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兩流菴(180623~24)

도솔산인 2019. 10. 22. 22:45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상류암과 두류암(180623~24)



▣ 일 시 : 2018년 06월 23일 ~ 23일

▣ 코 스 : 새재-상류암터-독바위-석문-부도터-어름터-두류암터-광점동

▣ 인 원 : 출발 4명(一丁님, 솔박사님, 송연목님), 옹암(미산님, 조박사님), 무명암자터(조봉근님), 어름터(조중제님)

▣ 날 씨 : 한여름 날씨



1. 상류암에 대한 나의 생각


상류암은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과 1632년 성여신 등이 편찬한 진양지, 그리고 산청군지에 잠시 나올 뿐, 다른 문헌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박여량의 두류산일록과 진양지를 근거하여, 상류암이 독바위 능선에 있다고 생각하고 상류암에 접근하였다. 영랑대를 지척에 두고 진주독바위와 새봉에 머물길 여러 번, 2017년 9월 23일[지리산행기 5396(2017.09.26)] 故 마등자님이 조개골 능선에서 바라본 독바위 사진을 보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급기야 2017년 10월 5일 독바위에서 능선을 치고 내려왔으나, 지능선으로 빠져 결국 암자터를 발견하지 못하고 해를 넘기고야 말았다. 2018년 4월 14일~15일 치밭목 一丁 민병태 선생과 함께 진주독바위(옹암)에서 노숙(露宿)을 하고 독바위골로 내려오다가 마침내 상류암터를 찾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한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가.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상류암지에 대하여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97

나. 1610년 박여량 [두류산일록]의 上流庵址를 찾아서I(180413~15) : http://blog.daum.net/lyg4533/16487928

2. 불일암 지붕에 대한 기록


암자터를 찾는데 반드시 와편이 나와야 폐사지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儒者(유자)들의 유람기에 등장하는 깊은 산속에 있는 암자의 지붕이 기와라는 기록은 영신암 하나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儒者(유자)들이 찾았던 불일암만 보더라고 암자를 卍茅(만모)로 표현하였고, 산신각조차도 판자 또는 너와집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卍은 梵語(산스크리스트의 문양)로 절이라는 뜻인데, 한자로 음차 하면서 万茅(만모) 또는 萬茅(만모)로 기록하였으며, 산죽이나 갈대로 지붕을 덮은 암자를 뜻한다. ☞ 茅 : 띠모(갈대나 억새)


가. 1743년, 정식 [청학동록(靑鶴洞錄)]

“청학동의 만모(万茅)(卍은 부처님 가슴에 새겨져 있는 문양으로 암자를 뜻함. 卍은 범어로 萬으로 음역함)는 하나의 산수굴(山水窟)인데....

나 1883년 <전기주>의 [유쌍계칠불암기]

이것이 바로 불일암(佛日菴)이었다. 그 뒤로는 산신각(山神閣)이 있었는데, 완전히 박달나무 껍질로 기와를 대신했다.

다. 1899년 <하겸진>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암자(불일암)는 폐허가 되어 무성한 잡초만 가득하고 단지 도토리 껍질로 뒤덮인 산제각(山祭閣)만 있었다.

라. 1926년 이현욱의 [지리산 유람기록]

국사암에서 5里를 오르면 환학대가 있으며 다시 5里를 가면 띠 풀로 지붕을 덮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불일암이라고 하였다.[菴之上五里. 有喚鶴臺. 又五里有覆茅一庵. 卽佛日也.]

마. 1928년 오정표의 [유불일폭기]

홀연히 절 하나가 정상에 있는데 꽃과 나무로 둘리어져 있고 흰 띠로 지붕이 덮여있는데, 이름이 불일암(佛日菴)이었다.[忽見有一刹. 出頂上. 環以花木白茅覆之. 是名佛日菴.]


따라서 지리99가 이야기하는 지리산의 첩첩산중에 있는 암자의 지붕이 모두 기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만약 지붕이 기와라면 산신각 정도이고, 산신각도 너와집이나 띠(茅 : 억새), 산죽으로 지붕을 덮은 형태였다. 卍茅(만모)가 암자 지붕의 대체적인 형태라고 보아야 한다. 청파(靑坡) 이륙(李陸)의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에 당시 영신사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절은 모두 목판(木板)으로 지붕을 덮었는데, 살고 있는 중이 없었다. 오직 영신사만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 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반드시 瓦片(와편)이 있어야 암자터라는 전제는 커다란 곡해이다. 영신사처럼 기와로 덮은 암자도 있겠으나 불일암처럼 목판이나 굴피, 갈대나 띠 등으로 덮은 암자도 있었다고 본다.



상류암터


상류암 터 전망대


암괴


박여량 일행이 잠을 잔 암자터(석축 길이가 26m~30m×14m)


암자터 석축2(외부)


석축2(내부)


탑 부재(?)와 맷돌


산청독바위(×) 진주독바위(옹암)



3. 두류암에 대한 나의 생각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읽고 첫 답사를 한 것이 '지리 동북부 함양독바위 산행(080926~27)'을 한 후, 이어서 2주 뒤에 2박 3일간 '점필재의 500년 전 옛길을 가다(081010~12)' 산행을 하였으니, 선인들의 유람록 답사 산행이 어느덧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나는 늘 선답한 분들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 온라인 카페의 생리를 잘 모르고 내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한 것이 커다란 실수였던 것 같다. 영신대와 청학연못, 영랑재, 소년대, 마암과 행랑굴 그리고 청이당터, 지장암지와 두류암지, 향로봉과 미타봉, 최근 상류암과 초령, 불일평전의 고령대와 고령암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것은 곧바로 답사 산행으로 이어졌다.


