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청려목(靑藜木)을 찾아서

도솔산인 2022. 10. 4. 17:47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청려목(靑藜木)을 찾아서

 

 

▣ 일 시 : 2022년 10월 01일(토)~03일(월)

▣ 코 스 : 송대마을-선녀굴-고열암-미타봉-방장문-청이당-영랑대-중봉-천왕봉-장터목-세석-좌고대-곧은재-백무동

 인 원 : 3명(박지합류 1명)

▣ 날 씨 : 맑음(15도), 3일차 안개비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목본류 중 檜(회) 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한·중·일 삼국의 식생이 다르니 檜(회)의 의미도 나라마다 다르다. 중국은 만송(蔓松, 老松, 향나무), 일본은 삼(杉) 나무, 우리 선조들은 대부분 전나무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檜(회)를 만송(蔓松)과 노송(老松)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전대로 국역하면 전(杉木) 나무나 노송나무가 맞다. 우리나라의 전(杉木, 젓나무) 나무와 일본의 삼(杉) 나무는 다르다. 노송(老松) 나무는 중국에서 (蔓松, 향나무)을 가리킨다. 그러니 헷갈릴 수밖에 없다. 당시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의 한자가 없어 檜(회)로 기록했을 수도 있다. 필자는 유람록에 나오는 檜(회) 나무는 구상나무나 가문비나무로 추정한다. 지리산 고산지대에 군락으로 자생하는 것이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이기 때문이다.

 

 注 "()는 지금의 이른바 만송(蔓松)이다. 속칭 노송(老松)이다. 서리고 얽혀 푸른 병풍과 일산이 되는 것이 이것이다. 지금 민간에서 삼나무杉木, 한글 원주 : 젓나무 ()로 잘못 알고 있다. 시인들은 매번 곧은 줄기가 하늘을 가린 나무를 보고 '()'라 읊는데 큰 잘못이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아언각비(雅言覺非)

 

  또 하나는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청려(靑藜)이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청려장을 만드는 명아주로 한해살이풀이다. 명아주는 고산지대에 자생하지 않는다. 유람록에서 청려(靑藜)를 나무로 분류하고 있다.(1851년 하달홍은 두류기) 단서 둘, '산촌 사람들이 지게를 지고 계곡을 건널 때 산청목을 지팡이로 사용한다. 산청목 지팡이는 물속에 의도하는 지점을 짚을 수 있다.'라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고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검색을 해보니 산청목을 일명 '지팡이 나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산청목이 간에 좋다는 소문이 민간에 널리 퍼지면서 등산로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얼마 전 지인이 유람록에 나오는 '청려(靑藜)'에 대해 물어왔다. 몇몇 분들께 자문을 구하여 산겨릅나무(참겨릅나무)로 일명 산청목(벌나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 하달홍(1851년)의 두류기에 나오는 세석 연못 근처에서 산청목을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였다. 산겨릅나무(산청목)청시닥나무는 같은 단풍나무 과로 일반인들은 낙엽이 지면 구분하기 어렵다고 한다. 지난번 답사에서 곧은재 등산로에서 청시닥나무 군락을 확인했다. 백문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 아니던가. 송대 마을에서 출발하여 고열암부터 곧은재를 내려와 하산음을 읊은 굽은 물가까지 점필재 길을 걷기로 하였다.

 

 注 산청목(山靑木) : 한의약에서 사용하는 약초는 아니다. 학명은 산겨릅나무(참겨릅나무), 산청목 또는 벌나무라고도 한다. 산청목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인산 김일훈 선생의 신약본초(神藥本草)에 간에 매우 좋다는 기록 때문이다. 산청목은 푸른빛을 띠는 특성이 있다. 간은 오행(五行)에서 목(木)에 해당한다. 목(木)에 해당되는 색이 바로 푸른색이다. 그래서 푸른 빛을 띠는 산청목(벌나무)이 간병(肝病)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간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깊은 산속에서나 찾아볼 수가 있다.

