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함허정(涵虛亭)[펌]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32권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편에 “함허정(涵虛亭)은 연자루 북쪽에 있으며 부사 최윤신(崔潤身)이 건축한 것으로 되어있다. 호계(虎溪)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그 복판에 정자를 지었는데 매우 조촐하고 시원하다”라고 기록되어있다 (註: 전라도 곡성과 경상도 함양소재 同名의 함허정과 다름).
1497년에 지은 함허정은 당시 좌의정 어세겸(魚世謙)이 명명하였으며, 탁영(濯纓,김일손)이 함허정기(咸虛亭記)를 지었다.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重建되었고 남명(南冥.曺植)선생의 記文과 多數人의 詩가 邑誌에 실려 있다. 왜정 때 불교 사찰로 바뀐 후 현재는 연화사(蓮華寺)로서 정자는 없어지고 사찰경내에 涵虛橋와 八角주춧돌 1개만이 옛 함허정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아! 400년간 건재하였던 옛 亭子는 없어지고 절차탁마와 음풍영월(吟風詠月)하던 人士들도 떠나고 다만 그들의 문장만이 산재(散在)해 있을 뿐이다.
함허정기(涵虛亭記)/김일손(金馹孫),속동문선14권 (고전번역원 번역문 전재)
김해(金海)는 옛 나라이었으므로 기적(奇迹)이 많았다. 이제 부사(府使) 최후(崔侯)가 일에 재능이 있어 이미 연자루(燕子樓)를 새로 꾸며 무릇 옛 나라의 문물(文物)을 빛나게 꾸밀 수 있는 일을 그 극치에 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 누의 북쪽 파사탑(婆娑塔) 남쪽에 모 나는 못을 파고는 호계(虎溪)의 물을 이끌어서 가두고는 가도(假島)를 물속에 쌓아서 점대(漸臺)를 삼고 그 위에 집을 세워 띠 이엉을 하여 정자를 짓고는 물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아 고기도 기르고 연도 심고 또 물새와 해오라기와 교청(鵁鶄)의 무리를 길러 떴다 잠겼다 하게하고, 또 작은 배에 기악(妓樂)을 실어 중류에 띄우고, 닻 노래를 불러 능파곡(凌波曲)을 지었었다. 최후(崔侯)가 늘 빈객을 맞이하여 기쁘게 술을 마시려고 수레를 멎게 되면 사람들이 바라보매 마치 수선(水仙)인 듯하였다.
거울 낯이 맑고 평평하고 곱게 쭈구럼이 끼이고, 누관(樓觀)과 성곽(城郭), 멧부리와 수풀, 일성(日星)과 운물(雲物)이 그 가운데에 그림자가 거꾸로 잠기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넓이는 반 이랑에 지나지 않으나 물이 멎고 어리어 태공에 혼합되었다. 최후가 좌상(左相) 어공(魚公,어세겸)에게 이름을 청했더니, 어공이 함허(涵虛)라 명명(命名) 하였다. 홍치(弘治) 무오년 5월에 내 이미 면상(免喪)을 하고는 도주(道州)로부터 할아버지 묘소를 수축하러 와서 잠시 묘소 곁 별서(別墅)에서 쉬었다. 최후가 나를 찾아와 이내 나를 맞이하여 성에 들어가서 그 이른바 함허정(涵虛亭)을 구경시키고 기문을 쓰라 하였다.
내 늙고 병든 나머지 세상살이가 지루하여 산관(山冠) 야복(野服)으로 강호(江湖)에 유유자적하였으므로, 스스로 성시(城市)를 싫어하고 문장이 간삽함으로 사양을 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최후에게 멀리 기록하기를 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대체로 물의 성품은 함께 흘러도 막힘이 없으나, 그 본체는 애초에 허하였다. 허하였으므로 능히 물건이 잠길 수 있는 것이니, 만일에 장마 탁류가 되면 뜬 어저귀가 그 흘러내리는 것을 가로막고 있어 본성을 저해할 것이니, 어찌 이렇게 물건을 잠글 수 있겠는가. 대체 사람의 한 마음을 쓰면 움직임이 무궁하고 갈아 앉으면 고요히 허한 것이니, 허하므로 오덕(五德)을 갖추고 만물이 포함되어 저 천지와 일월이 모두 나의 마음속의 물건이 되는 것이다. 만일에 한 번 사사로운 생각이 있어서 그 마음에 들면 그 본체의 험함을 잃고 만사의 운용을 못하여 그 마음에 응하여 정사에 미치는 것이 오하(汚下)한 것 아님이 없을 것이다. 공사가 끝나고 아전이 흩어진 뒤에 뭇 지꺼림이 가라앉으매, 건(巾)을 기울게 얹고 정자에 오르면 바람과 달이 함께 밝았으니, 물이 허함을 잠겼던가, 허함이 물을 잠겼던가. 어공의 명명한 것이 이에 비로소 알맞고 최후가 이를 즐겨함 역시 그 범류(凡流)가 아니었음을 알겠다.
청하건대, 최후는 묵묵히 앉아서 정관(靜觀)을 하되 그 마음을 밝히고 그 생각을 가라앉혀서 본체의 허함을 구한다면, 약간의 찌꺼기가 있다 하더라도 능히 나의 흉금을 더럽힐 수 없을 것이요, 이로 말미암아 공중에 나는 솔개와 소에 잠긴 고기의 묘한 진리가 역시 이회(理會)될 수 있을 것이요, 만일에 그 청허적(淸虛的)인 문장을 힘써서 지나치는 손님에게 칭찬을 받는다면 이는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리라. 내 늙고 병이 들었으니, 어찌 능히 한 번 물 허함을 비기어 천광(天光) 운영(雲影)이 배회(徘徊)함을 보고서 그 밝음을 웅켜서 활수(活水)의 근원을 찾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그 함허(涵虛)하는 경개를 써서 최후에서 돌리노라. 최후의 이름은 아무요, 자는 아무요, 아무 고을에 사는 선비이다. 그의 가세(家世)가 나와 친분이 있고 또 시골에 와서 원이 되었으니, 그 정의로 보아서 역시 기록하지 않을 수 없어라.
涵虛亭, 南冥先生集卷之一 (번역문은 남명학연구소刊 남명집 인용)
蜃騰蛟屋燕無樑。虛箇涵來見直方。傑閣專南謾好大。老虬分北剩風霜。
棠華館裏笙歌咽。王母池邊河漢凉。殘落生涯寒落水。欲將埋恨引杯長。
신기루처럼 솟은 교룡의 집 들보엔 제비 없는데,텅 빈것 머금어야 곧고 바름을 볼 수 있다네. 남쪽에 이름난 크고 좋은 집이요, 늙은 솔이 북쪽맡아 바람과 서리 많도다. 우애 좋은 집엔 풍악소리도 그쳤고, 서왕모의 못가엔 은하수가 서늘하네. 쓸쓸한 생애는 줄어든 차가운 물과 같기에,한을 묻어버리고자 잔 길게 끌어당긴다.
출처 : 김해허씨 대종회(http://cafe.daum.net/K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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