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고전산문 351] 면신례(免新禮)의 폐단

도솔산인 2014. 12. 4. 10:51

면신례(免新禮)의 폐단

 

[번역문]

사대부가 출신(出身)하여 군주를 섬기는 것은 이익을 얻고 녹봉을 받기 위한 계책만은 아니니, 선배들이 후배를 처음 맞이할 때는 읍하고 겸양하며 자리에 오르게 하여 예우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근래 세상 풍속이 저속하고 투박해지다 보니 여러 관청에 처음 배속된 관원이 있으면 벌례(罰禮) 또는 면신(免新)이라는 명목으로 술과 고기를 요구합니다. 그러고는 모여서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는데, 어떻게든 음식의 가짓수와 그릇 수를 더욱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요구하려고 힘을 씁니다. 처음 관청에 들어왔을 때 그로 인한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던 사람도 정작 후배가 들어오면 자신이 당했던 일을 또 후배에게 반복하곤 합니다. 사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교서관ㆍ승문원)과 내삼청(內三廳)에 이러한 병폐가 가장 극심하지만, 미루어 올라가면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심지어 술과 고깃값으로 은자(銀子)와 포(布)를 대신 바치는 경우까지 있으니, 이 어찌 벼슬아치들의 수치가 아니겠으며, 더러운 습속이 아니겠습니까.

 

사대부들이 이런 짓을 하기 때문에 서리(胥吏)와 하인배들도 잘못된 관행을 따라 해서 그 폐단이 끝이 없으니, 탐오한 풍속이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관행이 오래되어 당연하게 여기고 괴이하게 생각할 줄을 모르니, 만약 단호하게 금하지 않는다면 묵은 폐단을 씻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서울 안의 여러 관청에 새로 들어온 관원에 대한 면신례나 벌례 등의 일을 일체 금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뇌물을 받은 죄로 논하여 예의와 겸양의 풍속을 일으키소서.

 

[원문]

凡士大夫出身事君, 非但爲圖利祿之計, 先進之引後輩, 固宜揖讓而升之, 先示以禮敬之道可也. 近自世衰俗偸以來, 諸各司若有初入之官, 則或稱罰禮, 或稱免新, 責徵酒肉, 相會醉飽, 饌品器數, 益務豐侈. 身爲初入者, 不勝侵困, 而及得後來則且復如前. 文官之四館, 武官之內三廳, 此獘尤酷, 而推而上之, 無處不然. 至有代納銀布, 以當酒肉之債, 此豈非衣冠之羞辱, 而習俗之穢濁乎? 士大夫旣有此事, 故至於胥吏皁隸, 從而效尤, 罔有紀極, 貪汚之風, 未必不由於此. 此事行之旣久, 恬不知怪, 苟不痛加禁斷, 無以滌其舊染. 請京中諸各司新入之官免新罰禮等事, 一切禁斷, 如有所犯, 以受賂論, 以興禮讓之風.

 

-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청금면신벌례계(請禁免新罰禮啓)」, 『약천집(藥泉集)』

 

1664년(현종5) 대사간 남구만이 관원의 면신례를 금지시키기를 청한 글이다.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 벼슬에 임명되어 처음 출사(出仕)하는 사람을 ‘신래(新來)’라고 하였는데, 신래가 실질적으로 해당 관청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윗글에서 말한 면신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이는 신입 관원이 선배 관원들에게 행하는 일종의 신고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처음 만나는 선후배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해당 관료 집단의 화목을 도울 수 있는 일종의 통과 의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성을 띠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동반하는 데 있었다.

 

이에 대해 성종 때 성현(成俔)은 새로 문과에 등과한 선비의 지나친 호기(豪氣)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려는 데서 면신례가 나오게 되었다고 그 유래를 분석하였다. 처음 벼슬하는 사람의 오만방자함을 막고 선후배의 위상을 엄격히 해서 조직 생활에 순응하게 하려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또 율곡 이이(李珥)는 고려 말 부패한 과거(科擧) 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였다. 즉 과거 제도가 부패하여 젖내 나는 귀족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선배들이 나이 어린 급제자를 골탕 먹이려고 했던 것이 면신례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면신례가 서열과 위계를 중시하는 관료 집단에서 선배가 신입 관원을 길들이는 도구로 이용된 것은 분명하다. 이를 명분으로 새로 출사하는 관원에게 참기 어려운 모욕과 학대를 가하였던 데서 ‘신래침학(新來侵虐)’ 또는 ‘신래 불림’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새로 배속된 관원에게 진귀한 음식을 강요하고, 흡족하지 않을 경우에는 한 달이 넘도록 동좌(同坐)를 허락하지 않는가 하면, 너나없이 기악(妓樂)을 갖춘 술자리를 요구하여 파산하는 사람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어렵게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 선비가 겪어야 했던 굴욕과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이런 관행은 대과 급제자 외에도 하급 무관이나 하례들에게까지 파급되었고, 그 폐단이 도를 넘어 국가에서 금지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래 침탈을 금지하는 규정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못된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선 시대에 줄곧 제기되었다. 윗글을 지은 남구만은 20년 후인 숙종 때도 병조 판서로서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였으니, 면신례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고질적인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관료 사회에 이처럼 저급한 관행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새로 벼슬길에 오른 사람은 기존 집단의 요구를 거부할 힘이 없다 치더라도, 자신이 선배가 된 뒤에는 의지만 있다면 잘못된 관행을 단절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부당한 관행을 답습하여 후배를 길들이려 했던 것은 내가 당했던 고통을 누군가에게 되갚아주려는 보상심리였을까? 아니면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관행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어 버린 것일까?

 

이와 같은 기존 세력의 텃세 부림은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 많이 나타난다. 전통사회에서 새로 시집간 며느리가 시집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기까지 겪어야 했던 호된 시집살이가 그 예가 될 것이다. 현시점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문제가 불거지는 군대 폭력일 듯하다. 고참 병사가 신참 병사를 가혹하게 괴롭히거나 지속적으로 폭행한 극단적인 사건들을 접할 때면 조선 시대의 면신례가 떠오른다. 서열을 중시하는 폐쇄적인 집단에서의 후배 길들이기 관행이 대물림된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최근 연속적으로 터져 나온 대형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군대 폭력의 가해자는 일찍이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병사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 신래는 심한 모욕과 경제적 침탈을 견뎌 내면 관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라도 있었다. 반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입대한 우리 장병들은 힘겹게 보낸 신참 기간을 보상받기 힘들다. 인권은 물론이고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잔혹성은 면신례의 관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이다. 계급을 중시하는 병영의 특성을 백번 고려하더라도, 고참 병사가 되었을 때는 의지만 있다면 폭력의 관행을 끊어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내가 신참 때 당했던 것을 후배에게 갚아 줘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여기에서도 작동하는 것일까? 아니면 군대라는 조직 자체가 폭력의 관행을 대물림하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이런 악습의 고리를 끊을 열쇠는 조직에 있는 것일까, 구성원들에게 있는 것일까?


조순희 글쓴이 : 조순희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역서
    - 『홍재전서』, 『국조보감』,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번역에 참여
    - 『국역 기언 5』,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명재유고12』,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허백당집3ㆍ4』, 한국고전번역원, 2011~2012
    - 『국역 회재집』, 한국고전번역원, 2013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