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스크랩] 오마이뉴스 허씨종친회상견례

도솔산인 2006. 8. 21. 01:45
마침내 할아버지 나라의 백성이 되다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 후손 국적 취득
    박도(parkdo45) 기자   
▲ 할아버지 나라에 귀화를 하고 활짝 웃는 왕산 후손들(왼쪽부터 허블라디슬라브, 그의 차남 허세르게이, 장남 허알렉산드, 자부 아이굴, 허게오르기 장남, 허게오르기, 왕산문중 대표 허벽 선생)
ⓒ 박도
만주로 야반도주했던 왕산 일족들

▲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
ⓒ 박도
왕산(旺山, 허위)어른이 의병대장(13도 창의군 군사장)을 하시다가 잡혀서 교수형(서대문감옥 개설 제1호)을 당하자 온 임은마을(현, 구미시 임은동)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왕산 백형 방산(舫山, 허훈)께서는 의병활동 자금하라고 그 많던 천석살림을 다 팔아 두 동생(旺山, 性山)에게 주었다. 그렇게 처분하고 당신은 청송의 진보로 이사가 버렸다. 왕산이 순국하시자 남은 직계 가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만주로 피신해 갔다. (임은에 남은 사람들 가운데는) 의병 창의로 붙잡혀 가고, 몇 해 안 가 허씨 집성촌 임은 동네가 썰렁했다. …

일본순사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으레 한복차림의 조선 사람 보조원 한 사람을 데리고 번쩍거리는 긴 칼을 차고 일본순사들은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이들이 동네에 들어서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숨는다. 다락에도 숨고 집 뒤 대밭 속에도 숨는다. 붉은 견장과 철커덕거리는 칼 소리에 동네 강아지들도 놀라 마구 짖어댄다.

1915년 음력 2월, 내 여덟 살 되던 해였다. 재종조부 왕산어른 순국하신 후부터 몇 년을 일본순사에게 시달리던 우리 일가들은 일제히 짐을 쌌다. 그리고 서로 집을 바꿔가며 살았다. 며칠만 살고 바꾸고, 또 바꾸고 했다. 오죽했으면 왜놈 눈 피하고 속이려고 그런 꾀를 다 냈겠나. …

우리는 짐을 싸서 한 달 간 왕산 댁에 가서 살았다. 그 집은 미리 다 떠나고 난 빈 집이었으니까. 그때가 구기자 잎이 파릇파릇 날 때였다. 하루는 내가 마당에 놀고 있으니까 숙부님(허규, 이육사 외삼촌)이 대밭으로 들어가시면서 "순사가 와서 찾거든 모른다고 해라"하셨다.…

그해 3월 멀리 들판에는 엎드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는 계절이었다. 언제 짐을 싸 놓았던지 우리는 하늘이 캄캄할 때 집을 나섰다.… 그때 우리는 밤길을 길어서 구미 아래에 있는 부상역(철길 변경으로 사라짐)에 와서 기차를 탔다.

일본인들이 기차 칸마다 다니면서 감시를 했고,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내려는 열차수색원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했다.

-허은(왕산 아우 범산의 손녀딸로 임정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손부)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 법무부장관이 발행한 귀화 허가증
ⓒ 박도
구미 임은동 왕산 일가는 왕산 순국 후 7년 만에 10여 가구가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망명도생 야반도주했다. 이들은 만주로 가서도 항일운동에 앞장서다가 일제에 쫓겼다.

형제들은 흩어져서 집시처럼 유랑했다. 그러면서 왕산 아우 성산(性山)은 부민단(扶民團, 망명 조선인의 자치단체) 초대단장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하고, 왕산 아들 허학은 동흥학교를 세워 독립 운동가를 기르고, 당질 허형식은 항일을 하기 위해 동북항일연군의 총참모장, 곧 빨치산이 되었다. 그밖에 사람도 모두 항일에 투신했다.

왕산의 막내아들 허국은 만주에서도 일본 군경 등쌀에 견딜 수 없어 소련 연해주로 갔다. 하지만 여우를 피하다 범을 만난 듯,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쫓겨났다. 만리 타향 이국땅에서 평생 망향의 그리움에 살았던 허국은 한․러 수교 전이라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고국을 찾으라고 유언을 남기고는 그곳에 묻혔다.

국적 취득 축하 모임

지난 토요일,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초대 전화가 거듭 왔다. 왕산 족친들이 허국 아들 손자들의 국적 취득 축하 모임 겸 상견례에 참석을 당부했다. 물난리로, 원고 마감으로 경황이 없었고, 폭우로 정기 버스노선도 끊어졌지만 여러 차례 차를 갈아타고는 서울 종로의 한 한식점으로 갔다.

