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동북부 와불산의 독녀암과 미타봉

도솔산인 2023. 5. 21. 20:46

지리동북부 와불산의 독녀암과 미타봉

 

 

▣ 일 시 : 2023년 05월 20일(토)~21일(일)

▣ 코 스 : 적조암-독녀암-의논대-고열암-미타봉(원점회귀)

▣ 인 원 : 10명

▣ 날 씨 : 맑음

 

 

  카카오 지도에 미타봉과 상내봉, 와불산이 이제야 제 이름을 되찾았다. 오류를 바로잡는 데까지 십수 년이 걸렸다. 지명이 지도에 한번 잘못 표기되면 바로잡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함양독바위는 노장대라는 본래의 이름이 있었다. 독녀암은 삼열암과 함께 유두류록 탐구가 류정자 님이 최초로 발굴하였다. 함양군에서 세운 노장대라는 팻말은 사라지고, 그 시점에 함양독바위는 고증 없이 임의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위에 오르면 함양 읍내가 보여서 함양독바위라고 했다고 한다. 지명의 유래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함양 사람 중에 누군가가 하동독바위와 진주독바위가 있으니 함양독바위를 만들어낸 듯싶다. 그 후에 함양독바위를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하면서 널리 퍼졌고, 어느날 진주독바위도 산청독바위로 둔갑했다. 이제는 함양군도 지역 주민들도 함양독바위라고 부른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렇게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주민들은 상투바위라고 한다. 금낭굴에서 상대날등으로 올라가 바라보면 영락없는 여인의 형상이다.

 

 

 

독녀암은 상대날등에서 바라보면 하늘로 올라가는 여인의 형상이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獨女巖)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말 마적동에 은거했던 강지주(姜趾周, 1856~1939)의 세진대기(洗塵臺記)와 문정동에 살았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노장대(老將臺)라고 하였다. 또 다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편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에는 독녀성(獨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노장대(老將臺)의 장을 (장수장)으로 쓴 것은 독녀성(獨女城)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분명한 역사와 유래가 있는 옛지명을 새 이름으로 바꿔놓은 의도를 모르겠다. 진주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던 진주독바위(옹암)도 산청독바위로 바꾸어 놓았다. 상내봉(향로봉)도 그렇다. 이름을 바꾸면 지명의 유래는 영원히 사라진다. 

 

 

적조암
돌배나무
고열암
독녀암(노장대)
송대에서 바라본 미타봉(220729)
미타봉
샘터 표시 케른
2년전 종균을 넣었는데 이번에 가장 많은 수확을 했다.
새벽에 해운대에서 공수한 스시
일강(一岡)샘

 

■ 고문헌에 나오는 독녀암(獨女巖)과 노장대(老將臺), 독녀성(獨女城)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유두류록」에 나오는 독녀암(獨女巖)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암(獨女巖)이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 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 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2. 「세진대기」와 「양화대수록」에 나오는 노장대(老將臺)(이재구 선생 역)

 

가.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

 

  방장산은 바다 가운데 삼신산의 하나로 크고 깊고 넓기가 인간 세상에서 으뜸이다. 거기서 가장 높은 곳을 천왕봉이라 하며, 천왕봉에서 시작된 높고 가파른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그 한 가지가 다시 북쪽으로 십여 리를 달려 불룩하게 솟았으니 각산(角山)배산(背山)이라 한다. 마을이 있고 마적동(馬跡洞)이라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이다.

 

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봉우리(향로봉 : 상내봉)에서 곧장 뻗어 내린 것은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노장대(老將臺)의 왼편 어깨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거슬러 나아가 문필봉(*솔봉)이 되었으며, 그것은 문수사의 주봉을 이루고 문헌동의 바깥 안산(案山)이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가운데 줄기는 비스듬히 쯤을 나아가서는 굽이돌아 북쪽으로 나아가 문헌동의 안산인 채봉(釵峯 *비녀봉. 양화대 정남의 524m봉)이 되었고, 얼굴을 내밀고 머리를 드리워 양화대를 안으로 감싸는 형세[]가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흩어져 내린 여러 줄기는 봉우리와 봉우리가 중첩되고 지맥(*곁다리)이 널리 퍼져 물을 거슬러 서쪽으로 나아가 양화대를 바깥에서 감싸는 형세가 되었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연려실기술』에 나오는 독녀성(獨女城)

 

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1권 경상도, 산음현

 

  【고적독녀성(獨女城)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백 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 17 권 「변어전고(邊圉典故)」 폐지된 산성

 

  독녀성(獨女城)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다. 1930년대 간행된 조선환여승람 산청편

 

독녀성 군의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천 7백 30척이다.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출처] <독녀성(獨女城)>|작성자 경호강

 

 

4. 산음12경과 산음8경의 시에 나오는 독녀암

 

가. 獨女尋仙[독녀암에서 신선을 찾다.]

烏石岡西有石城址 俗稱獨女岩 古有獨女 鍊道冲空

[오석강(烏石岡) 서쪽 석성터가 있는데 속칭 독녀암이다. 옛날 독녀가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어득강(魚得江, 1470~1550)

 

三峯森戟削 : 세 봉우리가 창을 깎은 듯 뾰족한데 

獨女露城稜 : 독녀암이 성곽 모서리를 드러냈네.

日日樓中望 : 날마다 누각 안에서 바라보았으니

躋攀記我曾 : 올라가면 일찍이 나를 기억하리라.

 

 어득강(魚得江, 1470~1550)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咸從). ()는 자유(子游), 호는 관포(灌圃혼돈산인(渾沌山人). 독녀심선(獨女尋仙) : 『관포선생시집(灌圃先生詩集)』의 山陰十二詠 중 제8수이다. 烏石岡(오석강) :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로 추정한다.

 

 

나. 獨女尋仙[독녀암에서 신선을 찾다.]

 

                 이민구(李敏求, 1589~1670)

 

獨女最高峯 : 가장 높은 봉우리 독녀암은

蒼蒼但煙霧 : 푸르고 푸르러 연무만 자욱하네.

寧知果州仙 : 어찌 알랴 과주의 신선이

不在鍊丹處 : 단약 굽는 곳에 있지 않음을.

 

 이민구(李敏求, 1589~1670) : 조선시대 부제학, 대사성,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州관해(觀海)로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의 아들이다. 독녀심선(獨女尋仙) 『東州先生前集』 卷之三 「嶺南錄」에 나오는 산음팔영(山陰八詠) 중 제 7수이다. 과주선(果州仙) : 당나라 때 과주(果州)에 살았던 여자 신선 謝自然(사자연)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