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의병장 조동석

도솔산인 2007. 4. 2. 21:02
우리 풍양조씨 대종회에서는 일년에 두번씩 종보를 발행하여 종인등록을 마친 매 세대에 보내주고 있는데 여러가지 여건상 비록 종보의 면수는 얇지만 기사내용이 알차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조상에 대한 내력을 가르치고 깨우쳐 줘 교육적 효과가 매우커서 스스로 흐믓해 했는데, 듣기로는 타문에서도 우리 종보를 읽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대종회에 관여하고 있는 임원의 한사람으로서 자긍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호군공파 종회 대구종회, 대종회등 종사에 관여한지가 여러 해 되었기 때문에 각지에 흩어져 사는 일가들로부터 온갖 문의와 상담도 수없이 많았으나 풍양조씨 종보에 연재되는 '문중인물 이야기'는 필자도 매우 흥미롭게 읽기는 했지만 일가 여러분들의 청을 못이겨 원고를 쓰자니 참으로 난처한 일이다.

본디 글재주도 없는데다 지금 쓰려고 하는 국은공 조동석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도 아니고 벼슬도 생원에 불과하고 공이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왜군의 손에 참형을 당한 일은 집안과 상주 고을 일원에서는 잘 알려진 일이고 당시의 향리인 모두가 아쉬워 했던 일이라지만 이 사실을 기술한 서책이나 독립유공자들에 수여하는 훈장이나 표창장, 공적서 한 장도 찾을 길 없고 함께 창의에 참여하였다가 후세에 그 이름을 널리 떨치고 역사적 인물이 된 허위선생의 행장에서 조차 찾을 길 없으니 그 아쉬움은 말로 표현할 수없으며 공이 행한 역사적 사실이 하루 빨리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뜻에서 비록 순서는 아니지만 우리 문중의 여러 훌륭하신 인물들에 앞서 공의 이야기를 쓰는 뜻을 깊이 양해하시기 바란다.

비록 공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의를 위해 버릴 때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후세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즉 견위수명한 공 같은 분을 평생에 아무런 한일 없이 필부로 살다가 간 사람처럼 대접해서야 되겠는가란 생각에 공의 행적을 찾아 도서관을 전전하다가 천행으로 통일사 간 '한국 독립사'와 일신각 간'한국인의 족보'에서 국은공에 관한 기록 몇줄을 발견하엿으나 상세한 기록이 없어 풍양조씨세보와 우리 문중의 대학자이며 현 한서대학 동양고전연구소장이신 일평 남권선생이 찬한 공의 묘갈명이 수록된 선세장갈집을 참고하니 자료가 부족하여 설명이 길어짐을 새삼 양해를 구한다.

<문헌 기록>
◆조동석(자 국필, 호 국은, 의병장)
 1874년(고종 11년) 생원시에 합격, 1896년(고종 33년) 상주에서 창의항전하다가 일본군경에 피체되어 순국하다. (한국인의 족보 일신각 간)

◆호를 국음(국은의 잘못인듯)이라 하며 1845년생, 갑오이후 국사일비함을 통한하여 정치경장을 기도하다가 1896년 유양산,허왕산,박의사 등과 함께 기의하여 성세를 떨치었다. (한국독립사 통일사 간)

◆자 국필, 호 국은 헌종을사생(1845년), 감술91874년) 증광생원시, 병신(1896년) 창의, ?년 6월 17일 순절. 묘외갈전촌전곤좌 1978년 간(풍양조씨 세보:무오보)

이상과 같이 3개 문헌은 공통적으로 공의 창의(倡義)사실을 기술하였으나 한국 독립사에는 순절하였다는 부분이 누락되었으며 또한 공의 호를 국음이라 적은 대신 허왕산, 유양산 박의사 등과 함께 기의하였다는 사실과 조동석이라는 실명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허위선생 유적에서 찾고져 한 사실을 이 책은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국인의 족보와 풍양조씨세보는 공통으로 생원시 합격 년대와 창의 순절 사실 그리고 년대가 일치하고 있다.

