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지산유고에 나오는 왕산 허위선생의 기록과 왕산의 가계도

도솔산인 2006. 8. 21. 01:25

* 지산유고에 나오는 왕산 허위선생에 관련된 기록과 왕산의 가계도

 

▶丙申年(1896년) 二月 八日
 與木川族人起夏 適往甘川 訪許旺山蔿慷慨士也 憤不顧身魯 與數三同志  有措備於金山等地 而方在啓行中 余不敢辭 與諸益偕往趙進士東奭 柳兄道燮 實左右之


 이월 팔일 木川(목천)에 사는 族人(족인) 起夏(기하)와 함께 甘川(감천)으로 가서 旺山(왕산) 許蔿(허위)를 찾아가 倡義(창의)의 일을 논의하였는데 허위는 悲憤慷慨(비분강개)하는 선비이다. 분하고 원통하여 자신의 둔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서너 명(數三)의 동지들과 대략 金山(금산) 등지에서 준비를 조처하여 바야흐로 倡義(창의)를 시작하는(길을 선도하는) 가운데 내가 감히 사양(사퇴)하지 못하고 여러 돕는 사람들과 함께 趙進士(조진사) 東奭(동석)과 柳兄(유형)道燮(도섭)에게 갔는데 진실로 서로 의지하여 좌우에서 돕는 사람들이었다.

 

▶丙申年(1896년) 二月 九日
 宿塘村
 이월 구일 倡義擧兵(창의거병) 전일 塘村(당촌)에서 묵었다

 

▶丙申年(1896년) 二月 十日 乙亥(양력 3월 23일)
 入金泉 同日會員三十餘人 許盛山·姜石圃·梁碧濤·金鳳超·諸益皆與焉 火 軍三百名素所約束者也 而爲人所沮 中途回  卒難復 合然旣發之 論誓死不  爰擧六丁火  立定條約


 이월 십일(장날) 金泉(김천)에 들어갔다. 同日 회원 삼십여명과 許盛山(허성산) 姜石圃(강석포) 梁碧濤(양벽도) 金鳳超(깁봉초) 등 여러 돕는 사람들이 다 참여하였다. 화포군(소총수) 삼백명은 본래 약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沮止(저지)를 당하여 중도에서 기를 돌려 마침내 돌아가기 어려워 혼연일체로 다 일어났다. 함께 죽기를 맹서하고 변하지 않을 것을 논하며 이에 육정의 화승총을 들고 일어서 조약을 정하였다.

 

▶丙申年(1896년) 二月 二十四日
 二十四日 再到甘川
 凡周行數百里  有所得諸益 稍稍復進時 則聖上播越俄館 削令頒行列邑 孰不欲一死圖報
 이월 이십사일 다시 甘川(감천)에 이르렀다. 널리 數百里(수백리)를 두루 巡行(순행)하며 대략 여러 동지(諸益)들을 얻은 소득이 있었으며 차츰 차츰 다시 나아가는 때 聖上(성상)께서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을 하고 斷髮令(단발령)을 頒布(반포)하여 列邑(열읍:많은 고을)에서 행하여지게 하니, 누가 한번의 죽음으로 보답을 꾀하고자 하지 않으리요?

 

▶丙申年(1896년) 二月 十五日
 十五日將向龜城 耆月居呂永根 卽金山稅務主事也 其從子承東 卽本鎭運粮都監也 以其叔罪犯化黨而幸得容貸 自納軍需代二千金 又以龜城之行路 出其門 爲兵設饋


 이월 십오일 장차 龜城(구성)으로 향하여 하였다. 기월에 사는 呂永根(여영근)은 곧 金山(금산)의 세무주사이다. 그 사촌의 아들(당질) 呂承東(여승동)은 곧 本鎭(본진)의 運粮都監(운량도감)이다. 그 셋째 동생이 개화당의 죄를 범하였으나 운 좋게 관대하게 처리한 까닭으로 스스로 군자금 二千金을 납부하고 또한 龜城(구성)의 行路(행로)에 그 문을 나와 군사들을 위하여 음식을 대접하며 베풀었다.

 

 余甚佳其意 而鄙其貨三鼓 日 踰石峴上 上子院時雨下 山川紆  顧許參謀旺山曰 美哉 可養兵 乘夜入郡 郡有野 之 約操兵夾道而待者 千餘人 十步一炬光奪桂魄意 謂此地此人 庶幾有辭 而未知義理何如耳 及到入見主 李在夏責 以宗室巨卿之家 當此主辱臣死之日 觀望逼 於一片孤城 寧寒心哉 以年老 薄辭


