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 감수재 박여량 선생의 두류산일록을 좇아서(191003~06)
▣ 일 시 : 2019년 10월 03(목)~06(일)
▣ 코 스
- 0일차 : 오봉리(차량)-산내 某処
- 1일차 : 백모당-우리동-옛제석당터-제석당-서천대-통천문-천왕봉-증봉-마암(중봉샘)-중봉
- 2일차 : 중봉-선암-소년대(하봉)-영랑대-행랑굴-청이당(두류암갈림길)-독바위골 초입-상류암
- 3일차 : 상류암-진주독바위(옹암)-새봉&독바위 안부-초령(새봉)-사립재-방곡상류(오봉리)
▣ 인 원 : 4명(일정 민선생님, 미산 선생님, 소혼)
▣ 날 씨 : 맑음, 구름, 안개비
2015년 9월 19일 조개골 상류에서 우연히 만난 지산 슬기난 님에게 행랑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고전번역원에서 원문을 다운로드한 후 틈틈이 감수재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을 읽기 시작했다. 두류산일록 국역본에는 일부 누락된 부분이 있었고, 날짜와 간지가 하루씩 어긋나 있었으며, 당시 초령 부분에서 '田分' 의 어휘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의문을 가졌던 부분이 마암과 행랑굴이었는데, 마암은 동명 이소라는 것과 2017년 7월 13일 현 마암 각자가 있는 곳이 박여량의 행랑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8년 4월 13일에는 두류산일록에 등장하는 상류암 터를 찾게 되었는데, 상류암 터에 대한 추정지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로 인해 논란만 야기시킨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감수재의 두류산일록에서 숙제처럼 남은 상류암 터와 초령에 대한 의문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이번 추석 연휴에 3박 4일 지리동부에 들어 산행을 하고 돌아와 산행기를 쓰다가 9월 20일 안동의 同學 김동현 선생에게 카톡으로 '踰草嶺. 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田分也.'를 보내고 '田分'의 어휘를 물어보았다. 김 선생께서 곧바로 두류산일록 초령 부분의 영인본 사진을 보내왔는데, '踰草嶺. 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由分也.'로 초령에 대한 의문이 한꺼번에 저절로 풀렸다
두류산일록에는 옹암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독바위를 우회했으리라 추정하고 루트를 살펴보다가, 이전에 산행할 때 상류암에서 좌측으로 독바위 능선을 우회하던 완만한 옛길이 떠올랐다. 지도를 펼쳐놓고 독바위양지 상류 석축이 있는 곳으로 연결하니 미답 구간은 불과 100여 m 내외밖에 되지 않았다. 드디어 2019년 9월 28일 영랑대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독바위와 새봉 사이 안부에서 독바위양지로 이어지는 옛길을 확인하니, 박여량 길에 대한 모든 의문이 일순간에 풀렸다. 지나온 시간들을 정리해보니 만 4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여러 번 답사를 했지만, 사립재를 초령으로 예단한 것이 나의 오류였다. 초령 부분을 다시 보면 '초령(草嶺)을 넘었다(踰). 이곳이(此) 바로(乃) 함양(咸陽)과 산음(山陰) 두길(兩路)의 분기점(分)이 시작되는(由) 곳(所)이다. (여기에서 '由'의 의미는 말미암다, 시작하다, 처음, 시초 등의 의미이다.)
