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한가위 영랑대 달빛 아래 노닐다(190912~15)

도솔산인 2019. 9. 15. 23:29


    한가위 영랑대 달빛 아래 노닐다(190912~15)



▣ 일   시 : 2019년 9월 12(목)~15(일)[3박4일]

▣ 코   스 : 윗새재-상류암터-옹암-청이당-행랑굴(개운암)-영랑대-소년대(하봉)-중봉-상봉-촛대봉-좌고대-창불대-음양수-거림

▣ 인   원 : 7명[첫날 4명(원타이정, 반야님, 피선생) 이튿날 2명 합류(미산님, 소혼님) 셋째날 1명 합류(산노을님)]

▣ 날   씨 : 첫날 비, 이후 맑고 그리고 구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좇아 산행한 것이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전 구간을 여러 차례에 거쳐 답사하였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다.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동부(洞府)에서 청이당(靑伊堂) 사이, 옹암에 대한 기록이 없다. 1610년 감수재 박여량은 행랑굴에서 점심을 먹고 상류암에서 하룻밤을 유숙(留宿)한 후 초령(새봉)를 넘어 오봉리로 하산하였고, 1871 배찬은 오봉리에서 비현(사립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올라갔지만, 옹암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우회한 것으로 추정한다. 각설하고 이번 산행은 영랑대에서 한가위 보름달을 완상(玩賞)하며 노닐고자 하는 바람에서 출발하였다.


* 草嶺 : 새봉, 嶺 : 산봉우리령, '踰草嶺. 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分也.'입니다.[초령을 넘었다. 이곳이 바로 함양과 산음 두 길의 갈림길이 시작되는 곳(분기점)이다.]

 

추석 전날 선영에서 온 가족들이 모여 성묘 겸 차례를 지내고 오후 1시가 되어 출발하였지만, 고속도로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보니 덕산에 오후 6시가 다 되어 도착하였다. 본래는 진주독바위(옹암) 능선에 위치한 상류암 터에서 하룻밤을 유()하려고 하였으나, 비가 오는 관계로 산천재에서 내려다 보이는 덕천강변 정자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상류암 터로 가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철모삼거리 직전 능선으로 붙어 산죽을 헤치고 올라가는 길과, 중계기에서 청이당으로 조금 오르다가 우측 첫 계곡으로 진입하는 방법이 있다. 어느 길이 되었든 대략 350m~400m 지점 안부에 상류암(上流菴) 터가 있다. 중계기 부근 오미자 군락지를 지나는데 주렁주렁 달린 붉은 오미자 열매가 유혹하지만, 갈길이 멀다보니 과감하게 오미자 孃의 유혹을 뿌리쳤다. 우리는 청이당 길로 오르다가 독바위골로 접어들었다. 희미한 길이 이어지고 끊어지다가 상류암터 샘에서 발원한 작은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거대한 바위 아래 샘터가 나타나는데 이곳까지 오면서 두세 군데 숯가마 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지난 해 상류암(上流菴) 터를 두고 캠샤프트 해프닝이 있었지만 유람록에 나오는 하나의 지명이 두 곳일 수는 없다.


상류암(上流菴) 터에 배낭을 내려놓고 주변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았다. 능선 쪽으로 조금 오르면 자연 전망대가 있는데 그곳에 오르면 비둘기봉, 써리봉, 중봉, 영랑대, 말봉, 두류봉이 조망되고 조개골이 내려다보인다. 부사 성여신이 편찬한 진양지 산천조(山川條)에는(물이) 또한 서흘산(鉏屹山:써리봉)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이르고....라는 내용을 읽고 '상류암(上流菴) 터가 서흘산(써리봉)과 조개골이 보이는 곳에 있다.' 고 확신하고, 처음에 진주독바위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왔으나 찾지 못하였고, 두 번째 독바위양지골로 올라 독바위골로 내려오다가 이곳을 찾게 되었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창원의 최생원이라는 자가 이곳 주민의 말을 빌어 "이 정도 맷돌은 하루면 만들 수 있다."라고 하는데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지.... 나는 상류암(上流菴)이 폐사된 후에 숯가마 터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숯을 굽는 사람들이 직경 90cm의 맷돌 을 만들고 넓은 터(가로 약 25m× 세로 약 14m)를 닦을 필요가 있었을까 묻고 싶다.



상류암 추정지



독바위골 상단 옹암 직전에서 오미자 군락을 다시 만났지만 배낭에 짐을 보탤 이유가 없으니 내 마음은 항상 한가하다. 1년 만에 다시 찾은 진주독바위, 써리봉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상류암 터가 있다고 추정하였으니, 지난 시간들이 아득하기만 하다. 진주독바위는 지리동부의 지형을 이해하는데 가장 훌륭한 조망처이다. 근자에 들어 호사가들이 성과 이름을 바꾸어 산청독바위가 되었으나, 본래의 이름은 옹암 또는 진주독바위이다. 아무튼 옹암이라는 지명은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과 1937년 김학수의 유방장산기행에 보인다. 두류암 갈림길을 지나 청이당터에 이르러 당터 앞 계석에 배낭을 내려놓고 계곡에서 땀을 씻고 잠시 쉬었다. 선답자들이 이곳 또한 홍심을 벗어나 엉뚱한 곳을 청이당 터라고 표시하고 있다. 문제의 행랑굴(개운암, 마암)에 이르러 취수를 하였다. 이곳은 1610년 박여량은 행랑굴, 1871년 배찬은 마암산막, 1877년 허유는 개운암이라고 하였다. 본래 마암은 1472년 김종직과 1610년 박여량은 중봉 샘터 옆 박터를 마암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사실상 지리동부에 두 개의 마암이 존재하는 셈이다. 아무튼 각자가 있는 마암 산막터는 말봉(1618)과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바위암)의 의미에 봉우리라는 의미도 있으니, 말봉을 한자로 표기하면 마암(馬巖)이고 마암을 우리말로 풀어 읽으면 말봉인데, 말봉이 어느 날 지리산길 지도에서 사라졌다.