 내가 그 뜻을 매우 가상하게 여겼으나 그 재화는 인색하여 여러 번 북을 울렸다.
 날이 저물 석양 무렵 石峴(석현)의 정상 上子院을 지날 때 비가 내렸다. 산천에 紫 (탱알)이 얽혀있어 許참모 旺山(왕산)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아름답지요? 가히 군사를 기를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야음을 타고 고을에 들어갔다. 관아에는 거칠게 떠드는 소리가 있었고 군사를 잡아 묶어 놓고 길을 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천 여명이었다. 십보에 하나의 횃불을 밝혀 달의 뜻을 빼앗았다. 생각건대 이 곳 이 사람들이 거의 하소연함이 있으나 의리가 어떠한가를 알지 못할 뿐이었다. 院에 도착하였을 때 고을 원님 李在夏(이재하)가 들어와 알현하니 꾸짖기를 '종실이며 큰 벼슬을 한 집안으로 이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가 죽는 날을 당하여 관망하다가 一片孤城(일편고성)에 황급하게 남아있으니 어찌 寒心하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나이가 연로한 까닭으로 녹미가 적다고 하소연하였다.

 

 

▶丙申年(1896년) 二月 二十七日
 二十七日 開坐於鐘閣 以梁濟安爲中軍 趙東奭爲都摠 姜懋馨爲贊劃 許蔿爲參謀 李時佐·呂永昭爲書記 尹鴻采以先鋒兼組練將 編伍儒兵三十餘 火 兵五十餘.
 運粮官朴鳳汝 私囑守門官文在善 以二百金納交於中營  中營笞而却之 其廉如此


 이월 이십칠일 鐘閣(종각)에 앉아 대회를 열고 梁濟安(양제안)을 中軍(중군)으로 삼고, 趙東奭(조동석)을 軍門都摠(군문도총)으로 삼고, 姜懋馨(강무형)을 贊劃(찬획)으로 삼고, 許蔿를 參謀(참모)로 삼고, 李時佐(이시좌) 呂永昭(여영소)를 書記(서기)로 삼고, 윤홍채를 先鋒(선봉)겸 組練將(조련장)으로 삼아 隊伍(대오)를 儒兵(유병) 삼십여 명 火 兵(화포병) 오십여 명으로 편성하였다.
 運粮官(운량관) 朴鳳汝(박봉여)가 守門官(수문관) 文在善(문재선)에게 私的(사적)으로 부탁하여 二百金(이백금)을 中營(중영)에서 주고받으니, 中營(중영)에서 볼기를 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 청렴함을 이와 같이 하였다.

 

 

 

* 왕산 허위선생의 가계도 및 후손들

 

[서울신문 2006-08-14 08:36] 

구 소련과 중국에서 각자 떨어져 살다 지난달에야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왕산 허위의 후손들. 항일 운동으로 탄압을 받아 국외로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이 조국 땅을 밟는데 10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후손들은 고국으로부터 외면당했지만, 돌아온 게 꿈만 같다고 했다. 오랜 세월 고초를 겪었지만 고국의 공기를 마시게 된 것만 해도 고맙다고 했다. 이들의 귀국 후 생활, 타국에서의 인생 역정, 다시 찾은 고국에 대한 느낌을 3회에 걸쳐 싣는다.

키르기스스탄서 온 허게오르기 형제

“말만 들었지, 이렇게 발전한지는 몰랐어. 우리 아버지가 이 땅에서 내몰린 뒤 남은 후손들이 이만큼 해 놓은 거야.”

의병장 왕산 허위의 손자로 키르기스스탄에 살다가 지난달 한국 국적을 취득한 허게오르기(62)씨와 허블라디슬라브(55)씨 형제에게 고국이 무관심한데 섭섭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아버지에게서 듣던 조국에 돌아왔지만, 한동안 이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굴러야했다.1907년 13도 창의군 편성을 주도한 의병장 왕산은 밀고로 붙잡혀 1908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했다. 그뒤 왕산가 사람들은 일제를 피해 중국과 러시아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헤이룽장에서 온 허금숙씨

“1995년 아이들 대학 학비를 벌어보려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10년 동안 제가 누구 손녀인지 알고 박대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죠.”왕산의 바로 윗형 성산 허겸은 역시 의병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건너갔다. 성산의 손녀인 허금숙(59)씨는 한국에 들어와 모진 고생을 했다.1992년 정부는 허금숙씨의 할아버지 허겸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주었지만 허씨는 10년간 불법체류자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해방전 귀국한 허벽씨

만주로 망명했다가 해방이 되기 직전에 국내로 들어와 고국에서 살 수 있었던 왕산의 먼 친척 허벽(71)씨는 허게오르기씨 등이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각종 자료를 간직해 왔다. 조국에서도 독립유공자 후손의 삶은 편치 않았다. 일제 때 도망다니느라 남은 재산이 없었고, 해방했을 때까지 이국만리에서 떠돌고 있는 어른들 대신에 허벽씨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으니까 굶는 것보다 ‘누구 후손이 비겁하게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게 더 무서웠었지. 벌 받을 말이지만 때론 조상들이 짐이 됐어.”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기사일자 : 2006-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