2019년 10월 3일, 산행에 앞서 두류산일록을 다시 일독하고 그동안의 자료들을 촘촘히 점검하였다. 태풍 미탁(MITAG)의 영향으로 산행 출발은 하루 연기하기로 하고, 오후에 유림면에서 미산 선생님을 만나 차 한 대는 오봉리에 갖다 놓고 산내 모처에서 미산팀 Big3(미산, 소혼, 도솔)가 모여 산행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1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일단은 백무동 백모당에서 출발하여 방곡의 상류(오봉리)까지 박여량 선생의 유람길을 작정하고 직접 걸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미 여러 번 부분 답사를 하였지만, 두류암 갈림길에서 상류암까지, 상류암에서 초령을 잇고자 하는 것이 실제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백모당의 성모상
우리동(于里洞) 계곡 초입
우리동(于里洞)
옛 제석당터
다음날 아침 8시에 성모상이 있는 백무동을 출발하였다. 하동바위가 우리동 중간쯤에 있다고 하였으니 하동바위와 참샘 일원은 물론 계곡의 발원지부터 백무동 탐방안내소까지를 우리동(于里洞)으로 보면 된다. 참샘 주변에는 화전민의 집터와 경작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참샘부터는 된비알이 시작되고 차츰 고도를 높이게 된다. 참샘에서 진주 산객 덕불고님과 필유린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는데, 몇 년 전 롯지에서 보령의 임대장님 화갑(華甲)에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앞 서거니 뒤 서거니 하면서 옛 제석당터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다렸으나,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 없어 먼저 출발하여 제석당을 향했다.
제석당에 도착하여 샘(감로천)을 청소하고 나니 一丁 선생님이 오시고 함께 석각을 확인하였다. 일부 사람들이 제석당 샘을 제석천이라고 하는데, 샘 좌측 하단에 있는 감로천(甘露泉) 석각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제석당 좌측 석면에 손바닥만 한 글씨의 제석암이 석각 되어 있고, 제석암 각자 좌측 상단에 "帝釋堂朴魯翊建屋壬戌七月○日"이라는 석각이 있는데, 1923년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04.01) 에 함양 군수 민인호(閔麟鎬)가 지리산(智異山) 보승회(保勝會)를 조직하여 군내 유지들에게 돈을 갹출하여 제석봉에 제석당, 중봉에 마암당, 천왕봉에 망해정을 건옥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곳 석각은 '제석당은 박노익이 건옥하였으니 임술년 7월 某일'이다. (임술년은 1922년을 가리킨다. 아래 제석암 또한 이때 함께 새긴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제석당
감로천(甘露泉)
제석암(帝釋巖)
두류산일록 9월 5일 기록에 따르면, 제석당에서 1박을 한 박여량은 전에 서천당과 향적사를 다녀왔기 때문에 나머지 일행들을 보내고, 자신과 정경운은 제석당에서 제석봉(중봉)을 향한다고 적혀있다. 이 구간의 박여량 길은 현재의 등산로가 아니며 지금의 등산로가 나기 이전 70년대 중반까지는 그 길을 이용하였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박여량 선생은 지금의 제석봉을 지나며 중봉이라고 언급한 것은 아마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따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터목대피소에 배낭을 둔 채 여러 번 다녀온 향적사는 생략하고 서천당 터로 바로 향했다. 산희샘 위를 지나 약 60m를 가면 서천당터가 있다. 좌표 N35.3325, E127.71752, 고도1663, 당터 5m×10m, 축대 중단 22m, 하단 26m로 향적사와 길은 연결되어 있다. 서천당터를 둘러보고 장터목 산장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고 통천문, 천왕봉을 지나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중봉으로 가던 길에 중봉샘에 취수를 하러 내려갔다가 어둠 속에서 백현님을 만났다. 백현님은 마암(중봉샘)에서 유하고, 우리 일행은 시간이 지체되어 중봉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박여량 선생은 천왕봉과 중봉 사이에 있는 작은 봉을 증봉이라고 하였는데 그 연유는 모르겠고 우리말로 풀면 시루봉이다. 그리고 지금의 중봉샘을 마암이라고 언급하는데 이 또한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따른 듯하다. 마암으로 인해 온라인 상에서 논쟁이 있었는데 마암에 대한 자료는 행랑굴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아무튼 중봉샘 이름은 김경렬 선생이 80년대 초에 처음 붙인 이름이다.
