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지산유고 창의일기를 좇아서

도솔산인 2007. 4. 10. 17:06

지산유고의 기록을 좇아서

 

▶丙申年(1896년) 二月 二十二日
 二十二日 還至錦川
 이월 이십이일 錦川(금천)으로 돌아왔다.

 

 

 2007년 4월 8일(음력 2월 21일) 나는 111년 만에 금산 창의 의병 본진이 있던 天卓山(천탁산) 아래 錦川(상주시 화서면 금산리)을 찾았다.

 軍威 義興縣 羅湖洞에서 1889년 겨울 37세에 상주 錦川(금천)으로 移居한 후 錦樵山人(금초산인)이라 스스로 일컫고 은거하였던 곳이다. 1894년(42세) 동학도들의 창궐이 점점 심하여지자 인근 7개동이 錦川洞約을 맺어 인근의 사족들과 天卓山으로 들어가 성을 쌓고 동학의 피해를 없게 하였으며, 1895년(乙未)에 鄭宜默 召募使로부터 참모 제의를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丙申年(1896년) 四月 初四日
 初四日 與二侄裝束將歸 只一空褓短杖而已 緩步下山之際 忽有 聲四起 必是敵兵來 追義陣不可以已 辭而恬然獨退四視 陣處將卒 皆登山矣 往餞于葛嶺而還


 사월 초사일 두 명의 조카와 옷차림을 하고 장차 돌아가려 하였는데 다만 빈 봇짐에 短杖(단장)뿐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산을 내려올 때에 문득(갑자기) 총성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있었다. 필시 적병이 와서 義陣(의진)을 추격한 것은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인사를 하고 편안하게 홀로 물러나 사방을 둘러보니 진을 친 곳에서 將卒(장졸)들이 다 산을 오르고 있었다. 葛嶺(갈령)에 가서 전별을 하고 錦川으로 돌아왔다.

 

·裝束:옷차림을 하고 띠를 매다. 몸을 꾸며 차림. 몸차림.
·恬然:마음이 아주 평안한 모양. 마음이 아무런 생각도 없는 상태.
·已:용서하지않을이

                                                                                            -지산유고 창의일기 중-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의병 본진이 있던 錦川이다. 

화령 의병 본진이 있던 천탁산 아래 금천(현재의 행정지명이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3년 전 금천을 방문하였을 때 이곳이 진주 강씨 집성촌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나와 12촌 되는 분이 살고 있었다. 마을 촌로를 찾아 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 집안의 이야기를 소상히 알고 있었고 바로 촌로의 집이 전주이씨가 살던 집이라는 말을 들으니 헛걸음은 아니었다.

 나의 증조비 택호가 錦川인 것으로 미루어 이곳이 증조모의 친정이고, 이 마을 사람들은 찬획 姜懋馨의 후손(?)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四日
 二十四日 入報恩馬充 摘發本邑探吏梁哥 縛置軍中 送梁中軍於靑山 有所指揮而不反 更鼓三鳴 軍官來
 先梧川·月南等地 火色耀遠 往往驚訛 余堅臥 諭衆曰 軍機虛實 縱有臨時變更 豈有進兵之擧 火自照者乎 正行間出住本軍 還白執炬而來 云 是亦以駭軍嚴懲
 朴都事家 軍需代錢 三百兩來納 梁中軍 以軍需愆期事 捉靑山小吏以來


 삼월 이십사일 報恩(보은) 馬充(마충)으로 들어갔다. 本邑(본읍)의 探吏(탐리) 梁哥(양가)를 적발하여 軍中(군중)에 포박하여 두었다. 梁哥(양가)를 청산에 있는 中軍(중군)으로 보냈다. 지휘한 것이 있어서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북을 세 번 울려 군관이 왔다.
 먼저 梧川(오천)·月南(월남)등지에서 불빛이 먼 곳에서 빛나니 이따금 군사들이 놀라 움직이며 動搖(동요)하여 내가 단단하게 바짝 엎드려 깨우쳐 말하기를 '군사 機密(기밀)의 허실이(거짓과 참) 비록 때에 따라 변경됨이 있으나 어찌 군사를 움직이는 행동에 불을 스스로 비추는 사람이 있는가?' 라고 하고, 바로 軍中(군중)의 行列에서 나와 本軍(본군)에 머무르는데 다시 날이 샐 무렵 횃불을 들고 왔기에 내가 이르기를 '이것 또한 군을 놀라게 하였으니 엄하게 징계하겠다'라고 하였다.


 朴都事(박도사)의 집에서 군수대금 三百兩(삼백량)을 와서 납부하였다. 梁中軍(양중군)이 軍需代金으로 약속한 일을 어겼다. 靑山(청산)의 小吏(소리)를 잡아 가지고 왔다.

·探吏(탐리):奉命使臣의 길을 探問(탐문)하는 衙前(아전).
·驚訛:놀라서 움직이다. 동요하다.
·都事:조선시대 각 도의 監營에 두었던 從五品 벼슬.
·愆:허물건, 잘못할건, 어그러질건, 어길건, 병건, 잃을건

                                                                                              -지산유고 창의일기 중-

 

 창의일기를 좇아 외속리면 장내리로 들어갔다. 장내리 서원으로 가는 길에 선병국 가옥을 구경했다.

선병국 가옥은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보은 선씨 선정훈이 당대 제일 가는 대목들을 불러 후하게 대접하며 마음껏 지은 집이란다. 이 일대 제일의 부자였던 그는 인근의 영재들을 뽑아 사재로 교육시키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집을 지은 것은 연화부수형의 명당이였기 때문이란다.

 

 이곳에서 26년간 공부하였다는 李秀益이라는 분을 찾고 싶다.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五日
 二十五日 移陣于俗離下書院 院卽帳內 內洞一經東擾 燒戶未復 傷者甫起 不可住底


 삼월 이십오일 陣(진)을 俗離山 아래 書院으로 옮겼다. 書院은 곧 帳內里이다. 內洞(안골)은 東學(동학)의 騷擾(소요)가 한번 지나가 집이 불타서 아직 복구되지 아니하였고, 다친 사람들이 겨우(근근히) 일어나(거동하여) 맨 바닥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 底 : 밑저, 맨바닦
· 帳內里(장내리)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현재지명)

                                                                                                        -지산유고 창의일기 중-

 

 나는 선병국 가옥을 나와서 만수계곡 초입을 지날 때 1894년 동학도의 집결지라는 팻말 앞에 잠시 멈추어 섰다가 지산유고에 나오는 장내리를 지나 서원을 찾았다. 象賢書院(상현서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 초가로 세워져 있다가 1919년 중수복원했다는 기록을 보니, 100여년 전 동학소요가 휩쓸고간 장내리 민초들의 삶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 象賢書院(상현서원) : 1555년(명종 10) 삼년성(三年城) 안에 서원을 창건해 김정(金淨)을 모시고, '삼년성서원'이라고 했다. 1610년(광해군 2) '象賢'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672년(현종 13)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성운(成運)을 추가 배향했다. 1681년(숙종 7) 성제원(成悌元)·조헌(趙憲)을, 1695년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당시에는 草家로 세워져 있다가 1919년 중수해 복원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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