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고전산문 356] 이해하면 사랑한다

도솔산인 2015. 1. 5. 15:44

 

[고전산문 356] 이해하면 사랑한다

 

[번역문]

세상의 모질고 무식한 이들은 처자를 사랑할 줄은 알면서 부모를 잊곤 한다.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처자와 나누면서 집에 계신 부모는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해도 유념하지 않는다. 이러고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까마귀는 미물인데도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 지금 사람들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아 효도하고 봉양하는 도리에 힘쓰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패악한 말까지 하니, 이는 새만도 못한 것이다. 슬픈 일이 아닌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식을 키워 봐야 부모의 은혜를 안다.” 하였다. 지금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자식 사랑할 줄은 알지만, 이를 돌이켜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처자만 먹일 줄 알고 부모는 춥고 굶주려도 내버려둔다. 자식이 부모를 섬길 적에 먹고 입는 것을 넉넉하게 해 드리더라도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지 못하면 불효가 되거늘, 하물며 의복과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마저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3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문] 

世間冥頑無識之類, 或私其妻子而忘其父母, 凡得可衣可食之物, 必與妻子共之, 父母在堂, 不免飢寒, 而莫之顧念, 此可謂人乎. 慈烏微物也, 而能有反哺之誠, 今之人不思父母之恩, 不勉孝養之道, 甚至於違拂其心, 加以悖辭, 是乃禽鳥之不若, 豈不可哀哉. 古語曰, 養子方知父母恩, 今雖至愚之人, 莫不知愛其子, 而能以此反思父母之恩者或鮮, 徒知呴哺其妻子, 乃忍寒餓其父母. 凡子事父母之道, 雖或厚其衣食, 不能承順其心, 猶爲不孝, 况幷其衣食供奉而不能致誠者乎. 罪列三千, 不孝爲大, 豈不可懼哉.

- 조유선(趙有善, 1731~1809), 「고을 백성 이흥찬 형제에게 타이르는 글[諭郡民李興贊兄弟]」, 『나산집(蘿山集)』 권8

 

1795년 조유선이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있을 때 지은 글이다. 조유선은 고을 백성 이흥찬 형제가 아비에게 불효한 짓을 하고 재산 싸움을 벌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사는 마을로 직접 찾아가서 잡아들이고는 이 글을 지어 타일렀다.

 

옛사람들은 까마귀가 다 자라면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줌으로써 어릴 적에 먹여 준 은혜를 갚는다고 여겼다. 이른바 ‘반포지효(反哺之孝)’이다. 되돌려 먹여 주는 효도라는 말이다. 반포지효를 거론한 이유는 효도가 인간이 만들어 낸 인위적 규범이 아닌, 영구불변한 자연법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 따위의 윤리 규범이 자연법칙에 준거를 두고 있다는 것은 유교의 오랜 관념이다. 호랑이는 아비와 자식 사이가 각별하니 이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요, 벌과 개미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니 이는 군신유의(君臣有義)이며, 원앙은 일부일처를 고집하니 이는 부부유별(夫婦有別)이다. 또 수달은 잡은 물고기를 늘어놓고 제사를 지내니 이는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이요, 까마귀는 낳아준 어미를 먹여 주니 이는 부모에 대한 효도이다. 이처럼 여러 동물에게서 관찰되는 도덕적 면모는 유교적 윤리 규범이 자연의 법칙임을 증명하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이 모든 윤리 규범을 본성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유학자들의 주장이다.

 

유교적 윤리 규범이 자연의 법칙이자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장은 옛사람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추론한 결과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찰과 추론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다. 호랑이는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더 이상 정을 주지 않는다. 이 점은 다른 짐승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벌과 개미가 여왕을 중심으로 군집 생활을 하는 이유는 충성심 때문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부부 금슬의 상징인 원앙은 사실 방탕한 바람둥이이다. 수컷 원앙은 짝짓기를 마치면 곧바로 다른 암컷을 찾는다. 수달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반포지효 역시 효도와는 무관하다. 생물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반포지효는 비대해진 새끼를 먹이느라 피골이 상접한 어미 까마귀를 새끼로 착각하거나, 사회성이 발달한 까마귀가 먹이를 나누어 먹는 현상을 오해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호랑이에게는 부자유친이 없고, 벌과 개미에게는 군신유의가 없고, 원앙에게는 부부유별이 없다. 수달은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까마귀는 효도를 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면, 호랑이처럼 장성한 자녀와는 관계를 끊고, 원앙처럼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며, 수달처럼 욕심을 부리고, 까마귀처럼 불효해야 한다. 그리고 벌과 개미처럼 죽을 때까지 사회의 부속품으로 소모되다가 버려져야 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에 충실한 삶이다.

 

유교에서는 효를 모든 행위의 근원[孝者百行之源]이라 하였다. 그러나 효는 자연의 법칙도 아니며 인간의 본성도 아니다. 인간을 제외하면 지구상의 그 어떤 존재도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이 효도를 당연한 윤리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효는 국가를 가족의 확장체로 간주하고, 그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낸 유교 이념의 산물이다. 효는 철저히 문화적인 산물이다. 이 점은 효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본성에 순응하여 효를 버려야 하는가.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별개로 보는 이 사회에서 효는 더 이상 모든 행위의 근원이 될 수 없는 것인가. 필자는 윗글에서 ‘자식을 키워 봐야 부모의 은혜를 안다.’는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키워 봐야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되는 이유는 부모의 입장이 되어야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지만,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하다. 사랑은 상대방을 나와 같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한 사람의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효라면, 효는 여전히 모든 행위의 근원이다.


 

장유승

글쓴이 : 장유승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 주요저역서
    - 『일일공부』, 민음사, 2014
    - 『동아시아의 문헌교류 - 16~18세기 한중일 서적의 전파와 수용』, 소명출판, 2014(공저)
    -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글항아리, 2013(단독)
    - 『정조어찰첩』, 성균관대 출판부, 2009(공역)
    - 『소문사설 - 조선의 실용지식 연구노트』, 휴머니스트, 2011(공역)
    - 『승정원일기』(공역), 『월정집』(공역) 등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