서천당 터의 위치(자료제공 : 태산님)
서천당 터
서천당 석축
중봉에서 내려와 선암에서 쉬는데 해유령(하봉 헬기장)에 은박지를 덮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어깨에 태극기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새벽에 중봉을 지나간 태극종주하는 사람들의 낙오자인 듯하다. 백두대간 3회 종주를 하였다고 하는데 심하게 구토를 했다고 한다. 행동식을 주려고 했으나 그분이 배낭에 있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그분이 하봉 헬기장을 떠나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도 이동하였다. 하봉(소년대)에 오르니 영랑대 위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아침에 중봉을 지나간 사람들 같았다. 영랑대에 오르니 안면이 있는 분이었다. 한 분은 2년 전 5월 새봉에서 만났고 그해 10월 송대 마을에서 게 2마리가 따라와 독바위에서 함께 박을 한 개의 주인이었다. 내가 일부러 댁의 개를 산행기에서 지리 구구(狗狗)라고 했다고 농(弄)을 건네니, 노란 자켓을 입은 여자 분이 내 닉을 물어오더니 머쓱한 표정이 역력하였다. 남의 말을 그대로 믿고 내용도 모르고 왈가왈부(曰可曰否)하였으니 난감했을 것이다.
船巖(선암)
영랑대
박여량 선생은 소년대만 언급하고 영랑대를 우회하여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행랑굴에 이르러 一丁 선생에게 12년 전 사고 수습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었다. 아직도 그분들이 화목으로 잘라놓은 참나무와 바위에는 아직도 검은 그을음이 그대로 남아있다. 천왕봉 성모사에서 무녀의 몽니로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다시 받아 밥을 지어먹고 늦게 출발한 박여량 일행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천왕봉에서 '바람난 마소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쉬지 않고 빠르게 멀리 이동하였다.'고 한다. 행랑굴과 마암 관련 자료는 링크하는 것으로 정리한다.
행랑굴(1536m)
청이당 터에 내려와 점필재가 쉬어간 계석에 배낭을 내려놓고 석축과 당 터의 크기를 계측하였다. 박여량 선생은 이곳에서 70m 정도 아래를 두류암 갈림길로 기록하고 있다. 당터의 규모로 보아 예사 당집이 아닌듯하다. 앞에 석축의 길이는 대략 26m이고 현재는 높이 1.2m, 길이 6m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위쪽으로 점필재가 쉬어간 계석 앞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면 된다. 청이당터에서 약 20m 아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에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 하늘에 제사 지내는 돌)이었다. [출처 지리99, 국역 이재구 선생]』라는 기록이 보이고 천례탕 앞에도 석축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지리99에서 말하는 청이당 터 위치 역시 엄밀하게 말하면 오류이다.
1472년 8월 14일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쉬어간 청이당터 앞 溪石
청이당 석축
천례탕(天禮碭)
두류암 갈림길
청이당에서 내려오면서 쑥밭재(艾峴) 아래 상류·두류 양암(兩菴) 갈림길에서 잠시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이곳부터 상류암까지의 여정을 박여량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계곡을 타고 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내가 처음은 2008년 겨울(12월) 길을 몰라서 내려갔고, 두 번째는 2015년 12월 폭설에 길을 놓쳐 계곡으로 내려갔으며, 세 번째는 2017년 6월 일부러 계곡으로 내려간 일이 있다. 선답자의 주장대로 만약 박여량 선생이 조개골을 따라 장항동(지리99 주장 상류암)까지 내려갔다면 조개골 게곡의 풍광에 대한 기술이 왜 전혀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어쨌든 물길 따라 산길 따라 독바위골로 접어들었다. 독바위골 입구에서 지리99에서 말하는 숯가마터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산죽과 너덜 경계를 이어가면 작은 물길이 있고, 물길을 따르면 샘터가 나타난다. 일몰 시간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지만 상류암터에서 하루 머물기로 하고 막영지를 구축하였다. 초저녁에는 달이 보이더니 새벽 2시경 나무에 맺힌 이슬이 젤트의 타프 위로 떨어져 타프를 쳤다.
