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금산 제원 경주김씨 정려비 국역

도솔산인 2015. 9. 18. 09:07

 

금산 제원 경주김씨 정려비

 

錦山之濟原面大山里 卽烈女慶州金氏所居之鄕也 嗣孫鍾雲將竪碑 圖不朽 於永遠抱本 郡校宮儒生薦狀 及先聖廟都有司鄭成默 前參判權益相 諸公褒彰文屬 余記其碑陰其文 昭昭可徵 遂不辭以書 謹按金氏學生士謙女 贈通政大夫成植子 金海金氏顯東妻也 孺人生有貞淑之姿 自處閨時 不待姆敎而能內則之訓 及笄于歸克遵歸道 夫有貞疾 經年委頓 暫不利(離오자추정)側 晝宵殫誠 誠無不至 至危篤沐浴 露禱刀 至治療 衣不解帶 竟遭崩城哀號擗踊 必欲自裁下從 擧家諭以大義 不顧諸兒而死 何以慰夫子泉下之望乎 久之而悟不忍遂志 折哀含痛强起 將事祔身棺一 一躬檢初終襄禮一 依家禮奉先祀 必盡其誠 待宗族務 盡敦睦 治家有度敎子以義 不墮家聲 以保夫浚 噫 其視決性命於造次者 豈非尤難耶 有五子 曰正培 曰龍培 曰德培 曰龜培 曰賢培 孺人之烈行 雖百歲之浚 使過者必式焉 則斯碑之竪 其有於天界民彝者 誰可量歟 於乎休哉 柔兆困敦 仲秋下澣 西河任艮宰述書

 

錦山之濟原面大山里,卽烈女慶州金氏所居之鄕也。嗣孫鍾雲將竪碑圖不朽於永遠,抱本郡校宮儒生薦狀及先聖廟都有司鄭成默前參判權益相諸公褒彰文, 屬余記其碑陰,其文昭昭可徵, 遂不辭以書。謹按,金氏學生士謙女,贈通政大夫成植子,金海金氏顯東妻也。孺人生有貞淑之姿, 自處閨時, 不待姆敎而能知內則之訓, 及于歸, 克遵歸道。夫有貞疾, 經年委頓, 暫不側,晝宵殫誠, 誠無不至, 至危篤, 沐浴露禱至治療, 衣不解帶, 竟遭崩城, 哀號擗踊, 必欲自裁下從,擧家諭以大義,不顧諸兒而死何以慰夫子泉下之望乎?久之而悟, 不忍遂志。折哀含痛强起,將事祔身棺,一一躬檢,初終襄禮, 一依家禮,奉先祀必盡其誠,待宗族務盡敦睦,治家有度,敎子以義,不墮家聲, 以保夫浚。噫,其視決性命於造次者,豈非尤難耶?有五子,曰正培,曰龍培,曰德培,曰龜培,曰賢培。孺人之烈行,雖百歲之浚使過者必式焉,則斯碑之竪,其有於天界民彝者,誰可量歟?於乎休哉!柔兆困敦仲秋下澣,西河任艮宰述書。

 

개인적인 견해에 근거해서 간단하게 표점을 해보았습니다.

자는 떠날 리자의 오타인 듯 합니다.

자는 무슨 자의 의이인지 고민해 봐야 할 듯 합니다.

자는 자의 오타인 듯 합니다.

자는 자의 오타인 듯 합니다.

 

위에 제가 표점한 것도 좀 더 세밀하게 퇴고를 해봐야겠지만 우선 이렇게 올려봅니다.

 

금산 제원면 대산리는 곧 열녀 경주김씨가 살았던 고장이다. 손자(사손) 종운이 장차 비를 세워 영원히 전하는 것을 도모하였다. 영원히 선행을 높이 받드는 데에 군교궁(향교) 유생의 추천장과 선성묘(공자사당) 도유사 정성묵, 전참판 권익상 등 제공의 포창문 등을 내가 그 비의 뒷면에 그 글을 기록하여 뚜렷하게 밝힐 수 있도록 드디어 글쓰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다.

 

삼가 헤아려보면 김씨는 처사 사겸의 딸이고 증통정대부 김성식의 아들 김해김씨 김현동의 아내이다. 부인은 생전에 정숙한 성품이 있었고 규방에 있을 때부터 여스승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도 내측지훈을 능히 알았고 及笄于歸 克遵歸(婦?)道 15세에 시집을 감에 이르러서는 능히 婦道를 따랐다) 남편에게 정질병(고질병)이 있어 해가 갈수록 힘이 빠졌으나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정성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貞疾 : 낫지 않고 늘 앓는 병. 고질

 

위독함에 이르러 목욕을 하고 노천에서 칼기도(?)를 하였다. 치료함에 이르러 옷은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마침내 상을 당하자 슬프게 큰소리로 울면서 하였고 가슴을 두드리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기필코 남편을 쫓아 자결을 하려고 하자 온 가족들이 대의를 깨우쳐주며 말하기를 여러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죽어 어찌 남편을 위로하려고 저승을 바라보는가? 시간이 오래 지나고 차마 뜻을 이루지 못함을 깨닫고 슬픔을 꺾고 아픔을 머금고 강하게 일어났다.

