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碧鳥逾白 山靑花欲燃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강물이 파라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 빛은 불붙는 듯하다.
올 봄도 건듯 또 지나가니, 어느 날 내 돌아 갈 해인가?
두보(712~770): 자는 자미(子美),양양(襄陽:호북성 양번)사람이다. 두말이 필요 없는 당대 최고 시인이다. 하지만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 자체라 할 밖에 표현 할 수없으며 일시 실세의 후원으로 안락한 생활도 했으나 그것도 잠시, 말년에는 장강일대를 유랑하다 5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그는 당대 사회시의 개척자로 그의 시를 시사(詩史)라 한기도 한다. 그는 유가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상의 소유자로서 시에도 그의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며, 특히 안록산의 난으로 도탄에 빠진 동포의 참상이 그의 시 정신을 격발시켜 시를 통해 현실의 비참한 실상과 그에 맞물린 참담한 개인사를 반영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했으며, 그로인해 시풍도 자연 침울, 비장해 졌다. 해서인지 시율의 구속을 싫어했던 이백과는 달리 그는 한자 한자를 심사숙고하여 엄격한 규칙 하에 시를 썼다. 하여 그의 시는 고전시의 전범이라 할 수 있고 작품집으로 “杜工部集”이 있다.
아시다시피 두보는 시성(詩聖)이라 칭하는, 즉 유가적(儒家的) 견지에서 시를 썼던 바, 조선시대에는 국시(國是)와 그 궤를 같이 하던 바이였음으로 인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그의 시가 언문(한글)으로 번역되어 일반백성에게 널리 읽혔던 바이다. 하면 두보가 왜 유가적(儒家的)인가 하는 사안은 두보의 시에서도 우국충정과 애민사상을 엿 볼 수 있지만 그의 가계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조상 중에는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로 공자의 춘추(春秋)를 해석함에 있어 공양학파(公羊學派)와 곡량학파(穀梁學派)에 상대하여 좌씨학파(左氏學派)를 정통의 반석위에 올리고 현재 까지도 춘추(春秋)의 가장 기본적인 해석본으로 인정하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진(晉)의 대학자 두예(杜預)가 바로 그의 직계이다.
이런 명문가에서 태어난 두보지만 그의 생애는 전술하였듯 대단히 불우하였다.
그가 죽음에 이른 경우를 보드라도 말년의 두보는 옛 지인들의 임지로 찾아가서는 거의 기생하다시피한 생활로 하루하루 연명하다 임지가 바뀐 친구를 찾아 장강을 오르내리다 친구의 임지 바로 목전에서 홍수를 만나 강을 건너지 못해 몇 날 몇 칠을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 굶어죽기 일보직전 간신히 강을 건너 친구를 만났으나 굶주린 배로 들어간 갑작스런 기름진 음식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는 정말 눈물겨운 삶을 산 시인이다.
위의 시 절구에서도 그의 아웃사이더로서의 처량한 신세를 엿볼 수 있는데, 1연과 2 연에서 보여준 절묘한 댓 구, 江과 山, 碧과 靑, 鳥와 花, 白과 然(燃)는 그의 사실주의 자연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는데, 3연 전개에 와서는 그의 처량한 신세로 분위기를 확 바꿔버린다. 看은 ‘보다. 보이다. 뵈다.’ 라는 타동사이다. 본다. 보았다. 라고 하는 목적어를 가지는 자동사가 아닌 것이다.
봄을, 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봄을 시인은 마냥 보기만 할 뿐이다. 봄 속에 녹아들어 봄을 만끽하는 그런 주동적이고 주체적이며 역동성 있는 삶의 주인공이 아닌 피동적이고 객관자 입장인 아웃사이더로서의 시인인 것이다.
그리고 又 그런 봄이 아웃사이더로서의 그냥 흘려보낸 봄이, 이번 한번만이 아닌 여러 번인 또! 인 것이다. 참으로 처량하다 못해 처연해 지는 시인의 신세이다.
마지막 결구에선 결국은 참을 수 없는 처연함에 눈물까지 보일 수밖에 없는 쓸쓸하고도 막막함이다. 결국은 옛날의 그 역동적이고 주체적인 찬란한 봄을 다시 맞을 그런 희망은 전혀 기약 할 수 없는 이 안타까운 처지에 대한 시인의 통절한 신세 한탄인 것이다.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manyooin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