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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정(2) - 산해정에서 세상을 꿈꾸는 남명

도솔산인 2015. 1. 27. 23:29

산해정(2) - 산해정에서 세상을 꿈꾸는 남명

 

정  우  락(남명연구원 상임연구위원/영산대 교수)

 

남명 생애에 있어 산해정기(山海亭期)는 참으로 중요하다. 이 시기 그는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했기 때문이다. 정자의 이름에서 보이듯이 산(山)같이 높고 바다(海)같이 깊은 거대한 정신세계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성글어질 수 있는 학문을 고인의 도를 계승하여 다시 밝히고자 하였기 때문에, 방의 이름을 '계명(繼明)'으로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흔히 남명의 25세를 주목한다. 산사에서 성리대전을 읽다가 원나라 허형(許衡, 1209-1281)의 출처에 대한 언급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어 남명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근간으로 한 학문에만 매진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후의 출사를 위한 과거시험은 단순히 어머니의 권유와 당부에 의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남명의 출사에 대한 꿈은 쉽게 포기되지 않았다. 이것은 30세에 산해정으로 거처를 옮긴 후, 출사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은 37세까지 지속된다.

 

남명의 산해정 시절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확고히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남명의 전 생애를 들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여럿 있다. 사화가 가정 안팎으로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 역시 그 하나이다. 4세(1504)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나 외계에 속하는 조지서(趙之瑞, 1454-1504)가 화를 당하고, 19세(1519)에는 기묘사화가 일어나 숙부 언경(彦卿)이 연루되어 파직된 지 얼마 안되어 돌아가신다. 또 45세(1545)에는 을사사화가 일어나 평소 친분이 두텁던 이림(李霖, ?-1546), 곽순(郭珣, 1502-1545), 성우(成遇, 1497-1579) 등이 연루되어 희생당한다. 특히 45세에 들은 친구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다가 말이 이들에게 미치면 목이 메여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는 언행총록의 기록은 이를 잘 대변한다. 안으로는 가족이 연루되어 있었으며 밖으로는 친구와 외족이 연루되어 있었던 사화, 남명은 이 사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한편 자신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왜에 대한 인식도 명확히 했다. 바닷가에 살면서 해안에 출몰하는 왜적들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같은 경험은 그의 작품에 '대마도'가 자주 등장되게 했고, 급기야 조정 대신들의 안일한 대응을 비판하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왜적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책문제(策文題)에 이것은 분명히 나타난다. 즉“임금이 벌컥 화를 내어 위엄을 더하려고 하면, '변방의 오랑캐를 자극해서 말썽을 일으킨다'라 하고, 뇌물을 받은 역사(譯史) 한 놈을 목베어서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는 일을 엄히 단속하려 하면 '겸손한 말로 온순하게 대하는 것이 낫다'라고 한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과연 적을 제압할 말이 없는 것이고 또한 적의 침략을 막아낼 계책이 없다는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한 계책을 듣고자 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왜에 대한 남명의 이같은 경계가 그의 사후 문하에 수많은 의병장을 있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남명의 산해정기는 그의 역사인식을 예각화 할 수 있는 경험적 바탕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이 시기 남명이 지은 시편들은 어떤 것이 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산해정에서 창작하거나 훗날 산해정 시절을 회고하면서 지은 남명의 시는 다양하다. (1)「숙안에게 부침(寄叔安)」, (2)「산해정에서 우연히 읆조림(山海亭偶吟)」, (3)「산해정에서 주경유의 시에 차운함(在山海亭次周景游韻)」, (4)「산해정에 대를 심으며(種竹山海亭)」, (5)「행각승에게 줌(贈行脚僧)」, (6)「판서 정유길에게 줌(贈判書惟吉)」, (7)「이우옹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聞李愚翁還鄕)」, (8)「산해정에 궂은비는 내리고(山海亭苦雨)」, (9) 「산해정에서 대학 팔조가의 뒤에 씀(在山海亭書大學八條歌後)」, (10)「석천자에게 줌(贈石川子)」, (11)「구암사에 씀(題龜巖寺)」, (12)「진극인의 죽음을 슬퍼하며(輓陳克仁)」, (13)「함허정(涵虛亭)」, (14) 「사마소의 잔치에서(司馬所宴)」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2), (4), (6), (7), (8), (9), (14)는 지난 번 - 산해정(1), 깊은 산 높은 바다, 고뇌하는 남명(『남명원보』23, 2001.8) - 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니, 여타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우선 눈의 띄는 것이「재산해정차주경유운(在山海亭次周景游韻)」이다. 유가적 이상정치인 왕도정치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可矣豊基

