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비천오공 오공능선 바른재에서 도촌마을까지

도솔산인 2022. 10. 31. 13:57

비천오공 오공능선 바른재에서 도촌마을까지

 

 

▣ 일 시 : 2022년 10월 30일(일)

▣ 코 스 : 벽소령 작전도로-벽소령대피소-바른재-오공능선-오공산-도촌(島村)

▣ 인원 : 2명 

▣ 날 씨 : 맑음

 

 

  오공산(蜈蚣山)의 지네 바위 부근에 의령(宜寧) 여씨(余氏)(1864~1939)의 묘가 있다. 의중마을에 살았던 청송 '임영택(林暎澤, 1866~1925) 공 부인의 무덤이다. 의중마을 나주임씨세보에 무덤의 위치가 공달비산(蚣達飛山)으로, 도마마을 청주한씨세보에는 공달산(蚣蟽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천면사편찬위원회 문호성 회장님은 '곰달비산'으로 알고 계셨다. 의탄리 의중마을 출신 치암(恥菴) 이용근(李榕近) 翁은 웅달비산비천오공결(熊達飛山飛天蜈蚣訣) 제목에서 웅달비산(熊達飛山)이라고 하였다. '곰달비산'을 한자로 바꾸면서 곰웅자를 쓴 것으로 이해한다. 마천 도촌 출신 시인 오동춘 박사(마천초등 17회 졸업)는 '내가 보고 듣고 겪은 마천 공비 현황'에서 '곰달래산(일명 웅달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1948년 12월 여·순반란 사건 때 반란군들이 바른재에서 마천으로 넘어온 루트이다. 능선 곳곳에는 참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 능선길은 백무동에서 오공능선→바른재→덕평마을→의신으로 연결되는 옛길이다. 1934년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의 『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에 "4월 1일에 백무촌(白武村)을 떠나 직치(直峙)를 거쳐 덕평(德坪)을 찾았다. 길은 점점 넓어진다. 평평한 곳에는 비록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더라도 종종 인가가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직치(直峙)는 바른재를 가리키는 듯하다.  금대산에서 오공능선을 바라보면 바른재에서 도촌(島村) 마을까지 길게 뻗어 내려오면서 좌우로 작은 골들이 발달되어 지네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비천오공(飛天蜈蚣)의 형국이다. 오공산(蜈蚣山), 공달비산(蚣達飛山), 공달산(蚣蟽山)은 같은 이름이다. 蜈蚣(오공, 지네오, 지내공)은 지네라는 뜻이다.

 

 

▶ 熊達飛山飛天蜈蚣訣(웅달비산비천오공결)

 

                          치암(恥菴)  이용근(李榕近, 1938~   )

 

頭流一脉向坎來 : 두류 한 맥이 북쪽으로 내려와

七丙七坤七巽開 : 칠병 칠곤 칠손으로 벌려 있네.

乾亥三相袍玉帶 : 건해방 삼상은 도포 옥대요

乙辰倉庫品資嵬 : 을진방 창고는 품자로 높다.

庚申尖筆層巒聳 : 경신방 첨필은 층만으로 솟았고

寅甲印岩跪揖堆 : 인갑방 인암은 괴읍으로 높네.

疊疊靑龍多字橫 : 첩첩한 청룡은 다자로 비켰고

重重白虎似弓回 : 중중한 백호는 활같이 돌았네.

 

☞ 이용근(李榕近, 1938~  ) : 본관은 경주 호는 치암(恥菴) 한학자. 의중마을에 살았던 竹圃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의 증손자. 조부는 죽포공의 次子 諱 鍾七, 父 諱 整雨(1908~1996), 가학으로 부친께 한학을 배웠고 독선생을 모셔놓고 세 분이 9년간 한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함께 공부한 분 중 한 분은 벽송사에 출가한 원응스님이다. 榕은 相자와 같은 항렬이다. 자손이 귀해서 항렬자 相대신 榕을 썼다고 한다.(圭-鍾-雨-相-熙)

 

 

▶ 마천 곰달래산(일명 웅달산) 전투

 

오동춘 박사(마천 도촌 출신 마천초등 17회 졸업)

 

   곰달래산은 지리산의 한 봉우리로 도촌마을 뒷산이다. 800m의 산 높이를 가지고 있다 이 산에 숨어 있는 공비토벌 작전이 1948년 12월 16일에 있었다. 3 연대(진주),15 연대(마산)로 구성된 토벌군이 민보단 박계원 등의 길잡이를 앞세워 진격해 정상을 향해 올라갔으나 망원경으로 지켜본 공비들이 유효사거리 지점에서 중무기(기관총)로 토벌군을 공격했다. 얼떨결에 전투준비가 부실했던 토벌군의 인명 피해가 컸다. 그러나 곰달래산(일명 웅달산) 건너 위치한 백무동 공비 아지트를 완전히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 곰달래산 기슭에 위치한 도촌에 콩 볶듯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들었다 저녁 무렵 하산하여 내려오는 군인들을 보았다.

 

   도촌마을 위쪽에 있는 강화춘 씨 댁 그리고 우리 집 근처 논바닥에 군인들이 청솔 모닥불을 피워놓고 5, 6명의 군인들이 불을 쬐고 있었다. 나도 불을 쬐며 곁에 당거에 누워있는 군인 시체와 입에 총 맞은 군인도 보았다. 총상 입은 군인은 누가 눈(雪)을 이야기하니 눈 한 움큼 먹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다. 소위 계급 단 장교가 누가 눈(雪) 소리를 했느냐고 주변에 둘러선 부하들을 나무라고 총 맞은 군인에게 치료 없이 눈 먹으면 너는 금방 죽게 된다. 저 건너 송알 신작로에 대기 중인 군 트럭을 타고 병원 치료 후 물을 먹어야 살 수 있다며 친절하게 그 병사를 타일러 주었다.

 

   전투 경찰로 곰달래산 800 고지 전투에 참여했던 전투 경찰 하나도 볼을 관통하는 총을 맞고 살아난 것은 자기가 조상의 덕이라 말하며 동료에 의지한 채 고통을 참으며 불을 쬐고 있었다. 많은 전사 시체를 민보 단원 동순호(원정), 표태평(강청), 박계원(실덕), 이동근(가흥) 등 30여 명이 도촌으로 운반하여 송알 신작로 군용 트럭에 실었다. 800 고지 전투가 끝난 뒤의 토벌군 군인들의 모습 일면을 나는 도촌 우리 집 앞 논바닥 모닥불 함께 쬐며 생생하게 보았다. 곰달래산은 내가 어렸을 때 나의 고모 오경남 처녀와 현 나드리 농원 사장 신평수 어머니 강두김 처녀 둘이서 나를 데리고 나물 뜯으러 갔던 산으로 내 유년 추억이 깊은 고향마을 산이기도 하다.

 

注 곰달래산은 오공산(문헌에는 蚣達飛山)을 가리킨다.

 

출처 : 내가 보고 듣고 겪은 마천 공비 현황(지리산 마천면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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