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스크랩] 내가 葛嶺에 가야하는 까닭은...

도솔산인 2006. 6. 9. 08:53

* 일   시 : 2006년 4월 9일

* 경유지 : 대전 - 영동 - 상주 - 의성 - 길안 - 청송 - 길안 - 의성 - 상주 - 화북 - 갈령 - 청계사 - 화북 - 보은 - 옥천 -대전[13시간(차량운행 7시간 포함)]

* 인   원 : 4명(이원규, 이성규, 이영규, 이범규)

 

 지산유고를 읽으며 온몸을 전율하였던 것은 충과 역의 혼돈이었다. 

그리고 50년간 일본에 항거하였던 우리 집안의 내력을 확인한 충격은 그 후에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부터 백 년도 더 된 이야기를, 1894년 동학의 보은 집회와 1896년 을미의병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993년 광복절 우리 집안은 수원시청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50년 간 아니 지금까지도 겪고 있는 고초와 간난을 대통령이 주는 종이 한장과 맞 바꾸는 행사에 내가 그자리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종실스님의 두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아무도 서로를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오히려 허탈했다. 내가 왜 이자리에 있을까? '독립유공자 애족장' 이란 종이 한장으로 정부는 제 할일을 다한듯 오히려 가슴에 달고 있는 꽃이 측은하게만 느껴졌다.

그 날은 온종일 비가 내렸다.

 

 지산유고를 접하고 읍혈을 흘리며 읽어 내려간 그 날부터 나는 100년전의 과거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갑오년(1894) 동학농민운동으로 전국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있을때 상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구나 상주 인근인 보은군 장내리는 동학도의 최종 집결지여서 다른 지방보다 더 소란한 지역으로 정의묵 영남소모사가 선비 이기찬에게 참모로 동학도의 진압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하여도 나아가지 않고 은인자중하였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왜의 낭인에 의해 시해당하고, 고종황제가 아관파천을 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으며, 1896년 2월 8일 이기하와 함께 왕산 허위를 찾아가 시국을 논의하고, 김천과 구성지역에서 창의하여 김천, 구성, 협천 영동, 황간, 보은, 상주, 문경일대의 삼남의 경계지역(백두대간) 창의 활동을 하며, 지방관의 학정에 대한 징치를 하였으며 종국에는 자주독립을 위한 거사를 하여 창의 전 기간에 걸쳐 애민과 우국의 충정이 담긴 로정이었다.    


1896년 2월 19일 지산 선생이 상주 공성면 소정리에 도착하여 유도섭과 다시 창의 하기로 약정하였다.

100여년 전 지났을 이길..... 

9대조 묘소

1853년 계축(철종 4년 10월 12일) 지산 선생이 출생한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서덕동이 이 인근인 듯하다. 

송은처사(9대조)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

止山 선생이 수없이 넘나들었던 갈령(문집에서 보았던 갈령)

아! 여기가 청계사1896년 4월 초하루 지산선생이 묵었다는 청계사는

의병장의 은신처로 제공되었다는 이유로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세웠다는 사찰이 1907년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고 하니...

새로 복원된 청계사는 본래의 위치가 아니라고 하는데....

 

▶丙申年(1896년) 四月 初吉日
  初吉日 同到淸溪寺 盖周馳八百里 不騎一馬 如干吹打起坐等 節以國哀廢人固安 余之拙 而從者亦不能騎 送儒生三人 於化嶺義陣 通辭歸之意
 사월 초하루 柳道燮(유도섭)·趙東奭(조동석)과 같이 淸溪寺(청계사)에 이르렀다. 대략 두루 八百里(팔백리)를 달려 한 마리 말도 타지 않고 웬만하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일어나 앉는 등, 나라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고 폐인을 불쌍하게 여기니 진실로 편안하다. 내가 졸렬하여 종자 또한 말을 탈 수 없어 儒生(유생) 세 명을 化嶺(화령)의 義陣(의진)에 보내어 大將職(대장직)을 사퇴하고 돌아간다는 뜻을 알렸다.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八日

 二十八日 移陣于聞慶大井 去倭站才五十里 招諭諸將曰 吾輩用兵出於不已 而志在撥反 撥反不得 則非徒無益 此去彼站不遠 諸軍其從我進取乎 皆曰 彼强我弱 鋒不可當 俄而濃雲密布 雨下如注 非進趨之時也


