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당신의 부재를 노래함

도솔산인 2015. 1. 6. 09:10

 

 

당신의 부재를 노래함

 

외로운 밤 찬 서재서 당신 그리오
정선용 엮음, 이미란 사진 / 일빛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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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선비들이 지은 한시들 중,

아내를 잃은 슬픔, 그 부재의 한을 읊은 시들을 모은 한시집이다.

 

저자의 아내는 사진찍기를 좋아하던 이였는데(사진이 참 똑 부러진다.) 사진 찍던 중 사망한다.

고전 번역을 하는 남편이 '아내의 부재'를 읊은 시들을 묶었다.

시들은 절절하게 슬프고, 흑백으로 엮인 사진은

시의 슬픔을

풀잎에 맺힌 이슬을 탈탈 털어내듯,

제 것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듯,

단정하면서 가지런한 빛으로 또렷하다.

 

사진 한 컷 한 컷이 마치 삶의 한 토막을 축소, 진하게 복사한 느낌이랄까?

 

아내 잃은 슬픔을 읊은 시는 많은데, 역으로 남편 잃은 슬픔을 읊은 시는 거의 없다.

이것은 조선조 양반 남녀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방증이리라.

조선조만 하더라도 질병에 취약하여 젊은 나이에 상부, 상처하는 일은 흔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쪽 문학만 가득한 것은...

문자를 장악하고 있던 편이 남자였음을 보여주며,

여자들은 남편없이 살아가는 것이 지옥도의 다른 그림이었음을 비스듬히 보여준다.

 

한편, 사랑과 관련된 시들도 3부에서 엮고 있는데,

이들 시편에는 이옥봉, 매창, 황진이 등의 여성들의 한시도 등장한다.

남자에게 보내는 애정은 어느 정도 기록에 남기도 했던 모양인데, 그들의 계층이 역시 기녀가 많다.

 

가을 밤은 어쩜 이리 쓸쓸도 한가

나의 마음 슬프고도 또 슬프다오

하얀 달은 휘장 사이 내려 비추고

찬 이슬은 잎새 가에 맺혀 있다오

수심 깊어 앉은 채로 잠 못 드는데

풀벌레는 벽 틈에서 칙칙 운다오

떠난 당신 그리워도 볼 수 없기에

외로운 밤 찬 서재서 당신 꿈꾸오

 

열여섯에 혼인한 아내를 열아홉에 잃은 월곡 오원의 '추소독좌 - 가을밤 홀로 앉아-'이다.

아내와 함께한 세 해의 가을 밤... 환한 달빛 안고 두런두런 즐거운 밤이었을 터인데...

이제 하얀 달이 커튼 사이로 비추인대도... 찬 이슬만 잎새 가에 맺힌 듯... 슬픔만 차오르고...

당신이 있던 때도 풀벌레는 울었으련만, 새삼 오늘밤 더 속시리게 들리는 것은...

떠난 당신 그리워도 볼 수 없음에 외로운 밤 찬 서재서 생각키는 건 당연지사...

 

어찌 나의 좋은 짝일 뿐이었으랴

좋은 벗을 얻은 거를 내 좋아했소

 

신광하의 '고실만 - 죽은 아내에게 드리는 만시-'다.

군자호구 君子好逑는 요조숙녀 窈窕淑女라

신사의 좋은 배필은 정숙한 아가씨라 했거늘,

시인은 아내를 양우 良友라 불렀다.

생활에서 그러했던가? 시에서 미화한 걸까?

 

낙엽이 진 텅 빈 산에 밤 서리가 내리리니

추운 까막 조각달은 한층은 더 황량하리

당신 생전 만들어둔 솜옷 입고 있으면서

추울 당신 생각자니 이내 간장 끊긴다오

 

아내의 죽음을 쓴 '悼亡 도망'이란 제목의 시가 많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슬퍼하여 쓴 시를 '도망'이라 한다.

평소 눈여겨 보지 않던 것도, 늘 잃고 나서 슬퍼하는 어리석은 동물이 인간이다.

있을 때 잘할 노릇이다.

 

님께 소식 오랫동안 전하지 못해

이내 마음 헝클어진 실타래 같네

 

그나마 살아있는 이들의 노래는 절절해도 애절하진 않다.

희망이란 어리석은 녀석이 판도라의 상자 안에서 인간을 유혹하기 때문인지...

그 녀석은 왜 '온갖 질병, 죄악...'들과 동격인 것이냐...

희망이란 녀석 역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긴 마찬가지이긴 매일반일 것인가?

 

황진이의 '상사몽'이나 이옥봉의 '몽혼'은 워낙 유명한 노래들이고,

이매창의 '규원'의 가락지 비유도 절창이다.

 

애타는 맘 말이 없는 가운데 다 들었거니

하룻밤의 시름으로 머리가 다 세었네요

그리움에 사무친 이 소첩의 맘 알려거든

제 손에 낀 가락지가 헐렁한 걸 보시어요

 

연애편지도 이 정도면... 예술이다. ㅎㅎ

 

앞으로는 문 앞에다 부디 버들 심지 마소

인간 세상 이별 있게 하는 것이 얄밉다오

 

버들잎이 왜 이별의 정조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것은 버들 류(柳)의 음과 머물 류(留)의 음이 같은 데서 인유한 언어 유희의 일종이다.

선비들이 쪽팔리게 '내 곁에 있어 주.'하고 표현하는 직설법은 시적이지 못하다고 여겨,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 놓고, 말 없이 바라보는... 이름 모를 소녀... 정도 되면,

그걸 알아 먹어라, 이 맹추야~ 이런 적나라한 표현이다.

 

무식한 이야기 중에, 뭐 이성계가 바가지에 물 한 사발 달랬더니,

어떤 아가씨가 물 마시다 체하지 말라고 버들잎을 띄워 줬다는 말이 닿지도 않는 소릴 하는데...

버들잎 띄우기는 시쳇말로 '드러내놓고 들이대는 찐한 프러포즈'의 다른 말이었다.

 

동산에는 볼가 살구 꽃 피었건만

올해에도 좋은 경치 그냥 보내네

 

여자들이 꽃구경을 가는 일은 흔치 않아서,

남편과 함께 나서는 길이라야 인정받기도 했던 바,

좋은 경치를 그냥 놓치는 일은 임의 부재의 동의어다.

허 난설헌도, 규원가에서 '삼춘화류 호시절에 경물이 시름없다'고 했으니...

아무리 꽃피고 버들잎(또 나온다 ㅋ 들이대는 프러포즈) 돋는 봄이 와도,

임이 없으면 경치 구경이 덧없다는 뜻.

 

좋은 것을 보면 같이 보고 싶고,

맛있는 걸 먹으면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의 부재로 허전한 맘... 그걸 옛사람들의 시에선

간결한 한자어로 표현해 더 애절하다.

 

그렇지만 기다려도 오지 않는 문자는

기다리는 이에게 저주의 신기술이라지만...

기다리는 이는 자못 나름의 정신적 위안을 찾아 나가야 하리라.

 

잃고 나서 잊지 못해 '자기를 잊고 나아가 자기를 잃는' 지경까지 나아가지 않으려면,

나름의 정신적 승리법도 필요하리라.

 

이 책은 그런 정신적 승리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달이 뜨면 오마하고 약속하신 님

달 떴는데 우리 님은 아니 오시네

생각건대 낭군님이 계신 그곳은

산 높아서 달이 늦게 떠서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