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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25)영남 최후의 성리학자-한주 이진상(上)

도솔산인 2015. 1. 23. 18:04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25)영남 최후의 성리학자-한주 이진상(上)
입력: 2008년 01월 04일 17:42:32

 

-주리세가(主理世家)-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성주(星州) 이씨의 집성촌으로 ‘한개’라고 부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민속관광 마을이다. 한자로는 대포리(大浦里)인데, ‘큰 개’ 대신 ‘한개’라고 부르며 세상에 이름이 크게 알려진 마을이다. 그곳에 ‘주리세가’라고 현판을 걸고, 한주(寒洲)·대계(大溪)·삼주(三洲)라는 세 개의 편액을 현판으로 붙인 한주의 종택이야말로 말 그대로의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었다.

한주 이진상(1818~1886), 그의 아들 대계 이승희(李承熙:1847~1916), 또 대계의 아들 삼주 이기원(李基元)의 3대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일본과 싸우는 독립정신을 키워 만주 벌판에서 투쟁한 대계의 혼이 자랐으며 대계의 제자이자 탁월한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의 혼이 무르익었던 곳이다.

 

경북 성주군 대산리 한개마을에 있는 이진상의 생가. 1767년에 지어져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성주 이씨의 유서깊은 종택이다. 한주(寒洲), 대계(大溪), 삼주(三洲) 3대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한주의 종택인 ‘주리세가’는 역사가 깊고 인물의 보고인 집이다. 한주의 증조부 이민검(李敏儉)이 영조 43년인 1767년에 건립하였고 고종 3년 1866년에 증손자 한주 이진상이 새로 고쳐짓고 지금에 이르도록 그대로 보존되어오는 유서 깊은 종가다. 조부 이형진(李亨鎭)은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라는 이름 높은 학자의 제자로 성균생원으로 학자의 이름이 컸으며, 그분이 낳은 두 아들로 진사(進士)에 오른 한고 이원호(寒皐 李源祜)와 대학자에 공조판서에 오른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형제가 바로 그 집에서 태어났다. 한고는 바로 이진상의 아버지이고 응와는 숙부였다. 이진상의 아들 대계 이승희는 아버지에 버금가는 성리학자요,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 망국을 당하자 만주벌판으로 망명하여 공교회(孔敎會)를 설립하여 유학사상을 통한 독립투쟁으로 항일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했고, 그 문하에서 심산 김창숙의 독립정신이 배태되었다.

-한주 이진상의 탄생-

조선왕조 말엽인 순조18년(1818)은 다산 정약용이 수백 권의 저서를 안고 강진의 유배지에서 57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해배되었던 해다. 기호지방의 대표적 성리학자 화서 이항로가 27세의 나이로 학문이 무르익고, 호남의 대학자 노사 기정진이 21세의 청년으로 독특한 사상체계인 유리척사(唯理斥邪)의 새로운 논리를 구상하고 있던 때였다. 바로 그 해에 영남을 대표하는 최후의 큰 성리학자 이진상이 유서 깊은 종택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도 승승장구로 올라 공조판서에 이른 대감이었지만, 당대의 대학자로 성리학 이론으로도 높은 수준에 이른 한주의 숙부 이원조는 영특한 조카 한주를 그냥 두지 않고 스승이 되어 본격적으로 가르쳐주었다.

한주는 20세에 영남 학문의 고향인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에 대한 숭모의 정을 표한 이래, 집에 돌아와 집안 서재의 이름으로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운곡노인(雲谷老人)이라던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도산(陶山)에 살았던 퇴계를 법받겠다는 자신의 각오를 천명한 내용이었다. 약하여 ‘운도재(雲陶齋)’라 호칭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철학의 뿌리는 주자와 퇴계에 있음을 그냥 알게 해준다.

한주는 학맥이나 학통에서 특별한 스승을 내세우지 않아 독자적으로 학문체계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마치 화서 이항로나 노사 기정진도 특별한 사승 없이 독자적으로 학문을 개척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젊은 시절에는 숙부 응와공에게서 배우고, 장복추(張福樞)·이정상(李鼎相)·허훈(許薰) 등과 강론(講論)하였고, 35세 때에야 당시의 이름 높은 영남의 학자 정재 유치명을 찾아뵙고, 40세에는 안동으로 서산 김흥락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심즉리설(心卽理說)-