<출생과 당시정세>
공은 헌종을사(1845년)에 호군공의 17대 종손으로 상주 갈전리에서 출생하여 병신(1896년)에 창의, 순절한 분이다. 공의 16대조이신 상의공(휘 숭)에게 내린 왕지(홍무 29년 1396년, 옹이 벼슬아치에게 내리는 사령으로 후에 그 명칭이 교지로 바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953호로 지정되어 실물이 현재 문화재 관리국에 보존중이고 공의 10대조이신 북계공 (휘 광벽)은 종보 3호 11면에 게재된 분으로 임란호국충의단에 위패가 봉안되고 연악서원에 제향된 분이며 고의 휘는 주하이신데 검간공 사파(四派)에서 출계한 분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습행하고 경서와 사요를 깊이 연구하여 고종 11년 (1874년)에 증광생원에 발탁되니 신정왕후이신 대왕대비께서 등을 어루만지시며 이르되 네가 우리 조씨의 종주라 하시며 사랑하셨다 한다. 이때 공의 나이가 30세라 앞길이 자못 양양하였다.

허나 이때를 전후한 나라 안팎의 정세는 고종즉위 이흐 섭정을 맡았던 흥선대원군이 실각(1873년)하고 민씨일가가 집권하여 내정이 어지러움을 틈타 을해(1875년)에 일본군함 운양호가 강화도를 침범하여 우리 군사가 이를 포격한 이름바 운양호 사건이 발발하니 일본은 이를 기화로 국교수복을 수차 강요하여 병자수호조약(1876년)을 체결하고 부산 인천 원산항이 개항되었다. 이에 공은 벼슬에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두문불출, 세사와 절연하고 오직 어버이를 효양하였으나 정축(1877년)에 부친상을 당하니 효도의 길마져 막혀 효도를 충도로 대하게 된다.

이때 벌서 나라는 국력이 쇠하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날로 망국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으니 조정은 수구파와 개화파로 대립하여 갈등과 알력이 끊임없던 중에 1882년(임오)에는 군대급료문제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씨일파는 청국세격을 끌어 들였고 이로 인해 일본과는 손해보상조로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공사관에 위병을 두게 하니 청일 양국이 조선을 손에 넣기 위해 서로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창의 그리고 순국>
나라안의 정세는 청국과 일본세력에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구미젝구에도 문호를 개발케 되었으니 1882년(임오)에는 조미통상조약을 맺고 뒤이어 영, 독, 이, 불과도 조약을 맺어 신문명을 받아들이게 되나 굵직 굵직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니 1884년에는 김옥균등 개화당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1885년(을유)에는 영국군함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는가 하면, 노서아까지 끼어 들어 노룩공사 웨벨은 친로파를 조종하여 세력을 심으니, 마침내 우리나라는 청.일 노 3국의 각축장이 된 가운데 1894년 전봉준의 동학란, 청리전쟁, 갑오경장등 큼직한 사건에 이어 드디어 1895년(을미)년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살해되고 단발령을 내리니 이때에 의분의 혈기가 있는 사람은 다투어 서로 의병을 일으켜 격서를 전파하여 일본군 토멸을 기약하였다.

공은 유양산(본명을 밝히지 않았음은 아마도 공모인을 보호하기 위한 듯에서 숨긴 듯함) 허왕산(허연), 박의사(본명미상)등 여러분들과 더불어 수백명이 창의하였는데 모구가 공을 장수로 추대하여 관기, 청산, 영동, 황간, 무주, 거창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성세가 자못 떨쳤는데 지레에서 간악한 아전에 빠져 한번 패한 후 단신으로 화북(상주시 화북면)땅에 숨어 재기를 계획하다 불행히 관군과 일병에 포획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후 병신(1886년) 6월 17일 상주장터에서 목을 자리는 형벌을 받았는데 그대 온 상주읍민이 모두 철시하고 통곡항였다고 전한다.

공에 대한 자세한 일은 공의 양자 경구공이 일찍이 공의 참화를 보고 출가한후 돌아오지 않아 그의 유복자인 남원씨조차 조부에 대한 내력을 알지 못하여 현 종손이 성태(대종회 이사)씨에 이르기까지 오랜동안 집안과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묻혀져 아무도 살피지 못하였는지라 광복후에도 유공자로 지정받지 못하였음은 물론이고 공적서 한장도 없어 아무런 대우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무딘붓으로 몇자 적어 앞으로 이 방면의 학문이나 연구를 할 문중 젊은이들을 위해 사실로 나타난 것만 기술하는 바이며 역사는 이 사실을 밝혀 공의 원혼을 위로해 주기 바란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사 : 통일사 간
한국인의 족보 : 일신각 간
풍양조씨세보 : 무오보(1978년 간)
조남권 선 : 묘갈명(선세장갈집)

<필 자>
전 호군공파 종회장
현 대구종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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