상류암 요사체 자리로 추정
상류암 터 석축
상류암 터 맷돌(95cm×80cm)
다음날 미산 선생님께서 아침에 '발기가 되고 몸이 개운하다. 그런데 독거노인이라 써먹을 곳이 없다.'라고 하시어 우리는 弄으로 터의 이름을 '鄭先生發起之所'라고 지었다. 오늘의 여정은 독바위 능선을 올라가다가 독바위 양지로 넘어가 새봉과 독바위 안부에 닿고, 초령을 넘어 사립재로 방곡 상류로 내려가면 되기 때문에 12시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다고 생각을 하였다. 상류암터에서 왼쪽으로 독바위 방향으로 나아가면 옛길 흔적이 뚜렷하다. 짙은 안갯속에서 얼마간 진행하니 길이 끊기고 너덜지대가 나타났다. 더널지대를 벗어나려고 계속 진행한 것이 실수였다. 너덜을 따라 직등하여 물길을 올라가면 독바위 뒤에서 직접 내려오는 길인데, 독바위 아래를 횡단하여 서남쪽 능선에 붙어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고 말았다. 올라갈수록 암릉과 끝없는 산죽 밭을 헤치고 능선에 올라서니 독바위 앞 능선에서 어름터로 내려가는 삼거리 부근이다. 무려 1km의 거리를 4시간이나 걸렸으니 사투를 벌이다시피 한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독바위를 우회한 지점으로 추정
초령(새봉)
독바위에서 잠시 쉬고 독바위 양지로 내려가는 안부를 지나 새봉을 향했다, 드디어 초령을 넘었다. 여기가 바로 함양과 산음 두 길의 갈림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踰草嶺. 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由分也.) 새봉에 앉아 지난 시간을 헤아려보니 감회가 새롭다. 새봉을 새의 머리 모양으로 생각한 고정 관념의 한계였다. 이참에 새봉에서 한참을 쉬어 간다. 사립재를 지나 방곡의 상류로 내려가는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죽길로 지루하게 이어진다. 임도가 끝나고 계곡을 건너 독가 조양래 씨 움막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계곡에 내려가 세족을 한 후, 염치없이 커피와 포도 대접을 받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산행을 마치고 산내로 이동하여 오리 고기와 살래 국수를 먹고 각자 출발한 곳으로 돌아갔다.
방곡의 상류
1610년 감수재 박여량 선생길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유람록을 읽고 현장을 찾아 답사해 오는 과정에서 마암과 행랑굴, 상류암 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 화기가 완전히 사그라든 후에 다시 시작하니 새롭게 정돈되는 바가 있어 지나간 그 시간들도 도움이 된 것 같다. 육도삼략에 이르기를 '논두렁에 박힌 말뚝도 적의 정예 기마병을 제압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리석은 자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일지라도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지리 99 꼭대님의 욕설과 비난과 조롱이 내 가죽을 뚫고 들어와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음을 몸소 경험한 것이다.
선인들의 유람록 복원 산행은 사람마다 생각이나 판단이 다를 수 있으니 서로 그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복기를 함께 해 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서로 우열을 가리고 상대에게 노골적으로 '너는 나보다 못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독선과 아집, 오만과 방자에 대하여 말하는 자에게 고마움을 느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지리산도 이젠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오고 있다. 만물도 세대교체가 있고 사람도 영고성쇠가 있으니 노쇠하고 소멸하지 않는 자는 없다. 끝.
♣ 관련 자료 링크
1. 1610년 <박여량>선생의 [두류산일록]을 읽고 : http://blog.daum.net/lyg4533/16487469
2. 향적사(香積寺)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과 기행시 : http://blog.daum.net/lyg4533/16488077
3. 해유령(蠏踰嶺)&선암(船巖)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85
4. 소년대(少年臺)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03
5. 영랑대(永郞臺)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15
6. 지리동부 행랑굴과 마암의 묵서 개운암 이야기 : http://blog.daum.net/lyg4533/16487748
7. 청이당(淸伊堂)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00
8.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상류암지에 대하여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97
9.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초령에 대하여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94
☞ 참고자료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최석기외)
* 군말
1610년 감수재 길 답사 기록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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