行繫我門箇箇談王口

於今爲世尊

 

아름다울 손, 풍기(豊基) 군수여!

내 집 문을 지나다 말을 매었네.

왕도(王道)를 낱낱히 담론하니,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다네.

 

경유는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자이다. 그는 1543년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사람으로 유명하다. 위의 시는 주세붕이 남명의 산해정을 찾아 왕도에 대하여 이야기했던 일단을 보여준다.

 

왕도정치는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하는 유가의 이상적 정치형태이다. 덕을 정치의 원리로 삼는 사상은 이미 서경(書經)이나 논어 등에서도 보이지만, 왕도를 패도(覇道)와 대비시켜 명확하게 말한 것은 전국시대의 맹자(孟子)였다. 그는 인의(仁義)라는 덕을 기반으로 하여, 왕도와 패도를 엄격히 구별하고, “힘으로써 인을 가식하는 자는 패(覇)이다. 패는 반드시 대국(大國)을 가진다. 덕으로써 인을 행하는 자는 왕이다. 왕자는 대(大)를 기대하지 않는다. 힘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심복(心服)시키는 것이 아니며, 덕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 속으로 참되게 복종시키는 것이다”라고「공손추편(公孫丑篇)」에서 갈파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의의 덕이 안으로 충실하여 그것이 선정(善政)으로 나타나는 것이 왕도이며, 인정(仁政)을 가장하고 권력정치를 행하는 것은 패도라는 것이다. 맹자의 왕패론이 왕도의 요인으로 인에다가 위(威)를 더함으로써 패도정치의 존재의의를 시인했던 순자(荀子)의 것보다 관념적이긴 하지만, 유가에서 지속적으로 지지받아 왔던 대표적 정치형태였다.

 

왕도정치에 대한 남명의 생각은 훗날 조정에 올린「무진봉사」, 「을묘사직소」등의 상소문에도 잘 나타난다.

 

(가) 전하께서 과연 경(敬)으로써 몸을 닦으면서, 하늘의 덕에 통하고 왕도를 행하셔서, 지극한 선에 이른 뒤에 그치신다면, 밝음과 정성됨이 함께 나아가서 사물과 내가 겸하여 다할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교화에다 베푸는 것은 바람이 일어나자 구름이 몰려가는 것 같으니, 아래 백성이 본받는 것이 반드시 이보다 더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나) 다른 날 전하께서 왕천하(王天下)의 지경에 이르도록 덕화를 베푸신다면 저는 마굿간의 말석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그 마음과 힘을 다해서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어찌 임금을 섬길 날이 없겠습니까?

 