가학(家學)을 잇고 여러 동료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큰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40전후에는 이미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는 이채로운 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44세에 완성한 그의 독특한 성리학설인 ‘심즉리설’이라는 논문은 당시 영남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퇴계의 학설과 완전하게 합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였으나 그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연구와 사색을 거듭하여 독창적인 학설을 끊임없이 발표하였다. 한주는 그의 노년인 51세에야 거유이던 성재 허전(性齋 許傳)을 찾아가 예(禮)를 논하였고, 회갑해인 61세에 그의 대저인 22권의 ‘이학종요(理學綜要)’라는 주저를 저술하였고, 67세에는 다시 손질하여 완성본으로 확정하였고,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성리학의 기본은 ‘성즉리(性卽理)’란 명제에서 출발하여 ‘성리학’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송나라의 여러 어진 학자들에 의하여 그것에 대한 학설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한주는 성(性)이 아닌 심(心)이 곧 이(理)라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여, 주자나 퇴계의 본뜻이 그런 내용이었다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의 성리학은 본디 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설과 율곡의 ‘기발이리승일도(氣發而理乘一途)’설이 큰 주류를 이루면서 발전해왔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자 영남일대에서는 퇴계의 ‘호발설’을 적극 옹호하면서 율곡의 ‘기발설’은 극력 배척했었다. 이런 사상계의 분위기에서 한주 이진상은 ‘이발일로(理發一路)’설을 주장하여 한편으로는 퇴계의 ‘호발설’에도 동의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율곡의 ‘기발설’에도 동조하지 않아 사상계에 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한주문집을 불태우다-

한주 이진상이 세상을 떠난 뒤, 자손과 제자들에 의하여 ‘한주선생문집’ 53책이 간행되자, 퇴계학문을 절대시하던 영남의 학자들이 크게 분노하고 한주문집을 불태우는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다. 수십년 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으나, 한주의 본뜻은 퇴계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결론으로 퇴계후손들의 양해 아래 그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최근에는 간행하지 못한 많은 저작까지 함께 합하여 ‘한주전집’ 85책이 새롭게 간행되어 조선 6대 성리학자이자 조선 후기 3대 성리학자인 한주의 학문 전체가 학자들에게 공람될 수 있게 되었다.

-척사(斥邪)와 의병운동-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은 기호와 호남에서 독창적인 성리학을 연구하여 나라가 망하던 망국의 세월에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성리학의 높은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학자였다. 순조 때의 대학자 대산 김매순은 당색이 다르면서도 다산 정약용과 많은 학문적 교유를 했었고 아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그가 다산에게 보낸 편지에, 동양의 유학사를 거론하면서 성리학의 본래 입장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대목이 있다. 바로 ‘약정복성(約情復性)’이라는 네 글자로 압축하고 있는 구절이다. 성리학의 본디 목표가 통제하기 어려운 인간의 정(情)을 제약하고 본디 타고난 착하고 선한 성품을 제대로 회복하는 것이 성리학의 요체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성리학의 원리는 너무나 사변적이고 관념적으로 논쟁이 계속되면서 본래의 목적에서는 멀어지고 당동벌이(黨同伐異)의 당쟁무기로 둔갑하여 자신들과 다른 당파에 공격의 역할이나 하고 있던 것이 한말의 사상계 동향이었다. 이러던 시절에 화서·노사·한주의 세 성리학자는 자신들의 주리(主理) 이론을 ‘이존기비(理尊氣卑)’ ‘유리척사(唯理斥邪)’ ‘이발일로(理發一路)’와 ‘심즉리’로 압축하여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망국에 즈음하여 뜨거운 민족혼으로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의 불꽃을 피우게 하는 몸으로 실천한 성리학자들이 되었다.

화서의 제자들인 면암 최익현과 의암 유린석, 노사의 제자인 송사 기우만, 녹천 고광순, 성재 기삼연, 한주의 아들 이승희와 그의 제자 심산 김창숙으로 이어지는 의리와 독립의 성리철학은 마지막 조선의 혼을 지켜주는 대들보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대계 이승희의 의혼-

한주의 아들로 태어나 한주의 성리학과 사상을 계승한 한계(韓溪)·강재(剛齋)·대계라는 호로 불리던 이승희는 독립지사이자 큰 학자였다. 뒷날 망국의 시절에 북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풍찬노숙의 고난을 겪다가 끝내 고향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망명지 낯선 타국에서 70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인 1908년에 만리타향인 소련 영토 블라디보스토크에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자 망명객인 의암 유린석(당시 67세)과 한주 이진상의 아들 대계 이승희(당시 62세)의 해후가 이루어졌다. 나라의 독립을 찾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독립투쟁에 앞장선 당대의 성리학자들이 만난 것이다. 의암의 기록에 이승희와 만나 ‘심즉리설’을 토론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들이 어찌 ‘심즉리’의 성리학설만 토론했겠는가.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민족과 나라를 독립시키자는 원대한 포부와 뜻도 함께 토론했음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리라.

한주 이진상은 59세이던 1876년 운양호 사건으로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자 망국의 징조를 느끼며 의병을 일으키려고 동지들을 규합하다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다. 실천적 성리학자 이진상은 조국의 안위를 잊은 적이 없었기에 그런 혼이 아들과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우국의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이승희와 함께 한주 문하의 큰 학자인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도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뒷날 장석영은 스승 한주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그의 높은 학문과 덕행을 유감없이 기술하여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