 

 

산청목(출처 : 인터넷)

 

  점필재의 구롱 길은 향로봉(상내봉)'과 아미타불의 미타봉이 있고, 창지개명한 '노장대와 옹암'을 비롯하여 방장문 등 스토리가 무궁무진하다. 사람들은 아직도 미타봉을 상내봉이라고 불러야 한다. 아홉 모랭이 길은 고열암에서 청이당으로 이어지는 상 허리길이다. 고열암에서 남쪽으로 사면 너덜지대를 지나 올라서면 산죽밭으로 희미하게 길이 나타난다. 조금 진행하면 미타봉을 조망할 수 있는 멋진 고목나무 전망대가 있다. 허리 길을 따라가면 마른 계곡을 건너 대형 숯 가마터에 이른다. 조금 아래 송대 계곡의 발원지 일강(一岡) 샘이 나온다. 첫 모랭이 오르기 전에 일강(一岡) 바위를 만난다.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이다. 등달에서 왼쪽 능선으로 오르면 향로봉에 닿고, 오른쪽으로 코끼리바위를 지나 진행하면 아미타불의 입속(소림굴)으로 들어간다. 굴을 지나 전망대에 올라서면 노장대와 의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고열암과 선녀굴 위치도 가늠된다.

 

  구롱(九隴)의 의미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홉 언덕'이지만 순수한 우리말인 '아홉 모롱이'를 한자로 한역한 어휘이다. '아홉 모롱이'는 사투리로 '아홉 모랭이'라고도 하는데, 모랭이는 '산기슭을 돌아가는 산모롱이'이라는 의미이다. 롱(隴)은 阝(阜 언덕부)+龍(용용, 언덕 롱)으로 '용의 형상처럼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뜻한다. 순수한 우리말인 '모롱이'를 롱(隴)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1,100m,50m 내외,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도상거리로 약 4.75km 정도 이어지는데, 고저 차이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다. 두 모랭이와 세 모랭이 사이는 사립재골, 다섯 모랭이와 여섯 모랭이 사이에는 통천문이 있어 문바위골, 여덟 모랭이와 아홉 모랭이 사이는 방장문골이다.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동행한 '용유담 이야기' 작은 도서관 장석수 관장님은 내려가시고 우리는 영랑대로 향했다. 청이당행정구역상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100번이다. 처음에는 물이 산청으로 흘러가는데 왜 함양 땅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용유담의 용왕당과 청이당, 상봉의 성모당을 잇는 상·중·하 개념의 당집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하면 백모당·제석당·성모당처럼 청이당이 중당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청이당은 옛날부터 함양 사람들이 경영했기에 함양 땅이다. 청이당은 신라의 화랑들의 천왕봉에 오르는 베이스캠프였다. 청이당이 없어지자 일제강점기에는 함양 사람들(함양명승고적보존회)이 마암에 마암당을 지었다(1922년). 마암당은 당집보다는 산장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광점동과 새재 마을의 주통로는 새봉과 독바위 사이의 고개이다. 쑥밭재와 청이당은 거리가 멀다. 하봉 옛길이 예나 지금이나 산청과 함양의 경계이다. 

 

   지리산에서 산겨릅나무(산청목, 벌나무)는 무분별한 채취로 인해 등산로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등산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산청목과 비슷한 청시닥나무이다. 사진을 찍어 산영(山影) 曺교수님께 확인하니 '청시닥나무'라는 답이 왔다. 산청목과 청시닥나무는 잎으로 구별을 하는데, 청시닥나무의 줄기는 산청목과 비슷하고 잎은 단풍잎에 가깝다. 1925년 장화식(蔣華植)의 강우일기(江右日記)에서 청려목에 대한 설명은 구체적이다. 장화식의 일행인 장원길은 ‘청려목은 처음에는 푸른색이었다가 성장함에 따라 붉은색을 띠고 해를 거듭할수록 다른 색으로 변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색이 변하는 것은 청시닥나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산청목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김종직의 하산음(下山吟) 시 1구(杖藜纔下山)에서 '杖藜'는 '명아주 지팡이'일까. 청려목은 점필재 길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끝.

