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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을 찾아서 <4> 뇌룡정 생가터

도솔산인 2015. 1. 28. 17:00

 

남명을 찾아서 <4> 뇌룡정 생가터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은 남명 조식을 대유학자 반열에 들게 한 산실이다. 그가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고 학문을 정진한 곳이 바로 토동이기 때문이다. 토동에 있는 뇌룡정은 남명이 학문적으로 정진한 장소이며 생가터는 그를 있게 한 터전이니 남명사상은 바로 여기서 발원된게 분명하다. 합천과 산청·의령 등 3개군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토동은 의령군 대의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km 지점에 있다. 인천 이(李)씨 집성촌인 이 곳은 40여호가 사는 조그만 마을이다. 마을입구 정자나무 아래에 서면 서쪽으로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동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절벽아래로 흐르는 강을 따라 펼쳐진 들판 한가운데 아담한 정자가 한 눈에 들어온다.

 

  김해에서 산해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남명이 48세 되던 해인 1548년 2월 어머니의 3년 상을 물리고 외가가 있던 토동에 정착했다. 여기서 초가 한 채를 지어 뇌룡사(雷龍舍)라 이름 짓고 지리산 자락의 산청군 덕산으로 옮기기까지 12년간 학문에 정진했다. 남명에게 있어 뇌룡사 시절은 학문을 완성한 최성기라 할만 했다. 이곳에서 유명한 정인홍 문익성 이광우 오건 등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남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문헌에는 없으나 뇌룡사는 정유재란때 훼손된 뒤 복원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1883년 허유 등 남명을 따르는 삼가면 일대 유림들이 집터 흔적만 남은 이 곳에 정자를 지어 뇌룡정(雷龍亭)이라 이름을 붙였다.

남명학의 본산 이랄 수 있는 뇌룡사의 모습은 알 길이 없지만 그나마 뇌룡정을 보는 것으로 감회를 추스렸다. 검소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의 뇌룡정이 남명의 기품을 안은 듯해 다소 위안이 된다. 뇌룡정에 들어서면 좌우기둥에 씌어있는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이란 글귀가 눈길을 끈다.

 

  장자(莊子)의 재유(在宥)편에 나오는 문구인데 「연못처럼 고요했다가 때가 되면 우레 처럼 세상을 울리고」,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신묘한 조화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여기서 「雷」와 「龍」 두 글자를 따와 뇌룡사라 이름을 지었으니 산림처사로 있던 그의 기개를 엿보게 한다. 토동에 정착한지 7년째 되던 1555년(55세·을묘년 명종 10년) 11월 조정에서 그에게 단성현감(丹城縣監)의 벼슬을 내렸다. 이때 그는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일명 단성소)를 올려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세상을 울렸다. 이 단성소는 남명의 기개를 대표하는 사례인데 자신감에 찬 그의 글에서 당시 학문적으로 큰 성취를 이룬 시기임을 간접적으로 엿보게 한다.

특히 단성소는 「학문의 궁극적인 성취는 이론이 아닌 실천」이라는 남명사상의 요체를 여실히 드러낸 것으로 당시 이론에 집착하던 유림에 충격파를 던져 뇌룡정이 사림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이같은 뇌룡정의 명성은 남명이 덕산으로 옮기면서 빛을 잃었고 오늘날까지도 남명의 본산은 덕산으로 굳어져 있다. 토동에 살면서 뇌룡정을 관리하고 있는 이봉영(62)씨는 『서책이 2궤짝 정도 전해져 내려 왔는데 10여년전 수차례 도둑이 들어 모두 없어졌다』고 전했다. 대유학자의 유적지에 대한 관리가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록에는 남명이 뇌룡정 옆에 낚시와 사색을 즐겼다는 영파대(暎波臺)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뇌룡정에서 마을쪽으로 100m쯤 걸어나오면 마을빈터 어귀에 「남명선생 생가지」라는 초라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남명의 본가는 삼가면 판현이지만 1501년(연산군 7년) 6월 외가인 토동 인천 李씨 忠順公 李菊의 집에서 태어나 5세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생가터는 현재 도기념물 148호로 지정돼 있다. 골목길로 들어선 뒤 주민들에게 물어 찾아간 생가터는 기단 석축만 일부 남아 있을 뿐 별다른 흔적이 없다. 합천군은 올해 남명 탄생 500주년을 맞아 10억원의 예산을 들여 생가와 서원복원에 나설 계획이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민용기자 mylee@kookje.co.kr

 

 

《출생지 `토동`》

 

 남명이 태어난 합천군 삼가면 토동은 예전부터 풍수지리적으로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명당인데다 범상치 않았던 남명의 탄생을 둘러싸고 구전되는 이야기가 많다. 그 가운데 몇 개를 들어보면 옛날 어느 풍수도인이 합천군 삼가면 토(兎)동을 둘러보니 암토끼가 달에 있는 수토끼를 쳐다보고 누워있는 형상이니 토끼의 배에 터를 잡은 집에서 1년 내 큰 인물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 토끼의 배부분에 위치한 집이 남명의 외가였고 1년 뒤 예언대로 남명이 태어났다고 전한다.

 

 또 탄생과 관련해 산청군 삼장면에서 전해내려 오는 것은 남명의 외조부인 李공이 토동에 정착해 살 무렵 지나가던 도사가 「이 땅에 신유년 6월에는 꼭 성현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이후 몇 년이 흘러 하루는 남명의 외조부모가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들의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 뒤 딸에게 태기가 있고 도사가 말하던 그 해 6월 남명이 태어나니 무지개같은 기운이 집앞 팔각정 우물에서 뻗쳐 나와 산실을 가득 채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가면에서 구전하는 이야기는 또 있다. 남명의 부친이 처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하루는 남명의 외조부가 바깥에서 어머 어마한 꿈을 꾸고 서둘러 돌아왔다. 꿈 얘기는 남에게 하지 않아야 효험이 있는 것이라고 해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 날 밤 작은 방에서 부부가 정을 나누면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는 현몽이었다고 한다.

 남명의 외조부는 자신의 아들 내외를 그 방에 재울 생각이었으나 이미 딸 내외(남명의 부모)가 차지하고 있었고 그날 밤 남명이 잉태됐다고 전해진다.

 

mylee@kookje.co.kr [2001/02/15 2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