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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백형 방산(舫山, 허훈)께서는 의병활동 자금하라고 그 많던 천석살림을 다 팔아 두 동생(旺山, 性山)에게 주었다. 그렇게 처분하고 당신은 청송의 진보로 이사가 버렸다. 왕산이 순국하시자 남은 직계 가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만주로 피신해 갔다. (임은에 남은 사람들 가운데는) 의병 창의로 붙잡혀 가고, 몇 해 안 가 허씨 집성촌 임은 동네가 썰렁했다. … 일본순사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으레 한복차림의 조선 사람 보조원 한 사람을 데리고 번쩍거리는 긴 칼을 차고 일본순사들은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이들이 동네에 들어서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숨는다. 다락에도 숨고 집 뒤 대밭 속에도 숨는다. 붉은 견장과 철커덕거리는 칼 소리에 동네 강아지들도 놀라 마구 짖어댄다. 1915년 음력 2월, 내 여덟 살 되던 해였다. 재종조부 왕산어른 순국하신 후부터 몇 년을 일본순사에게 시달리던 우리 일가들은 일제히 짐을 쌌다. 그리고 서로 집을 바꿔가며 살았다. 며칠만 살고 바꾸고, 또 바꾸고 했다. 오죽했으면 왜놈 눈 피하고 속이려고 그런 꾀를 다 냈겠나. … 우리는 짐을 싸서 한 달 간 왕산 댁에 가서 살았다. 그 집은 미리 다 떠나고 난 빈 집이었으니까. 그때가 구기자 잎이 파릇파릇 날 때였다. 하루는 내가 마당에 놀고 있으니까 숙부님(허규, 이육사 외삼촌)이 대밭으로 들어가시면서 "순사가 와서 찾거든 모른다고 해라"하셨다.… 그해 3월 멀리 들판에는 엎드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는 계절이었다. 언제 짐을 싸 놓았던지 우리는 하늘이 캄캄할 때 집을 나섰다.… 그때 우리는 밤길을 길어서 구미 아래에 있는 부상역(철길 변경으로 사라짐)에 와서 기차를 탔다. 일본인들이 기차 칸마다 다니면서 감시를 했고,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내려는 열차수색원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했다. -허은(왕산 아우 범산의 손녀딸로 임정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손부)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형제들은 흩어져서 집시처럼 유랑했다. 그러면서 왕산 아우 성산(性山)은 부민단(扶民團, 망명 조선인의 자치단체) 초대단장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하고, 왕산 아들 허학은 동흥학교를 세워 독립 운동가를 기르고, 당질 허형식은 항일을 하기 위해 동북항일연군의 총참모장, 곧 빨치산이 되었다. 그밖에 사람도 모두 항일에 투신했다. 왕산의 막내아들 허국은 만주에서도 일본 군경 등쌀에 견딜 수 없어 소련 연해주로 갔다. 하지만 여우를 피하다 범을 만난 듯,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쫓겨났다. 만리 타향 이국땅에서 평생 망향의 그리움에 살았던 허국은 한․러 수교 전이라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고국을 찾으라고 유언을 남기고는 그곳에 묻혔다. 국적 취득 축하 모임 지난 토요일,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초대 전화가 거듭 왔다. 왕산 족친들이 허국 아들 손자들의 국적 취득 축하 모임 겸 상견례에 참석을 당부했다. 물난리로, 원고 마감으로 경황이 없었고, 폭우로 정기 버스노선도 끊어졌지만 여러 차례 차를 갈아타고는 서울 종로의 한 한식점으로 갔다.
이 날 모임에는 특별 손님으로 방송인 윤덕호씨도 초대되었는데, 허씨 집안에서 감사패를 전달했다. 윤씨는 서울과 키르기즈탄을 오가며 <백년 만에 귀향>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작년 광복절 특집으로 MBC에 방영한 바 있고, 이를 계기로 이들의 귀국과 국적취득, 취업을 주선해 주었다.
왕산 후손들의 수난을 어찌 필설로 다 말하랴. 의병장 후손이 아니었다면, 만주로 망명치 않고 고향에서 적당히 일제에 순종하면서 지냈다면 이 집안에서 국회의원도 고급공무원도 여럿 나왔을 게다. 아니 여태 집 한 채 텃밭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최소한 동네부자라도 되었을 텐데 할아버지가 의병장을 하는 바람에 귀국은 했으나 고향에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등짐을 지고 좁은 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다. 아버지의 유언을 이뤄서 기쁘다
허블라디슬라브에게 물었다. - 국적취득 소감은? "아버지가 늘 고국에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유언을 이뤄서 기쁘다." 허블라디슬라브(55), 그는 구 러시아 시절 지질학자였다. 러시아가 붕괴되자 봉급으로 살 수 없어서 운전기사로 일했다. 그의 형 허게오르기(62)도 학자였지만 소작농으로 일하다가 이번에 국적을 취득하였다.
충절의 고장 선산 구미 명맥을 이은 왕산 가문 후손들을 환대하고, 이들이 원한다면 정착을 도와줘야 할 것이다. 이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할아버지의 항일을 원망치 않도록…. 아마도 구미 금오산은 이 모든 걸 말없이 지켜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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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키르키스탄과 나의 사랑
글쓴이 : yvjyo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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