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字와 號의 차이[펌]

도솔산인 2015. 1. 27. 08:03

 

字와  號의 차이[펌]

 

□ 자()

()는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관례(冠禮:성인식) 때 성인이 되었다는 징표로 새로 지어주는 별명이다. 자의 사용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송나라 사유신(謝維新)의 ≪고금합벽사류비요(古今合璧事類備要)≫ 속집에 강숙(康叔)의 호칭이 문헌상으로 처음 나타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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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초기의 동기(銅器)에 나타나는 '영이'(令彛)라는 글자에 자로 추정되는 ''자가 쓰여진 것으로 보아 이미 주나라 초기에 자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명(本名)이 태어났을 때 부모에 의해 붙여지는 데 비해 자는 윗사람이 본인의 기호나 덕을 고려하여 붙이게 되며, 자가 생기면 본명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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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본명을 휘명(諱名:부르기를 삼가야 하는 이름)이라고도 한다(줄여서 ""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글을 아는 사람이면 성명 외에 자와 호()를 가졌는데, 이는 2가지 이상의 이름 가지기를 좋아하는 복명속(複名俗)이나 실제의 이름 부르기를 꺼리는 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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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윗사람에게는 자신을 실명으로 칭하지만 동년배 이하의 사람에게는 자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른 사람을 부를 때, 같은 또래나 아랫사람에게는 자를 불렀고, 임금·스승·부모가 신하·제자·자녀를 부를 때는 실명을 사용하였다. ≪논어(論語)≫에서 공자(孔子)는 제자 안연(顔淵)을 회(), 자공(子貢)을 사()라 부르고 있다.(顔淵의 "" "子貢"은 자임
)

≪예기(禮記)≫에 의하면 남자 20, 여자 15세가 되면 자가 붙는데, 여자의 자에는 자매의 순서를 나타내는 백()·중()·숙()·계()를 붙이고, 남자는 그 실명과 의미상 관련이 있는 자를 붙여 그 위에 백·중·숙·계나 자(:남자에 대한 미칭)를 붙이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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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본명을 구(),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는데 중()은 아우라는 뜻으로 공자에게는 형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지었고, ()는 그가 이산(尼山)에 기도를 드려 낳은 아들인 것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에서 여자는 자를 거의 가지지 않았고, 남자의 자에도 형제간의 차례를 나타내거나 같은 글자를 넣어 짓는 일이 흔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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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설총(薛聰)의 자가 총지(聰智)였던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자의 사용이 보편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설총과 동시대인이었던 원효(元曉)는 자가 없다. 어쨌거나 옛 문헌에서 실명이 아닌 자로 지칭한 사례가 많아 자를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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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
)

본명이나 자()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으로 아호(雅號)·별호(別號)라고도 한다. 이 역시 2종 이상의 이름을 가지는 풍속이나 본명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한국이나 중국 등 주로 동양에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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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호가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사대부·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 중국의 경우 호는 당나라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송나라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이태백(李太白)이나 송나라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본 이름인 이백(李白)이나 소식(蘇軾)보다도 호가 널리 알려진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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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호의 사용이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자들간에 학문적 교류와 편지 교환이 일반화되면서 본명보다는 호나 자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는 대부분이 거처하는 곳〔所處以號〕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뜻〔所志以號〕, 좋아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거처하는 곳이 바뀜에 따라 호가 달리 사용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물건이 여럿인 경우 호는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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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 종류에는 아호·당호(堂號)·택호(宅號)·시호(諡號) 등이 있는데, 아호는 문인·학자·화가·서예가 등이 풍아(風雅)한 취미로 즐겨 썼고, 당호는 본래 집의 호를 말한 것으로 그 집의 주인을 일컫기도 한다. 택호는 벼슬이름이나 출신지를 붙여 그 사람의 집을 부르고, 시호는 선왕의 공덕이나 재상·학자 등의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였고, 제자나 고향사람들이 지어 올리던 사시(私諡)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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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와 당호의 경우는 뚜렷한 구별이 없이 혼용되기 일쑤였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 이규보(李奎輔)의 경우는 초기에는 시·술·거문고 세 가지를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호하였다가 나중에는 구름에 묻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좋아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호를 바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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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후로 호의 사용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주로 자신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친 곳을 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황의 퇴계(退溪), 이이(李珥)의 율곡(栗谷), 서경덕(徐敬德)의 화담(花潭)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문인들을 지칭할 때도 퇴계문인·화담문인·율곡문인 등으로 호를 사용하였다. 성리학자 조식(曺植)의 호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용어로서 노장사상에 관심을 가진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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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조선 후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500여 개가 된다. 김정희가 많은 호를 사용한 것은 시·서·화에 두루 능하였던 예술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대표적인 호는 추사·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선객(仙客)·불노(佛奴)·방외도인(方外道人) 등으로서 유·불·도 삼교사상을 망라하는 호를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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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이래로 호 사전의 성격을 띤 많은 "호보(號譜)"들의 편찬은 호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해주고 있다. 1945년에 편찬된 ≪대동명가호보(大東名家號譜)≫에는 호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있는데, ()·암()·실() 등으로 끝나는 호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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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별로는 자신이 거주했던 곳이나 인연이 있었던 곳을 따서 지은 경우와, 인생관이나 수양목표를 한 경우, 완호물(玩好物)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주시경(周時經)의 ‘한힌샘’, 최현배(崔鉉培)의 ‘외솔’ 등의 호가 나타났으며,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김정식(金廷湜)의 소월(素月), 박영종(朴泳鍾)의 목월(木月) 등의 호도 우리에게 이름보다는 친숙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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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 이상백(李相佰)의 호 상백(想白)과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호 이호우(爾豪愚)는 이름과 호의 음을 같게 한 경우이다. 오늘날에는 사회체제가 다원화되면서 2종 이상을 쓰는 호보다는 자신의 실명(實名)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문학·예술 등 일부 분야에서 호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호를 통하여 당시 인물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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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hanshi.co.kr/jaho.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