 

 

隱屛岩 姜時永(위치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1204번지)

 

▶ 은병암(隱屛岩)

 

  주자(朱子, 1130~1200)의 이름은 희(),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함. 54살 되던 1183년에 무이구곡(武夷九曲) 중 다섯 번째 구비에 해당하는 은병암(隱屛) 밑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가 터를 잡고 신진들을 가르친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신선이 살았던 곳으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다.

 

 

동신대(同信臺,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산 141-5)

 

  얼마 전 칠성님이 동신대(同信臺) 석각 사진을 보내왔다. 이곳에도 강시영(姜時永)이라는 이름이 있다. 지난 주말 동신대(同信臺)를 찾았다. 석각의 상태로 보아 후손들이 관리하는 듯하다. 동신대(同信臺)의 위치는 용유담에서 용담입문 석각을 지나 200m 정도 내려와 복숭아 파는 노점(첫 집)의 건너편에 있다.

 

 

'大'석각 I(위치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1204번지)
'大'석각 II(위치 : 은병암과 선녀굴 사이)

 

 지리산 국립공원 내 '大'자 석각에 대하여 : https://lyg4533.tistory.com/16488823

 

 

선녀굴
미타봉
노장대(독녀암)
고열암 굴
고열암에서 일강(쉼터)
소림선방 신갈나무(?)
바위 한가운데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題名于巖腹)

 

題名于巖腹 : 바위 한가운데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기약하고 이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에게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끼를 긁어내고 이름을 쓰도록(새기게) 하였다.〈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가운데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 국역본마다 해석이 다른데, 내 생각은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전면(복판 腹板)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석각을 새겼다고 해도 550년의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남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세 모롱이 사립재 갈림길을 지나 네 모롱이 초입에 이 바위가 있다.

 

 

여덟모랭이 방장문
천례탕 추정 바위
점필재가 쉬어간 청이당터 앞 계석(溪石)
청이당 터(좌측 하단 석축)

 

▼ 영랑대 일몰

 

▼ 영랑대 일출

 

 

▶ 선인들의 유람록과 기행시에 나오는 소년대 : https://lyg4533.tistory.com/16488103

 

문헌 하봉
비고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소년대(少年臺)  
2   1586년 양대박 선생의 두류산기행록 소년대(少年臺)  
3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소년대(少年臺)  
4   1611년 유몽인의 登少年臺 기행시외 1 소년대(少年臺)  
5   1849년 민재남의 산중기행 소년대(少年臺)  
6   1910년 배성호의 유두류록 하봉(下峰)  

 

 

소년대굴 I
소년대굴 II
중봉
천왕봉 뒤의 미륵불 형상의 바위

 죽헌집 권7 「부록 가장」

 

  일월대(日月臺)는 죽헌(竹軒) 정태현(鄭泰鉉 , 1858~1919)의 필획이다. 일두 정여창의 14대 후손인 죽헌 정태현이 일두의 발자취를 좇아 두류산을 유람하고 상봉에 올라 시를 짓고 각을 하였다. 석각의 시기는 1886(병술)년으로 죽헌 공이  28세 때의 일이다.

 

1886(병술)년 한성부주부 전환국 위원이 되었다. (중략) 다시 두류산과 덕유산을 다시 유람하면서 선조 문헌공께서 유람하신 곳과 지나가신 곳에 대해서 두루 찾아가 감동을 시로 지었다. 두류산 상봉에 이르러 특별히 시를 짓고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은 '간진천만첩(看盡千萬疊)'이란 선조의 시구에 더욱 감격했기 때문이다.[丙戌 漢城府主簿典圜局委員(중략)再遊頭流德裕 而至於先祖文獻公杖屨所 過之處 莫不周訪感賦 至於頭流上峯 特題詩刻石者 益感看盡千萬疊之句也.]<竹軒集卷之七 附錄 家狀>

 

 

연하봉(1487년 남효온은 두류산일록에서 연하봉을 소년대라고 하였다.)
연하선경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촛대봉의 명칭

 

유람록 촛대봉 비고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증봉(甑峰)  
2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빈발봉(賓鉢峰)  
3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頭流山錄) 사자봉(獅子峰)  
4    1807년 하익범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사자항(獅子項)  
5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 중봉(中峰)  
6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 촉봉(燭峯)  

 

 

 