▲ 방송인 윤덕호씨에게 허벽씨가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 박도
이번에 국적 취득하게 된 허국의 4남 허게오르기와 그의 아들 허브라지밀, 5남 허블라디슬라브와 큰아들 허알렉산드와 자부 아이굴, 둘째 아들 허세르게이 등 6인과 허씨 집안 허벽씨, 허씨 대종회 허장열씨, 외손 권영조씨, 이항증, 이범증(중앙중학교장) 형제분, 의병선양회 윤우 회장님 등 친지들이 모여 상견례를 나눴다. 4촌 6촌이지만 첫 만남으로 서먹한 분위기가 핏줄 탓인지 곧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족친의 정을 나누었다.

이 날 모임에는 특별 손님으로 방송인 윤덕호씨도 초대되었는데, 허씨 집안에서 감사패를 전달했다. 윤씨는 서울과 키르기즈탄을 오가며 <백년 만에 귀향>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작년 광복절 특집으로 MBC에 방영한 바 있고, 이를 계기로 이들의 귀국과 국적취득, 취업을 주선해 주었다.

▲ 의병선양회 윤우 회장이 축하의 말씀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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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선양회 윤우 회장(전 광복회부회장, KBS 퇴직)님은 인사말에서 광복 후 우선적으로 모셨어야 함에도 여건이 여의치 못해 이제야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충심으로 경하한다고 하시면서, 의병이야말로 순일한 애국심의 결정체로, 왕산 선생은 청사에 길이 남을 애국애족의 표상이라고 말씀하셨다.

왕산 후손들의 수난을 어찌 필설로 다 말하랴. 의병장 후손이 아니었다면, 만주로 망명치 않고 고향에서 적당히 일제에 순종하면서 지냈다면 이 집안에서 국회의원도 고급공무원도 여럿 나왔을 게다. 아니 여태 집 한 채 텃밭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최소한 동네부자라도 되었을 텐데 할아버지가 의병장을 하는 바람에 귀국은 했으나 고향에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등짐을 지고 좁은 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다.

아버지의 유언을 이뤄서 기쁘다

▲ 왕산 선생에게 내린 대한민국 건국장
ⓒ 박도
같은 만주를 가도 만주군관학교에 다닌 이는 대통령도 하였고, 최장수 국무총리도 국회의장도 하였고, 국방장관도 육군참모총장 등 대한민국의 요직들은 모두 차지하였는데, 나라를 찾겠다고 독립 운동하다가 망명한 이는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는 유랑의 세월을 보내다가 이름조차도 복잡해지고(이 집안 허씨는 대부분 외자임), 빈털터리로 돌아온 걸 보고,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나라와 겨레를 목숨을 바치라"고 가르치겠는가.

허블라디슬라브에게 물었다.

- 국적취득 소감은?
"아버지가 늘 고국에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유언을 이뤄서 기쁘다."

허블라디슬라브(55), 그는 구 러시아 시절 지질학자였다. 러시아가 붕괴되자 봉급으로 살 수 없어서 운전기사로 일했다. 그의 형 허게오르기(62)도 학자였지만 소작농으로 일하다가 이번에 국적을 취득하였다.

▲ 이들의 귀화를 말없이 반겼을 구미 금오산
ⓒ 박도
이들의 귀국이 알려지자 온정이 답지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한국말을 모르는 왕산 3세들에게 한국어 연수 장학생 혜택을 주었고, 우당장학회에서는 독립유공자녀 장학금을 약속했다. 이들을 가장 감싸고 돌봐야 할 곳은 이들의 고향 구미사람들일 게다.

충절의 고장 선산 구미 명맥을 이은 왕산 가문 후손들을 환대하고, 이들이 원한다면 정착을 도와줘야 할 것이다. 이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할아버지의 항일을 원망치 않도록….

아마도 구미 금오산은 이 모든 걸 말없이 지켜볼 것이다.
이 기사를 보낸지 30분 뒤 구미 임은동에서 왕산가문 중, 유일하게 고향을 지키고 있는 허호(전, 구미시의원) 씨로부터 때마침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왕산 기념공원 조성은 현재 절반 이상 공사 진행 중이며, 왕산기념관 부지는 1만 6천 평을 구미시에서 구입하여 건평 400여 평 규모로 곧 착공할 거라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의 오마이뉴스 첫 기사 '항일군 총참모장 허형식은 생가 헐려'가 이제야 실현된 것에 대해 조그마한 보람을 느낀다.
2006-07-20 11:34
ⓒ 2006 OhmyNews
출처 : 키르키스탄과 나의 사랑
글쓴이 : yvjyo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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