(가)는「무진봉사」의 일부이고, (나)는「을묘사직소」의 일부이다. 즉 군주가 왕도정치를 시행하는데 있어서 먼저 '경'으로 자신을 닦아야 한다고 하면서, 스스로의 몸을 닦은 후에 백성을 다스린다면 군주와 백성이 함께 지극한 경지에 이를 것이라 했다. 이 때 교화를 베푼다면 그야말로 바람과 구름의 관계처럼 백성들은 모두 본받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군주가 덕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왕도정치가 실행된다면 자신은 기꺼이 관직의 말석에서라도 소임을 다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글들이 남명의 산해정기에 쓰여진 것은 아니라 해도 그의 왕도정치에 대한 열망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또한 그의 불출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강고했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알게 한다. 인의(仁義)라는 덕에 의하여 위기적 현실을 바로잡고, 사회에 질서와 안정을 부여하고자 하는 왕도는 남명의 관점에서는 요원한 것이었고, 이것이 결국 그의 불출사 의지와 함께 강한 비판의식으로 성장하였다. 남명이 살아있을 때 왕천하의 현실은 오지 않았고, 따라서 남명은 유가적 출처의식에 의거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남명은 산해정에서 석천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을 만나기도 했다. 해남(海南) 출신 임억령이 산해정을 찾아 와서 남명을 보고는, '길이 매우 험하더이다'라고 하자, 남명은 웃으며 '그대들이 밟고 있는 벼슬길이 아마 이보다 더 험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한다. 험한 산길을 벼슬길에 비유하여 벼슬길에 비하면 산길의 험난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임억령에게 남명의 이 말이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545년 그가 금산군수로 있을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小尹)인 동생 백령(百齡)이 대윤(大尹)의 선배들을 내몰자 자책하며 벼슬을 사직하고 은거하고 만다. 당시 출세욕에 눈이 먼 동생을 타이르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으나 백령이 거절하자, 억령은 동생이 보는 앞에서 초석(草席)을 절단하고 의절을 선언한다. 남명은 이같은 임억령을 생각하면서「증석천자(贈石川子)」라는 작품을 남긴다.

 

今有石川子

其人古遺節芙蓉聳豪

何言大小別昔年要我乎

山海之蝸穴看來豆子熟

琬琰東西列石川千木奴

破甘香滿舌歸來花判事

其行不改轍雖飢不食言

人益紅爐雪尙君明逸戒

有懸非解

 

지금 석천자가 있는데, 그 사람됨은 옛날의 남은 절개라네.

연꽃은 모두 높게 솟아 얽매이지 않은데, 어찌 크고 작은 걸 구별해서 말하겠나?

옛날 나를 찾았었지, 산해정 그 작은 집으로. 콩이 익을 그 무렵이었는데, 술자리를 동서로 차려 놓았었지.

석천(石川)의 천 개의 귤, 단 것을 깨무니 향기 혀에 가득하도다.

돌아와 꽃 키우는 일, 그 행실 고치지 않는구나.

비록 굶주려도 식언을 하지 않으니, 사람들 사이에서 말썽이 없도다.

그대의 현명하고 편안한 훈계 숭상하노니, 사무치는 그리움 풀 길이 없네.

 

 석천은 임억령의 호이다. 남명은 산해정에서 만났던 임억령을 회고하면서, 그의 인품을 칭송했다. '옛날의 남은 절개', '높게 솟아 얽매이지 않는 연꽃', '입안에 가득한 귤의 향기'가 모두 그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돌아와 꽃 키우는 일, 그 행실 고치지 않구나'가 그것이다. 세상에 나아간 일이 있으나 정치현실에 대한 부당함을 느끼고 산야로 돌아와 자신을 지킨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임억령의 퇴처가 남명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남명이 왕도정치가 실행되지 않고, 또한 왕도정치 실행에 대한 군주의 의지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출사하지 않았다면, 임억령은 동생 백령의 정치적 행위에 의한 것이었다. 그 뒤 임억령이 1552년 동부승지에 등용되어 병조참지를 지내고,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에는 담양부사가 되었던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작품의 창작 연대를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이 임억령의 '귀래화판사(歸來花判事)'를 칭송한 것이니 임억령이 벼슬을 사양한 후이며, '석년요아호(昔年要我乎), 산해지와혈(山海之蝸穴)'이라고 하였으니 산해정 시절 이후, 그리고 임억령이 다시 벼슬한 1552년 이전으로 보아 남명의 뇌룡사 시절 초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명은 산해정에 살면서 이처럼 현실에 대한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 주세붕과 같이 왕도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사람을 기리기도 하고, 임억령과 같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숨은 사람을 칭송하기도 했다. 주세붕에 대해서는 현실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지향이, 임억령에 대해서는 현실에 대한 그의 소극적인 지향이 나타난다고 하겠으나 모두 세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명이다.