사자봉(獅子峰,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사자항(獅子項, 1807년 하익범의 유두류록)
좌고대

 

▼ 곧은재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

 

  필자는 김종직의 직지(直旨)와 박여량의 직령(直嶺)을 곧은재로 이해한다. 유람록을 국역하는 분들이 현장을 답사하지 않고 원문 해석에 충실하다 보니 직지(直旨)를 직지봉과 지름길로 오역한 듯하다. 주민들은 '곧은재 능선'보다는 '곧은재'로 부른다. 현재 곧은재의 경사가 심한 구간은 우회길이 있다.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徑由直旨而下

 

遊頭流錄 '徑由直旨而下' 國譯에 대하여....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서(통하여) 내려왔다.→ 곧바로 곧은재를 따라 내려왔다.

 

*  : 곧바로, *  : ~을 따라서, ~을 통하여 * 直旨 : 直指 빠르게 감. 빠르게 가는 길(지름길), 똑바로 향함. 곧장 나아감. * 를 써야 하는데 로 빌려 씀.

 

 

2.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九月四日 <중략> 始達古帝釋堂舊基登眺左右巖壑指點山川形勢滿山所見非蒼檜則紅樹也非紅樹則自枯木也靑紫白黑參錯相暎如錦繡然西望百里餘有新刱蘭若二在無住之西曰靈源直嶺之西曰兜率

 

 九月四日 <중략> 비로소 옛 제석당(帝釋堂)에 도착하였다. 올라서 좌우의 바위와 골짜기를 조망하고, 산과 내의 형세를 가리키며 둘러보았다. 온 산에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회나무가 아니면 붉게 물든 나무였으며, 붉게 물든 나무가 아니면 저절로 말라죽은 나무였다. 푸르고 붉고 희고 검은 색깔이 뒤섞여 서로 비추어서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았다.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直嶺)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兜率庵)’이라 하였다

 

注 옛 제석당터는 소지봉을 지나 소나무 군락이 있는 바위 전망대이다. 직령(直嶺)은 곧을직 재령으로 글자 그대로 곧은재이다.

 

☞ 新增 곧은재과 오공능선에 대하여 : https://lyg4533.tistory.com/16488527

 

 

곧은재 초입
이정목 I
이정목 II
이정목 III
이정목 IIII

 

▶ 김종직이 하산음을 읊은 굽은 물가

 

下山吟[산에서 내려와 읊다]

 

杖藜纔下山(장려재하산) 명아주 지팡이 짚고 겨우 산에서 내려오니

澄潭忽蘸客(징담홀잠객) 갑자기 맑은 연못이 산객을 담그게 하네.

彎碕濯我纓(만기탁아영) 굽은 물가에 앉아 내 갓끈을 씻으니

瀏瀏風生腋(류류풍생액)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나오는구나.

平生饕山水(평생도산수) 평소 산수 욕심을 부렸는데

今日了緉屐(금일료량극) 오늘은 나막신 한 켤레가 다 닳았네.

顧語會心人(고어회심인) 여정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돌아보고 말하노니

胡爲赴形役(호위부형역) 어찌 육체의 노역에 나아갔다고 하겠는가.

 

 

 

 

점필재가 하산음을 읊은 굽은 물가

 

 

▶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청려목(靑藜木)

 

1. 1807하익범 유두류록(遊頭流錄)

 

○ 1807 4 2, 갑술일(양력 5월 9일)

  술자리를 끝내고 석문(통천문)을 따라 빠르게 정상을 내려오니 소나무와 노송 그리고 철쭉이 모두 꼿꼿이 굽어있는데 바람을 버티느라 왼쪽으로 쏠렸고 키는 겨우 한 자쯤 될 듯했다. 산등성이를 따라 사자항(獅子項 : 촛대봉)까지 20리 길에 청려목(靑藜木)가 많이 있었는데 지팡이 삼을 만한 것을 고르자 조금 있으니 한 묶음이나 되었다. 진달래는 막 꽃을 피우고 나뭇잎들도 나기 시작했으며 소나무 그루터기와 노송, 잣나무들이 바람과 서리에 시달려 뼈만 남은 채 서리처럼 희뿌연 빛을 띤 것, 반쯤 마르고 반쯤 살아 있는 것, 서 있는 것, 누워 있는 것, 잎이 다 떨어진 것, 썩은 것 등등 이루 다 형용하기 어려웠으니 참으로 그림 속의 경치였다.

