

 

* 오두인의 두류산기(능인사에서 은정대까지 발췌)

 

○ 1651년 11월 4일(양력 12월 16일) <중략> (능인사에서) 저녁 무렵에 작별하고 다시 10리를 가서 작은 암자에 이르렀는데 은정대(隱井臺)라고 하였다. 이 암자는 산 정상에 있어 속세와 일찌감치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학승(學僧) 담희(淡熙)가 그곳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그를 따라 공부하는 자가 10여 명이라고 하였다. 암자 뒤쪽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아래에 샘이 솟았다. 이른바 은정(隱)이라는 것이 바로 이 샘터이다. 마침내 그 바위에 함께 유람 온 이들의 성명을 김정(金釘), 이상일(李尙逸), 이진필(李震馝), 오두인(吳斗寅), 김집(金緝)의 순으로 적었다. 첫 번째가 찰방 김정(金釘), 그다음이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그다음이 하동 태수 이진필(李震馝) , 내가 네 번째였는데 나이순으로 정한 것이다. 그대로 바위에 새기게 하여 훗날의 표지로 삼았다. 이날은 은정대(隱井臺)에서 묵었다.

 

臨夕而別。又行十里。至一小菴。名曰井臺也。菴在絶頂。去塵宸最遠。經僧淡熙居焉。從而遊者。十餘人云。菴後有巖。巖下出泉。所謂。必此也。遂題同遊姓名於其巖曰。 金釘 李尙逸 李震馝 吳斗寅 金緝。其一督郵。其次晉牧。其次河東。余居第四。序以齒也。仍命刻之。以爲他日識焉。是日。仍宿于此寺。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최석기외) 2권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p145~p146

 

 

 

* 오두인(吳斗寅, 1624~1689)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사겸(吳士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오상(吳翔)이다.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이효길(李孝吉)의 딸이다. 숙부 오숙(吳䎘)에게 입양되었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0년(효종 1) 지평(持平)을 거쳐 1656년 장령(掌令), 1661년(현종 2) 헌납(獻納)·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副校理)·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에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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