 

이처럼 그의 세계가 현실로 열려 있었다고는 하나, 이것이 정신세계의 굳건한 확보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남명은 알고 있었다. 즉 자신의 정신을 어느 한 곳에 정착시킬 때 비로소 그 정신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증행각승(贈行脚僧)」을 통해 보여주었다. 문집에는 이 작품의 창작배경을 밝혀두고 있다. “선생이 산해정에 있는데 어떤 중이 와서 뵈었다. 그가 온 곳을 물었더니,‘삼각산에서 왔습니다’라고 했다. 하루 종일 머물러 앉아 있다가 하직하고 갔다. 그 다음 날 이른 아침에도 또 왔다. 이렇게 한 지 삼일 된 아침에 하직하면서 말하기를,‘소승은 옛날 살던 산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하고는, 시축(詩軸)을 내밀면서 절구 한 수를 청했다. 선생은 젊은 날 삼각산에서 공부한 적이 있으므로, 중의 말을 듣고 옛날 일에 느껴 이 절구를 지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노래를 들어보자.

 

渠在漢陽西

來三角山丁寧還寄語

立脚尙今安

 

나도 한양 서쪽에 살면서, 삼각산을 오갔었지.

정녕 도로 말 부치노니, 이젠 편안히 다리를 붙여야지.

 

남명이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낸다. 4 내지 7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게 되는데, 연화방(蓮花坊:현 종로 4-5가)근처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26세 되던 해 3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 삼가로 다시 내려오게 된다. 그러니까 기구와 승구의 언급은 26세 전에 서울생활을 하면서 삼각산에 오갔던 것을 기억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전구와 결구이다. 여기에는 남명의 번뜩이는 예지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삼각산에 사는 '행각(行脚)'승이 시를 지어달라고 했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입각(立脚)'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행각'은 떠돈다는 것이고, '입각'은 정착한다는 것인데, 이 두 대립된 단어를 떠나는 중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정신적 안착을 당부한 것이라 하겠다. 서울에서 돌아와 산해정에 정착한 자신과 대비시키면서, 산해정을 떠나 다시 삼각산으로 돌아가 정착하라는 것이다. 행각은 자유롭게 보이나 오히려 얽매임이 있고, 입각이 얽매여 보이나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더욱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세계를 확고하게 가짐으로써 비로소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자 함일 것이다.

 

역시 산해정에서 지은「기숙안(寄叔安)」에서도 이같은 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

 

梅上春候動

枝間鳥語溫海亭山月白

何以坐吾君

 

매화나무에 봄 기운이 감돌고, 가지 사이엔 새 울음소리 따스하구나.

산 속의 달빛 산해정에 환한데, 어떻게 하면 그대 불러 앉게 할 수 있을까?

 

숙안은 박흔(朴)이라는 사람의 자라고 한다. 세상에는 다시 봄이 와서 사물에는 기운이 맥동(脈動)하고 있다. 기구와 승구는 이를 말하고자 함이다. 전구에서 보이는 것처럼 산해정에 달빛이 비쳐 밝다고 했으니 사물에 의해 촉발된 감흥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결구에 보이듯이 박흔은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박흔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결구의 '좌(坐)'는「증행각승」 결구의 '입(立)'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보아, 정신적 안착을 말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일찍이 남명은 32세 되던 해 서울에 있던 집을 매부 이공량에게 부탁하고 김해로 내려온다. 이 때 친구 성운(成運, 1497-1579)은 남명에게「기건중(寄楗仲)」이라는 시로 이별한다. '큰 기러기는 높은 날개 짓하며 남쪽으로 날아가는데(冥鴻矯翼向南飛), 정녕 가을 바람 나뭇잎 떨어지는 때였네(正値秋風木落時). 땅에 가득한 곡식을 닭과 오리가 쪼는데(滿地稻粱鷄鶩啄), 구름 아득한 하늘 밖에서 배고픔 잊었구나(碧雲天外自忘飢)'가 그것이다. 서울에서 김해로 내려가니 '해남비(向南飛)'라고 했을 터인데, 그 모습을 '큰 기러기 높은 날개 짓'로 표현하고 있다. 성운이 정신적 안착지를 찾아가는 남명을 본 것이 아닐까? 진정한 정착은 폭발적인 운동의 원천일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