 

酒罷 亟由石門以下 峯上則松檜躑躅 皆骯髒拳曲 爲風所持 左靡而纔盈尺 從山脊行獅子項二十里 路傍多靑藜 擇可杖者 須臾盈一束 鵑花初發 木葉始開 松蘖檜栢之老於風霜 骨立而霜白者 半枯而半生者 立者臥者禿者朽者 殆難名狀 眞畵中景

 

 

2.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

 

  그 나무들은 회나무(檜)가 많고 잣나무가 많고 청려목(靑藜木)이 많고 반은 참나무(떡갈나무, 신갈나무)이다. 그 풀은 청옥, 당귀, 작약, 도라지모시대(사삼) 같은 부류로 다 적을 수가 없다.

 

其木多檜多柏多靑藜 橡木居半焉 其草靑玉當歸芍藥沙蔘之類 不可勝記

 

 

3. 1924년 강계형 두류록(頭流錄)

 

  나는 본래 초목과 금수의 계보에 어두워 아는 것은 나무에 있어서 녹나무(櫲, 녹나뭇과의 상록 활엽 교목 지리산에 없음), 떡갈나무(檞), 박달나무(檀), 회나무(檜), 마가목(丁公藤), 청려목(靑藜枝) 등이고, 풀에는 작약, 당귀, 도라지모시대(吉更), 고사리 등속일 뿐이다.

 

余素昧草木禽獸譜 而所識者 於木 櫲檞檀檜丁公藤靑藜枝之屬 於草 則芍藥當歸吉更薇蕨之屬而已 <출처 : 이재구님 역>

 

 

4. 1925년 장화식(蔣華植)의 강우일기(江右日記)

 

  ○ 26일(중략) 내가 말하기를 장원길이 이르기를 지리산에는 청려목(靑藜木)이 있는데 그 껍질 색깔이 일 년에 각기 자라는 바가 다릅니다. 만약 금년에 푸른색이었으면 다음 해에는 붉고 그 다음 해에는 또 다른 색인데 지팡이 재료로 가장 적합합니다. 이것이 옛날에 만들어 쓰던 청려장이지요.’라고 하였네.”라고 했다. 안화집에게 한 자루 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지금 눈에 막혀 구할 수 없고 저 지리산에 이르러도 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어이하랴. 안화집이 말하기를 눈이 녹은 후에 제가 한 자루 꺾어서 장원길 편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余曰元吉云 智異山有靑藜木 其皮色一年所長各異 若今年靑 則明年赤 又明年又他色 最宜杖材 此古所爲靑藜杖也 請華執求一枚 云今阻雪不得 到彼則杖亦不得 柰何 華執曰 雪消後 吾折一枚 付元吉得達矣

 

 

5. 1926 이현욱 지리산 유람기록

 

  ○ 12일 하산하며 용은과는 절 문밖에서 서로 헤어졌다. 어제 왔던 길을 따라 돌아왔다. 숲 사이에는 지팡이에 견줄 만한 회초리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성유는 이것을 청려목(靑藜木)라고 하였다. 형윤은 그 말을 아주 믿고는 4~5개를 지팡이로 잘랐고, 나와 맹규 또한 각자 하나씩 지팡이로 잘랐다. 범왕촌에 도착하자 마을사람들이 보고는 크게 웃으면서 그런 물푸레나무를 어디에 쓸 거냐고 하였다. 제군들이 지팡이로 쓸 것들을 전부 버리고 성유를 조롱하면서 청려선생이라고 불렀다.

 

  十二日 下山龍隱相送寺門外 回從昨日所經處 林間有楚可比邛産 聖游以爲靑藜 衡允最信之 翦至四五策 余及孟圭亦各翦一策 到梵王村店 土人見而大笑曰 何用此水靑木爲也 諸君幷棄所策 嘲聖游爲靑藜先生 <출처 : 이재구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