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산 항일 의병장 석상용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도솔산인 2022. 10. 24. 13:38

지리산 항일 의병장 석상용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 일 시 : 2022년 10월 21일(금)~23일(일)

▣ 코 스 : 강청교-부연정-도마마을-약수암-도마마을-실상사

                백무동-세석-삼신봉-장터목-창암능선-장구목-고점동(인민군사령부터)-백무동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5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운명은 기울어가고 있었다. 2년 뒤 1907년 7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다. 군대 해산은 8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일본은 이에 앞서 군대 해산의 저항과 항일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보병 14연대를 한국에 파병한다. 이들은 부대 업무일지인 『진중일지』를 남긴다. 『진중일지』는 명치 40년(1907년) 7월 23일부터 명치 42년(1909년) 6월 19일까지 14책 2,000여 쪽의 방대한 기록물이다. 일본 경매시장에 나온 『진중일지』를 토지주택박물관에서 우여곡절 끝에 입수하여 공개하였다. 일본 정규군 보병 14연대는 1907년 5월 25일 6시 일본 기타규슈시 모지항을 출발, 26일 부산항에 도착하여 27일 전국에 분산 배치된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에는 입석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908년 4월 29일(음 3.29) 밤 석상용 상원진과  백무진이 연합하여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실상사를 공격한다. 그러나 백무진과 약속한 공격 시간이 어긋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일본군은 도마리의 서당에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 학살하겠다고 위협을 한다. 당시 노지현(盧址鉉) 마천면장의 용기와 끈질긴 설득으로 주민들이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다. 석상용 상원진의 동선은 상원사 터에서 칠성동→두지동→장구목→고점동백무동→도마마을→실상사(입석리)를 잇는 루트이다. 1908년 6월 18일(음 5.20)~22일(음 5.24) 일본군 함양 수비대와 입석 수비대가 연합하여 당시 마천면장을 앞세우고 상원진이 웅거하고 있던 박회성(대궐터)을 공격한다. 이 공격으로 지리산 동북부 항일의병의 최후 보루는 무너진다. 당시 일본군 14 연대 진중일지』에는 투항자의 출신지와 나이 직업 이름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지난 2월 20일과 3월 24일~25일 사단법인 지리산권 발전협의회 허상옥 회장의 안내로 경상대 역사교육과 김준형 교수님과 함께 상원사 터와 박회성을 답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답사팀은 박회성에서 의병들의 건물터와 샘터에서 깨진 무쇠솥 조각을 발견하였다. 4월 2일~3일에는 박회성을 재 답사하고, 4월 20일~21일에는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선생과 석상용 장군의 묘소와 의병장 석상용 선생 전적비와 전면장 노공지현 영사비에 참배하였다. 5월 21일~22일 답사팀은 상원진에 합류한 녹천 고광순의 의병 길인 화엄사→밤재→문수사터→느진목재→칠불사→바깥당재→연곡사→내당재→삼정마을까지 연결하였다. 6월 11일~12일에는 삼정마을에서 바른재→오공능선을 지나 백무동으로 하산하였다. 7월 23일~24일에는 일정(一丁) 민병태 선생과 조용헌 선생이 동행하여 벽소령에서 덕평마을 천우동과 도덕봉 주변을 답사하였다. 이번에 답사한 도마마을에서 실상사를 잇는 구간(약 4km)은 1908년 4월 29일 석상용 선생의 상원진과 백무진이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입석 수비대를 기습할 때 이동한 루트로 추정한다.

 

 

1. 대궐터 박회성의 상원진

 

  1907년 남원에서 양한규와 고제량이 찾아와서 합세하고 곡성, 장성, 고창, 구례 등지에서 왜병들에게 기습작전을 하면서 싸우다가 쌍계사를 거쳐 마천으로 넘어오던 도중, 고려천(고록천, 고광순의 호?)이 이끄는 일대(잔류부대)를 만나 지리산 중턱 상원에서 합세하였다. 그 후 문태수(文泰洙, 1889~1913) 신명선(申明善, ?~1908)이 이끄는 일대가 추성으로 들어와 상원에서 합세하여 대진을 이루었다.《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상원진과 백무진에 대한 기록은 석상용의 구술을 기록한 《비호장군석상용약전》에 유일하게 보인다. 상원사 터는 초암 능선 자락 박회성 아래에 있다. 일본군의 진중일지(1908)에는 상원진을 대궐터(박회성)로 기록하고 있다.

 

 

2. 백무동 고점마을의 백무진

 

  충북 제천에서 박화선이 일대를 이끌고 백무동으로 들어왔다. 그 후 김동신, 홍영대 등이 안의에서 들어와서 지리산에서 의병진이 웅거하였다. 공은 지리 사정에 밝고 지략도 겸비하였으므로 백무진과 상원진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수백 대원들의 군량과 군기 화약의 공급과 작전과 정찰까지 맡아서 맹활약을 계속하였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백무진의 위치는 백무동 고점마을 인민군사령부터로 추정한다. 