 

將(?)事祔身棺一 一躬檢 처음부터 끝까지 장사지내는 예절과 한결같았다. 가례에 따라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데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였고 친족을 모시는데도 힘을 써서 정이 도탑고 화목함을 다하였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법도가 있어 자식을 의로써 가르치고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고 夫浚을 지켰다. ! 자세히 살펴보니 아차 하는 순간에 생명은 결단 나는 것이니 어찌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닌가?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정배, 용배, 덕배, 구배, 현배이다. 부인의 열행은 비록 백세의 높음이나 지나가는 자로 하여금 반드시 본받음을 삼게 하였다. 이 비를 세움에 그 비에 천상의 세계와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가 있으니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아! 아름답도다! 유자곤돈년(병자년1936) 중추 하한(10일)西河 임간재가 짓고 쓰다.

 

* 任艮宰 : 자 시만(始萬) 생년 무진(戊辰) 1868(고종 5), 고종(高宗) 28(1891) 신묘(辛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3(三等 합격연령 24세 본관 풍천(豊川) 거주지 공주(公州),  

 

 

대전대학 서예학과 지원선생이 어제 오후 메일로 보내온 자료를 지난 밤 만취로 오늘 취중에 초벌 국역을 하고 내일 지리로 들어간다. 선인들이 쓴 글을 더듬적 거리며 암호해독을 하듯 버벅대다가 문득 스스로 한심함을 느꼈다.

 

 

 

금산 제원면 대산리는 열녀 경주 김씨가 살았던 고장이다. 사손(嗣孫) 종운이 장차 비를 세워 썩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받들어지기를 도모하였다. 본군 향교 유생들의 추천장과 선성묘 도유사 정성묵, 전참판 권익상 등 여러분이 포창문으로 내게 비문을 쓰기를 부탁하였고, 그 글에 (이미 부인의 행적을) 뚜렷하게 징험할 수 있으므로 글쓰기를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김씨는 학생 사겸의 여식으로 증통정대부 성식의 아들 김해김씨 현동의 아내이다. 유인은 날 때부터 정숙한 자태가 있었고 규방에 있을 때는 보모의 가르침이 없이도 내칙의 가르침에 통달하였으며, 15세에 출가하여 부도를 지켰다.

 

남편에게는 고질병이 있어 해가 갈수록 쇠약해져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다. 위독할 때는 목욕하고 한데서 기도하는 데 온힘을 다하였고, 치료할 때는 옷의 띠를 풀지 않았다. 마침내 남편의 상을 당하자 가슴을 두드리고 땅을 치며 슬프게 통곡하였다. 기필코 남편을 좇아 자결하려 하자 온 집안이 대의로써 타이르기를, “여러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죽으면 어떻게 지하에 있는 남편의 소망을 위로하겠는가?”하였다. 얼마가 지나 차마 뜻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는 슬픔을 억제하고 애통함을 머금고 억지로 일어나, 장래 자신을 (남편 곁에) 부장(祔葬)하는 일을 처리하였고, 관 하나하나도 몸소 점검하는 등 장례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결 같이하였다.

 

가례에 따라 선조의 제사를 받듦에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고, 친족을 대하는 일에는 도타운 정을 다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고, 자식을 가르침에 의로써 하였으니 남편의 사후에도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고 보전하였다. , 한순간에 생명을 결단내는 일과 비교해보면 이것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정배 용배 덕배 구배 현배이다. 유인의 열행은 비록 백세후에 지나가는 자에게도 반드시 법식이 될 것이라 이 비를 세운다. 비에는 하늘이 내린 사람의 떳떳한 도리가 있으나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훌륭하도다! 병자년 팔월 하순 서하 임간재가 짓고 쓰다.

 

錦山之濟原面大山里 卽烈女慶州金氏所居之鄕也 嗣孫鍾雲將竪碑 圖不朽 於永遠抱 本郡校宮儒生薦狀 及先聖廟都有司鄭成默 前參判權益相 諸公褒彰文 屬余記其碑陰 其文昭昭可徵 遂不辭以書 謹按金氏學生士謙女 贈通政大夫成植子 金海金氏顯東妻也 孺人生有貞淑之姿 自處閨時 不待姆敎 而能內則之訓 及笄于歸 克遵道 夫有貞疾 經年委頓 暫不利(오자추정)側 晝宵殫誠 誠無不至 至危篤沐浴露禱 至治療衣不解帶 竟遭崩城哀號擗踊 必欲自裁下從 擧家諭以大義曰 不顧諸兒而死 何以慰夫子泉下之望乎 久之而悟不忍遂志 折哀含痛强起 將事祔身 棺一一躬檢 初終襄禮一 依家禮奉先祀 必盡其誠 待宗族務 盡敦睦 治家有度 敎子以義 不墮家聲 以保夫 噫 其視決性命於造次者 豈非尤難耶 有五子 曰正培 曰龍培 曰德培 曰龜培 曰賢培 孺人之烈行 雖百歲之 使過者必式焉 則斯碑之竪 其有碑於天界民彝者 誰可量歟 於乎休哉 柔兆困敦 仲秋下澣 西河任艮宰述書

 

) 사손은 손자와 꼭 같은 것은 아니고, 유인 또한 부인과 꼭 같은 것은 아니므로 그대로 표시하였고, 將事는 제사를 주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일을 주관한다는 뜻도 있으므로 후자를 취하였고, 는 장례절차 중에 쓰인 글이므로 부장(祔葬)의 뜻으로 읽었고, 其視는 여기서는 비교하다는 뜻으로 쓰여진 것 같습니다. 틀릴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뜻은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