 삼월 이십팔일 陣(진)을 聞慶(문경) 大井(대정)으로 옮겼다. 倭(왜)의 驛站(역참)과의 거리가 겨우 五十里(오십리)였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깨우쳐 말하기를 '우리들이 그만 둘 수 없음에 의병으로 나왔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도로 돌아감에 뜻이 있으니, 난세를 바로잡아 태평한 세상으로 돌릴 수 없으면, 다만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곳과 저들(倭軍) 驛站(역참)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제군들이 나를 좇아 나아가 왜적들을 취하겠는가?' 諸將(제장)들이 다 말하기를 '저들(日本軍)은 强(강)하고 우리(義兵)는 弱(약)하여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짙은 구름이 빽빽하게 널리 퍼지고 비가 내리는데 마치 물을 퍼붓는 것과 같아 군사가 前進(전진)할 때가 아니었다.

 

 余乃仰天歎曰 自八月以後 忠憤所激 有出位之思 而提兵數朔內 自相攻   小賊容在垣墉 其於十八强國 何且乘輿播越 逼於外夷
 哀痛之詔 反爲飭諭 有志之士 陷於無名 功成之前 措躬無地 顧此不 欲赴鬪以死 則人不從我 欲歸家安業 則生不如死 寧 海竄林 待諸君報捷之日 是所望也
 此間有子房 願諸君往見之 乃投書于柳兄建一 全付士卒 則建一以其從祖梁山丈 仗義一門 兩擧有所如何云 固不可强


 내가 이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팔월 이후부터 충성심과 분개함으로 소용돌이치는 바 자리에서 나올 생각이 있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數朔(수삭) 안에 몸소 다스린 일들이 보잘것없이 매우 적다. 작은 도적들의 모습은 그 十八强國의 담 안에 있으며, 어찌 또한 임금의 수레가 도성을 떠나 난을 피하여(俄館播遷) 오랑캐에게 핍박을 당하는가?

 애통한 詔書(조서:詔勅)는 도리어 勅諭(칙유:임금이 몸소 타이르는 말)가 되었다. 뜻이 있는 선비는 명분이 없음에 빠지게 되었고 성공하기 전에는 몸 둘 곳이 없다. 이곳을 돌아보고 내(재주가 없음:자기의 겸칭)가 나아가 싸워서 죽자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자고 하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니 차라리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돌아다니듯 流浪(유랑)을 하고 숲 속에 숨어서 제군들이 원수를 갚고 승리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이 사이에 子房(자방?)이 있어 諸君(제군)들을 가서 만나기를 희망하여 이에 柳兄(유형)建一(건일)에게 글을 보내 '사졸들을 전부 부탁한다. 곧 건일은 그 從祖(종조:할아버지의 형제)가 梁山(양산) 어른으로 義兵(의병)을 일으킨 一門(일문)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높이 들어 올림이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진실로(굳이) 억지로 권할 수 없는 일이다.

 

▶丙申年(1896년) 四月 初四日
 初四日 與二侄裝束將歸 只一空褓短杖而已 緩步下山之際 忽有 聲四起 必是敵兵來 追義陣不可以已 辭而恬然獨退四視 陣處將卒 皆登山矣 往餞于葛嶺而還


 사월 초사일 두 명의 조카와 옷차림을 하고 장차 돌아가려 하였는데 다만 빈 봇짐에 短杖(단장)뿐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산을 내려올 때에 문득(갑자기) 총성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있었다. 필시 적병이 와서 義陣(의진)을 추격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인사를 하고 편안하게 홀로 물러나 사방을 둘러보니 진을 친 곳에서 將卒(장졸)들이 다 산을 오르고 있었다. 葛嶺(갈령)에 가서 전별을 하고 錦川으로 돌아왔다.(지산유고 창의일기 중에서)

 

 나는 그 분이 갈령을 떠난 110년 뒤에야 갈령을 찾았다. 

대궐터산을 오르는 장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학은 굶어 죽어도 곡식을 입에 담지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출처 : 학은 굶어 죽어도 곡식을 입에 담지 않는다.
글쓴이 : 도솔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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