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352] 조선 최악의 해상 사고
[번역문]
전남 우수사 이익달(李益達)이 각 고을의 군함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 훈련을 하는데, 거센 비바람이 일어나 금성, 영암, 무장, 함평, 강진, 부안, 진도 등 고을의 군함이 모두 침몰하였다. 사망한 수군이 1천여 명이었고 진도 군수 이태형(李泰亨)도 물에 빠져 죽었다. 관찰사가 아뢰자 임금이 하교하였다.
“지금 이 보고를 받으니 온종일 참담하여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전라도 관찰사에게 특별히 진휼을 시행하게 하고, 우수사 이익달과 우후(虞候) 신숙(辛淑)은 모두 잡아와 국문하라.”
[원문]
全南右水使李益達率各邑戰舡, 下海水操之際, 風雨大作, 錦城靈嚴茂長咸平康津扶安珍島等邑戰舡皆漂沒, 水卒死者千餘人, 珍島郡守李泰享亦渰死. 道臣以聞, 上下敎曰, 今聞此報, 終日慘然, 無以爲懷. 令本道特施恤典, 水使李益達虞候辛淑, 竝拿鞫.
- 『효종실록(孝宗實錄)』 7년 8월 27일
1656년(효종7)에 일어난 조선 최악의 해상 사고에 대한 기록이다. 전라도 앞바다에서 실시된 대규모 군사 훈련 도중 갑자기 풍랑이 몰아닥쳐 수많은 군함이 침몰하였다. 이때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은 군사가 무려 1천 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단일 사고의 희생자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사고 당시 함대를 통솔한 이익달은 1644년(인조22) 무과에 장원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몇 고을의 수령을 거쳐 1656년 전라 우수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별다른 이력도 없는 그를 우수사로 임명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체직을 요구하였다. 이익달은 고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던 형편없는 인물인데, 갑자기 우수사에 임명되어 여론이 놀라워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헌부의 체직 요구는 한 달이 넘도록 이어졌으나 효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 일단 보내서 시험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험의 댓가는 너무도 컸다. 이익달이 부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이 좌수사에 임명되었을 때도 말이 많았으니, 이익달에 대한 비난이 과연 온당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날씨란 본디 예측할 수 없는 법이고 군사 훈련은 위험 부담을 안고 있기 마련이니, 이익달에게 사고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고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훈련 일자가 다가오자 이익달의 부하들은 날씨가 심상치 않다며 훈련을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하지만 이익달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훈련 시작 하루 전에 모든 전함을 출항시켜 바다 위에서 대기하게 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에 풍랑이 몰아닥쳤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풍랑을 만난 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참사가 커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결국, 효종은 이익달에게 참사의 책임을 물어 무기한 변방 정배의 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참사가 일어난 지 2년도 못 되어 이익달에 대한 사면 복권 논의가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1658년(효종9) 11월,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의 건의로 이익달은 직첩(職牒)을 환급받는다. 직첩을 환급받는다는 것은 언제든 관직에 임명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인 출신으로서 능력 있는 무신의 부족을 염려한 원두표의 판단이었다. 요컨대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이익달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익달의 복권 시도는 곧장 반대에 부딪혔다. 1천여 명이 희생된 참사의 책임자를 함부로 복권시킬 수 없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교리 이시술(李時術)은 경연 석상에서 자기가 사고 해역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였다. 그곳 백성은 “반드시 이익달의 고기를 먹어야 통쾌하겠다.”라고 하며 여전히 분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간원에서도 공식적으로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다. 효종은 “직첩을 환급하는 것은 서용하는 것과는 다르다.”며 논란을 피해가려 하였으나 집요한 여론에 손을 들고 말았다. 효종은 끝내 이익달을 기용하지 못했다.
1659년(현종 즉위년), 이익달은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또다시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체직되고 말았다. 2년 뒤 창주 첨사(昌州僉使)에 임명되었을 때도 여론의 반대는 여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사고 당시 술에 취해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익달은 1664년(현종5)에 이르러서야 겨우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스스로 일을 그르쳤다. 실록에 따르면 이익달은 임지에서 여종과 간통하였다가 병을 얻어 공무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이것이 이익달에 대한 실록의 마지막 기록이다.
참사가 난 지 180여 년이 지난 1840년경, 한 선비가 조인영(趙寅永)을 찾아왔다. 선비는 자기 선조의 문집이라며 책 한 권을 꺼내더니 서문을 청하였다. 《절도공유고(節度公遺稿)》, 다름 아닌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익달의 문집이었다. 저간의 사정을 알 리 없던 조인영은 문집을 대략 살펴보고 서문을 써 주었다.
공은 인조, 효종 연간의 불행한 명신(名臣)이었다. 당시 나라의 치욕을 씻지 못하고 천하의 일이 결판나지 않았는데, 서북 지역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갈수록 심해져 나라에서는 재주와 용기를 갖춘 무신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붓을 버리고 활을 잡고는 강개한 마음으로 반초(班超 후한의 장군)와 종각(宗愨 남조 송의 장군)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그러나 일은 이미 어긋났으니, 이야말로 불행이 아니겠는가.
몇 편 남지 않은 글 중에 효종에게 올린 상소가 있는데, “청나라에 받은 치욕은 회계(會稽)의 치욕보다 더합니다.”라고 하였다.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의로운 선비의 눈물을 흘리게 할 만하니, 이것이 바로 효종께서 뜻하신 바를 계발한 말이다.
김좌명(金佐明)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호남의 공물 액수가 호서에 비해 유난히 무겁다고 논하였는데, 서글프고 간절하며 모두 시의에 맞았다. 평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품은 자도 여기에 미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선왕께서 그를 일으켜 세워 나라의 간성(干城)과 복심(腹心)으로 삼은 것이 마땅하다. 공도 이로 인해 스스로를 드러내었으니, 다행이라고 하여도 될 것이다. 그러나 논의와 사업을 끝내 시행하지 못하여 성명은 역사가에 의해 일컬어지지 않고 후손은 영락하여 일어나지 못하니, 참으로 심한 불행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군복을 입은 군자’라고 하였는데, 나는 공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하겠다.
- 조인영(趙寅永), 「절도사 이공 유고의 서문(節度使李公遺稿序)」, 『운석유고(雲石遺稿)』 권9
『절도공유고』가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효종에게 올렸다는 상소도, 김좌명에게 보냈다는 편지도 후세의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것도 모른 채 관례대로 서문을 써준 조인영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인영이 누구인가. 풍양 조씨 세도 정권의 핵심으로 영의정과 대제학을 역임한 인물이 아닌가. 조인영의 서문 덕택에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낸 참사의 원흉은 효종과 의기투합하여 북벌을 꿈꾼 명신으로 탈바꿈하였다.
이익달의 복권을 추진한 것은 국가안보라는 명분이었으며, 이익달의 죄과를 감춘 것은 대명의리라는 이념이었다. 명분과 이념은 책임을 피하고 진실을 감추는 수단으로 이용되곤 한다. 조선 최악의 해상 사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글쓴이 : 장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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