아직도 2% 미완이지만 지난해 두 번의 점필재길 전 구간을 답사한 후에, 10월에는 감수재 길을 답사하고 상류암을 풀지 못하는 와중에도, 작년 여름부터 유몽인이 하룻밤 쉬어간 두류암지에 대한 문헌의 기록을 찾다가 유몽인의 두류암 시를 읽게 되었고, 부도가 있는 무명 암자터가 두류암터가 아닐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부도가 있는 곳이 두류암 터라면, 두류암을 다녀간 선인들의 유산기에 부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 터, 그러나 어떤 유산기와 사적기에도 부도에 관한 기록이 없고, 두류암을 다녀간 선인들의 유람록과 기행시는 물론, 1656년(효종 7) 정수민(鄭秀民)이 편찬한 천령지(天嶺誌)의 기록과도 완전히 어긋난다.


이번 산행에서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두류암 터 북쪽의 높은 대에 직접 올라가 옥구슬을 꿴듯한 臥폭포를 다시 확인하였고, 直폭포 아래로 내려가서 한 시간 넘게 용두질 하는 폭포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나는 내 생각이 오류일 수 있고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산을 알고 글을 아는 후답자가 문헌을 읽고 답사를 한 후에 판단할 일이지, 수많은 오류를 대량 생산한 선답자가 시시비비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산기를 잘못 해석하고 잘못 판단하고 잘못 발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오류가 확인되면 바로 수긍하고 수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영신사지만 보더라도 아직도 세인들이 세석산장 앞 습지를 영신사지라고 하고, 심지어 한국연구재단(KCI)에 등재한 연구논문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록(遊覽錄)에 나타난 경관자원 연구[ARTICLES : A Study on Scenic Resources in Mt. Jiri Documented in the Joseon Era Travelling Records]이창훈 ( Lee Chang Hun ) , 이재근 ( Lee Jae Keun )』 에도 지리99가 오발한 영신사지의 좌고대와 석가섭이 그대로 실려있다.


가.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암에서 옹암 가는 길(171202~03) http://blog.daum.net/lyg4533/16487891

나. 1611년 유몽인 선생 용유담에서 두류암 가는 길(180526~27) http://blog.daum.net/lyg4533/16487975


다. 천령지의 두류암에 대한 기록

鄭秀民(정수민, 1577∼1658)이 편찬한 천령지(天嶺誌)에 '두류암은 군자사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동쪽에 송대가 있는데, 운치가 그윽하고 한적하다. 지금은 없다.[頭流庵在君子寺東三十里 東有松臺 韻致 幽閑(今無)]'라는 문구가 있다. 정수민(鄭秀民)의 천령지(天嶺誌)에 '두류암 동쪽에 송대마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부도터에서 송대 마을이 동쪽에 있는지?' '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 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는지', 현장을 답사하고 지리산길 지도를 보면 확인이 된다. 부도터에서 송대 마을은 서북쪽 [巽方(손방)]에 위치해 있고, 지산대 아래 범종이 있는 곳에서 동북방[곤방(坤方)]에 송대 마을이 있으니, 천령지의 기록과 일치하여 범종이 있는 정자 부근을 두류암 터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의 유두류산록과 1656년 정수민(鄭秀民)이 편찬한 천령지(天嶺誌)의 기록을 또다시 오류라고 억지 논리를 펼 것인지... 감수재 박여량 선생의 말씀대로  '전하는 대로 보는 것이 옳지 또한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는가?'


☞ 천령지(天嶺誌) : 1656년(효종 7) 정수민(鄭秀民)이 편찬하고 1888년(고종 25)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함.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리99 주장 두류암터 부도


농가터 절구


문확석(?)


의병장 석상용 장군 묘(추성리 산 100번지)


조쉐프 솜씨


1922년 권도용 방장산부(方丈山賦)에 보이는 氷峙(빙치)


지산대


지산대 탁본


유몽인이 올라간 북쪽 臺


유몽인이 두류산록에 '옥구슬로 꿴 발'로 기술한 와폭


유몽인이 폭포를 바라보았던 북쪽 臺


유몽인이 대 위에서 내려다 본 와폭


절구질하는 직폭(유몽인의 시)



4. 贅言(군말)


아무튼 400여년 전의 상류암 존재를 창원에 사는 崔生員 일행이 60여년 전 지리산 골짜기에서 태어난 6학년 8반 노인에게 물어보고 확답을 얻었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선인들의 유산기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선인들의 기록을 오류라고 단정하고 口傳을 앞세우니 소설이 되고 창지개명을 하는 것이다. 선답자가 완폭대 석각을 찾지 못한 것 역시 선인들의 유람록을 제대로 읽지 않고 주관적인 추정에 너무 치우쳤기 때문이다. 선답자가 99개의 암자터를 찾았다고는 하나, 내가 확인한 것 중 맞는 것은 三涅庵(삼열암) 뿐이다.


墨子(묵자)에 '天下無人'이라는 말이 있다. '천하에는 남이 없다.'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불가(佛家)에 '自他不二'라는 말도 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이것을 '大同'라고 한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 길에 대하여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지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 특히 지리 99 운영자의 지리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지리 99가 모아 놓은 수많은 자료 덕분에 유람록의 복원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더라. 끝.



* 함께 답사한 솔레이 이용훈 박사의 견해

[지리산 지명 바로잡기]<3> 변사정, 유몽인, 김영조, 배찬이 쉬어간 두류암은 과연 어디인가? https://blog.naver.com/ylee6517/221294531005

[지리산 지명 바로잡기]<4> 감수재 박여량이 다녀간 상류암은 어디인가? : https://blog.naver.com/ylee6517/221308388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