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한시감상 117] 죽음을 기다리며 시를 짓다

도솔산인 2015. 8. 6. 18:24

 

[한시감상 117] 죽음을 기다리며 시를 짓다

 

 

胸中葷血盡 : 가슴 속 비루한 기운 싹 씻기고

此心更虛明 : 이 마음 다시금 텅 비어 밝아라

明日生羽翰 : 내일 날개 돋아 날아오르면

逍遙上玉京 : 하늘나라에서 소요하게 되리라

 

閣瘦茅簷坐 : 야윈 몸 처마 밑에 앉아 있자니

川淙夜深深 : 쫄쫄 냇물 소리에 밤 더욱 깊어진다

萬理雖未淨 : 모든 이치 선명히 깨치진 못했어도

寧順自安心 : 삶과 죽음 이치 따르니 절로 마음 편안하다

 

- 이만도(李晩燾, 1842~1910)

구월 초이튿날 밤에 입으로 불러 시를 짓다[九月初二日夜口占]

향산집(響山集)

 

 

사람이 죽는 것은 누구나 다 같지만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이 시는 향산(響山) 이만도 선생이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곡기를 끊고 죽음을 기다리던 중에 지은 시이다. 이 시를 지은 날은 92일로, 단식 18일째였다. 이 시를 짓고 6일이 지난 98, 그는 비루한 역사 현장을 벗어나 훨훨 날아가 하늘나라에서 소요하게 된다.

 

향산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후손이다. 대사성을 지낸 이휘준(李彙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66(고종 3)25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당시 이휘준은 아들에게 당부하였다.

선비가 벼슬에 나가면 태평한 시대에는 임금을 도와 백성에게 혜택이 가게 해야 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 너는 더욱 힘써라.”

 

부친의 당부는 이후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방향타가 된 듯하다. 1876(고종 13)년 사헌부 집의로 있을 때 최익현이 도끼를 앞에 놓고 강화도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양사(兩司)에서는 최익현을 탄핵했다. 그때 이만도는 그를 탄핵하는 사간원의 계문(啓文)이 적절치 않다며 글을 수정했다가 관직이 삭탈된다.

 

1905(광무 9)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참수하기를 청하는 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풍습병(風濕病)으로 종기가 생겨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는데도, 병든 몸을 이끌고 현도(縣道)에 나아가 소장을 올렸다. 상소에서 임진년 이후로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일, 자객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을 들며 반드시 일본을 쳐서 국권을 회복할 계책을 세워야 함을 밝혔다.

 

그리고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완용 등 오적이 5()의 계약을 정하고 성상을 협박하여 조인(調印)하게 하였으니, 이들은 원수보다도 흉악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 미국의 법학자 휘튼(Henry Wheaton, 1785~1848)의 국제법 저서인 만국공법(萬國公法)의 내용을 제시했다.

남의 내정(內政)을 간섭하지 말며, 남의 재물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나라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백성의 소원에 따라 행해야 하며, 협박에 의해 이루어진 조약은 나라의 군주가 친필로 서명했더라도 폐기할 수 있다.”

 

각국 공사(公使)에게 질정하여 중정(中正)한 공법(公法)에 따라 재결한다면 조약서의 먹이 채 마르기 전에 환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애통함과 간절함을 담아 올린 이 상소에 대해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

 

1910(융희 4)814, 한일합방 소식을 들은 그는 유언 성격의 소장(疏章)을 올린다. 변란이 일어나기 며칠 전 궁벽한 산골에 묻혀 지내던 자신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변란이 발생하기 전에 옛 신하를 생각한 성상의 은혜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다. 그리고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다는 이유로 다음 네 가지 죄를 들면서 곡기를 끊어 자진할 것임을 밝힌다.

 

첫째, 벌써 30년 전부터 권신이 권세를 다투어 왜인을 끼고 국가에 화란을 끼칠 조짐이 있었는데, 자신이 지위가 낮다는 핑계로 간쟁하지 않은 것.

둘째, 을사년 변란 당시 병상에 누워 있느라 간신적자와 목숨을 걸고 겨루지 못한 것.

셋째, 폐하께서 위호(位號)를 잃으신 마당에 자신만 분수에 넘는 작질을 받은 것.

넷째,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로서 원수의 백성이 되면서도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것.

 

자진하는 것으로 죄를 씻을 수도, 성은을 갚을 수도 없음을 잘 알면서도 상소한 데에는 마지막으로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성상이 귀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바가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가 목숨보다도 중하게 여긴 소원이 상소 말미에 적혀 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결단을 내리시어 천벌을 크게 행하여 거듭 종묘사직을 높이고, 태평성대를 이루어서 만세의 무궁한 복을 성대히 받으소서.”

 

상소를 올린 후, 향산은 죽음을 기다리며 삶을 정리했다. 도리에 맞게 살아 죽음을 맞아서도 마음 편안할 수 있었던 향산. 그가 쓴 시구가 깊은 밤 물소리처럼 100년 뒤 오늘을 깨운다.

 

글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