 

영랑대에 도착하니 먼저 선점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날 미리 올라와 무덤 아래 안부에서 자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여하튼 아리따운 낭자의 미소와 술 한 잔에 넘어가 자리를 양보하였다. 석양에 영랑대에 서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붓에 먹을 적셔 먹물이 다할 때까지 종이 위에 필획을 긋는 것처럼, 체력을 다 소진하고야 도달할 수 있는 영랑대에서.... 8월 한가위 보름달을 감상할 수 있다니 최대 행복일 수밖에 없다. 초저녁부터 보름달님이 젤트 문을 두드리더니 밤새 가문비나무 숲을 배회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반야봉 뒤로 사라졌다. 새벽 430분 기상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고 일출을 맞이하였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산정에서의 일출은 외경스럽기 만하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해유령을 지나 선암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술잔을 올린 후 꽃길을 걸어서 중봉, 상봉으로 나아갔다.

 

마지막 날 구절초가 만개한 촛대봉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는지 모른다. 구름이 일어나고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영신봉 아래 좌고대로 이동하여 원타이정과 소혼님이 염정과 옥곤이 되어 좌고대에 올라 반야봉과 천왕봉을 향해 절을 올리고 창불대에 이르니 운무가 가득하다. 음양수 쪽으로 내려가다가 순천산님 일행을 만났다. 작년 추석에 영랑대에서 만났으니 꼭 1년만이다. 만난 김에 그분들 일행은 점심을 먹고 우리 팀도 잠시 쉬어간다. 짧은 시간에 유람록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에 부족하지만 생각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렵다. 산에 다니는 사람들 중 선인들의 유람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나또한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2006년 영신사지라고 발표한 곳을 찾아가보니 냉천(冷泉)이 솟는 습지였고, 어느 날 청학연못 또한 선인들의 기록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았다.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선인들의 유람록을 읽게 되었으니, 영신사지부터 청학연못, 마암, 소년대, 영랑재, 행랑굴, 청이당, 상류암, 두류암, 산청독바위, 상내봉, 함양독바위, 지장암 터, 고령암, 고령대 등, 선인들의 유람록과 부합(符合)하지 않아 이제는 더 이상 확인하기조차 두렵다.

 

지리산 인문학을 접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 선답자들에게 감사하지만, 일반인들이 잘 모른다고 하여 사실이 아닌 내용을 검증없이 유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리산 인문학의 역사문화 자원은 고증을 통한 역사적 사실이어야지, 소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후생가외(後生可畏)라.'라고 하였으니 나또한 항상 이 말을 명심하고 경계해야겠다. 우매한 나의 답사 기록 또한 오류가 있을 터, 강호 제현님들의 질정(叱正)을 바란다. 끝으로 빈발(賓鉢)은 마하가섭의 출가 전의 이름이요, 가섭(迦葉)은 출가 후의 이름이며, 영신(靈神)은 가섭존자께서 석가세존의 발우와 가사를 가지고 계족산(Kukkuṭapāda-giri, 屈屈吒播陀山)의 바위(가섭대)에 깃들어 선정(禪定)에 들어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마하가섭의 영혼이니,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에 비해당 안평대군이 쓴 찬을 천천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며 우천 허만수 선생의 움막 터에서 점심을 먹고 거림으로 내려왔다.


* 雞山(雞足山) : 인도에 있는 산. 唐 玄奘 <大唐西域記9> 莫訶河東入大林, 野行百餘里, 至屈屈吒播陀山, 唐言雞足.[단국대간 한한대자전], 계족산은 범어로는 꿋꾸따빠다산(Kukkuṭapāda-giri, 屈屈吒播陀山)또는 尊足山. 중인도 마가다국(摩揭陀國)에 있던 산

[출처] 영신대에 숨어있는 석가섭의 비밀|작성자 도솔산인




蒙山畫幀迦葉圖贊(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의 찬)


 

                                                                                  匪懈堂 李瑢(안평대군)

 

頭陁第一是爲抖擻: 마하가사파존자께서는 두타 수행인 두수를 바르게 실천하시어

外已遠塵內已離垢: 밖으로 이미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 離垢의 경지에 오르셨네.

得道居先入滅於後: 앞서 (아라한과)를 깨달으시고 뒤에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雪衣雞山千秋不朽: 눈 덮인 계족산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길이 전하리라.


여기에서 계족산은 영신봉을 가리킴. 빈발암, 가섭전 또한 영신암의 이칭으로 이해함.



* 선인들의 유람록과 기행시

1.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兩流菴 : http://blog.daum.net/lyg4533/16487998

2. 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00

3, 마암과 행랑굴/개운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01

4. 영랑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15

5. 소년대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03

6. 해유령과 선암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 : http://blog.daum.net/lyg4533/16488185





이곳 전망 바위에 오르면 '(물이) 서흘산(鉏屹山써리봉)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이른다.'라는 진양지의 기록이 떠오른다.  


석축


건물 흔적


최생원이 '하루에 만들 수 있다.'는 맷돌(직경 90cm)


박여량 일행이 묵었다는 요사체 터(추정)












달빛을 폰에 담아 드릴 수 없으니 꿈속에서나 그리렵니다.










하봉(소년대)


선암





미래에 도래한다는 미륵불 형상의 바위


영랑대에서 줌인(사진 단사천)











1611년 유몽인이 비로봉이라고 함.


1463년 이륙은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이 죽지 않고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함.



좌고대


창불대


우천 허만수 선생의 기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