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靑興門中의 家族史

도솔산인 2006. 6. 7. 00:02

                                        靑興門中의 家族史

일 시 : 2006. 06.06

장 소 : 함각산(대덕구 마산동), 백운봉(유성구 성북동)

인 원 : 이동, 이남, 이영규, 이범, 당숙어른 부부

 

 靑興門中의 家族史

 1912년은 우리 가족에게는 비극의 해였다. 

 한일합방이 되어 일본 경찰의 압박이 심해지자 長子 휘康夏는 1912년 아버지인 지산의 유골과 동생인 휘康殷(1912년 7월 24일 졸)을 후곡의 초강(금강)가에서 화장하여 강물에 뿌린다.

 

 사촌인 휘康卨(당시 39세)이 정월 23일 사망하고 위康連의 처(성산여씨 : 창의를 함께 했던 여씨 집안 父日鎬)가 정월 26일 20개월 된 甲宰(1910년 5월 1일 생)를 남겨두고 사망하며 강연 할아버지 역시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된다.

 

 나의 선고, 조부, 종조부, 증조부, 백고조부, 고조부, 5대조부...  내가 만든 무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나는 우리 가족사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푸른 잔디는 핏빛보다 진한데 우리 가족사의 슬픈 이야기....

 

 5대조부께서(참봉 상의공)자식의 교육을 위해 월성박씨 朴春立(號楠西) 선생에게 취학시키기 위해 1861년 경상도 청송부 서덕동에서 義興縣 羅湖洞(경북 군위군 우보면)으로 이거를 한다.

 義興! '의로써 일어난다'는 의미와 우보(友補)! '글로써 벗을 돕는다'는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지금은 義興이라는 지명은 없어지고 '軍威로 바뀐 것을 아는 이 또한 없다.

 몇 년전 청송을 갔다 오던 중 우보에 있는 敬義齋(서당)에 가본 일이 있다.

성독소리 끊어진 퇴락한 서당이지만 학문에 뜻이 있는 선비들의 산실이었을 것이다.

季高祖考께서는 스승의 딸과 혼인하여 22년간(1861년에서 1883년) 이 敬義齋에서 학문을 닦는다. 당시 판서인 민태호의 출사 권유도 사양하고 스승의 유명을 받들어 경의제를 꾸려 나갔으리라 짐작 된다.

 

 1888년 형님인 諱起燮(고조부)의 상을 치르고 나서 1889년 속리산 자락 상주군 화서면 금천(化寧縣俗離山南湖山領 境界)으로 이거 스스로 錦樵山人 칭하고 은둔하게 된다.

 1894년 동학이 창궐하자 제사족들과 천탁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집을 지어 피란을 하였고 錦川洞約을 지어 동비들의 살육과 약탈을 막아냈다고 한다.

 

  나는 몇 년전 지산유고를 들고 금천을 찾았다. 그러나 이곳 또한 창지개명이 되어 지금은 금산리로 부르고 있다.  선대에서 10년(1889-1897) 가까이 살았던 곳이기에 그 흔적 남아 있지 않나 해서....

 

 경운기를 몰고 가는 노인을 따라 100년도 더된 이야기를 꺼낸다.

그 당시의 돌담이며 초가에서 지붕만 양철로 바뀐 100년도 넘은 마루에 걸터앉아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혹시 전주이씨?' '효령대군이지요?' '예 맞습니다.'

 그 분은 당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선친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라며 '이 집이 원래 전주이씨 집이요.' '서당이 바로 여기고 지금도 그 일가들이 살고 있다'며 '노인의 할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의병을 따라다닌 이야기...' 가족들에게까지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다는 사연' 하며..

 촌로에게 인사를 하고 노인이 일러준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니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며 자기는 집안 이야기는 잘 모른다고 하시는데 족보로 확인을 하니 14촌이다.

아마 금천 자제들 중 돌아오지 못한 청년도 있을터.....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천방면으로 진출 한 참모장 허위는 고종의 선유칙서를 받고 의병을 해산하자 지산 할아버지는 의병장을 진사 조동석에게 넘기고 상소문을 올린 후 柳二江과 함께 南遊 河回로 들어가 柳石浩선생 霞隱 柳臣榮, 그의 동생 柳東濬 등과 교유하던 중 제자들의 청원에 장자인 상주 감옥에서 풀려난 諱康夏에게 문의로 이거하라는 편지를 보낸다.

 

 1897년 봄 백고조비 월성박씨(57세), 고조비 안동권씨(58세), 휘강수(37세), 의흥박씨(42세), 휘강석(33세), 휘강설(증조부24세), 진주강씨(증조모22세), 휘강연(18세), 계고조비 월성박씨(50세), 휘강하(25세), 부인의성김씨(28세), 휘강은(15세), 휘강한(11세), 휘명재(16세), 휘성재(11세), 휘인재(1세)

 상주 화서 금천에서 보은으로 회인에서 회남으로 문의 후곡까지 17명의 가족들은 男負女戴하고 1박 2일은 족히 걸었을 것이다.

 

 왼쪽 상단의 묘가 나의 증조고비(휘강설 진주강씨 금천댁) 묘소이다. 사망년도 1912년 당시 16살인 아들 휘인재를 남겨두고 39세로 돌아가심.

 

가운데가 휘인재(조부), 오른쪽이 종조부 휘의재지묘이다.

  

나는휘강설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내 생전이라도 산소를 열심히 돌보고 가꾸고 싶다.

 

 或者가 내게 말하길 ' 당신은 조상 일에 관심이 많다'고하는데 솔직히 나의 몫이기에 나 또한 마지 못해 할 뿐이다.

 

 선대의 산소를 내손으로 파표하고 이장하는 일은 이제야 끝이 났다. 후손으로 그냥 둘 수는 없기에 내가 앞장 섰지만 내키는 일은 아니다.

 

 계룡산 백운봉의 자락에 오대조부와 고조부 형제의 산소를 모셨지만 마음에 아직 남는 것은 고조부 계씨인 의병장 지산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자락 한편 작은 와비라도 세워서 그분의 뜻을 기리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눈 앞을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