 

 

3. 상원진과 백무진의 실상사 기습

 

  1908년 4월 29일(음력 3월 29일) 캄캄한 야음을 이용해 약 50여 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습격하였다. 크게 놀란 왜군은 절 뜰에 쌓아둔 나뭇가지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고 반격하였다. 오랜 접전 끝에 의병대는 서쪽 노루목으로 퇴각하였다.《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최점갑, 1995)》 상원진과 백무진이 연합하여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상원진이 도착하기 전에 백무진이 먼저 공격을 하여 작전은 실패한다. 당시 의병진에는 시계가 없었다고 한다.《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4. 의병에 협조한 도마마을 주민 학살 위협(5월 11일)

 

  그 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군들은 본면 도마리의 서당에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 학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당시 본면 면장 노지현(盧址鉉)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최점갑, 1995)》

 

  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병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젊은이와 부락민을 도마마을 서당 뜰에 강제로 집합시켜 그 앞에서 문초를 하는데 잡혀온 당흥마을 김학길(金學吉)이 앞줄에서 옆줄로 옮겨 앉는다고 즉석에서 사살하고 남은 사람을 처형할 즈음에 면장 노지현이 뒤늦게 알고 달려와서 여기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죄 없는 사람들이니 죽이지 말라고 외친 즉, 왜병은 발길과 총부리로 심히 구타하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옷깃을 헤쳐 가슴을 내밀며 나를 죽이고 죄없는 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호통하니 야만적인 왜병들도 공이 너무나 당당한 용기와 기백 그리고 줄기찬 항변과 늠름한 위엄에 감복하여 총부리를 거두고 모두 해산시켰다. 이때의 상처가 끝내는 다리의 불구로 일생을 마쳤다.《전면장노공지현영은비(임명근, 1983)》

 

 

5. 대궐터 상원의진 토벌 기록(1908년 6월 18일~22일)

 

  1908년 6월 29일 함양 수비 제 5중대 西原 중위 보고 요지(6.23. 함양) : 6월 18일(음력 5월 20일)부터 22일(음력 24일)에 걸쳐 함양 서남방 지구 검거를 위해 출장한 당대(當隊, 입석立石 수비대 포함)는 6월 21일 지리산의 절정 방장봉(方丈峰) 북방 유곡(幽谷, 깊숙한 골짜기) 및 동북방 사면(斜面)에 있는 대궐터(大闕基)에 적의 소굴(巢窟)이 있어서, 그 유곡에 있는 총기제작소(銃器製作所)는 지난날(過日) 구례(求禮) 수비대로 인해 깨뜨렸지만(破却), 대궐터에는 아직 토벌대가 진입할 수 없음을 알고서, 마천(立石 동남방 2리) 면장을 향도(嚮導)하게 해 병풍연(屛風然)이라는 험산(險山)에 깊이 들어가(深入) 어려움(荊棘)을 물리치고(排) 개암나무와 덤불(榛莽)을 밟고 간신히 대궐터에 도달하였다.

 

  적의 그림자(賊影)를 탐지할 수 없었지만, 현재(目下) 적(賊)이 신축중인 가옥은 80여 명을 수용하기에 족한 규모로서, 그 공사를 끝내고 그 주위에는 석루(石壘)를 설치해 목책 울타리(樹枝鹿柴)를 편성하여 소굴로 삼았다. 따라서 가옥 및 방어설비를 파괴하고 일부로 하여금 주위를 수색하여 좌(左)의 여러 물건(諸品)을 획득하였다. 화승총(火繩銃) 12, 탄환 4貫目, 백미(白米) 7두, 기타 잡품. 파괴 가옥은 마천 면장이 방화·소각하고 말하기를 면민을 위해 적의 근거를 끊었다고 함.〔『(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Ⅱ〕

 

진중일지 출처 :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김준형 교수님

 

注 일본군 『진중일지』의 방장봉은 현재 중봉이다.

 

 

※ 마천면 항일의병 귀순자 명단(20명, 1908~1910)

 

  이선전(마천면), 문성주(45‧마천면 당흥촌), 박춘원(55마천면 당흥촌), 김문성(44‧마천면 당흥촌), 이성삼(45‧마천면 당흥촌), 김인중(59 마천면 당흥촌), 김명운(49마천면 당흥촌), 박성언(44마천면 당흥촌), 박문여(73당흥촌), 한태서(53‧도마천동), 박관지(53‧도마천동), 장명준(57‧도마천동), 한성서(76‧도마천동), 신경언(56‧도마촌), 임선경(67‧도마촌), 한치명(26‧도마촌), 한원숙(55‧도마촌) 김성배(마천면 양전), 전이현(마천면 추성), 강수성(마천면 창촌) [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1(義兵篇), 242-243]

 

 

 

부연정
부연정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1067번지

건립자 : 우석(愚石) 한진석(韓鎭錫)         건립일 : 1955년   3월   3일

[개요] 춘정(春汀) 한일택(韓日宅, 1765~1844) 형제가 1800년경 함양읍에서 도마 마을로 이거함. 1933년 증손 우석(愚石) 한진석(韓鎭錫, 1900~1946)이 부연정을 건립하고, 1955년 후손들이 부연정을 중수한 것으로 추정됨. 도마 마을에서 태어난 한금순 할머니(1934년생)가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가 인부들에게 밥을 날라다 주었다고 함.[후손 한오식(1950년생)의 전언]

 

 

부연소
자주쓴풀꽃
실상사
제석당 터
장구목
고점마을 인민군사령부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