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도솔암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1686년)는 62세 때인 1686년(숙종 12) 3월부터 1688년(숙종 14) 9월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일대의 명산 고찰 및 서원 등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유람기이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1686년 3월 어머니 3년상을 마친 후, 62세부터 3년 동안 전국의 사찰을 순력(巡歷)하며 산중일기를 남겼다. 우담이 산과 산사를 탐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첫 유람은 1648년 스물네 살 때였는데, 아버지 임지인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회양은 금강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선생은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산수벽(山水癖)에 빠진 듯하다. 1676년에는 속리산, 1680년에는 백운산과 두타산을 유람하였다. 산중일기를 지은 이후에도 1689년에는 소백산과 학가산, 1690년에는 청량산과 치악산, 1691년에는 미륵산 등 해마다 명산대천을 유람하였다.
- 1차 : 1686년 3월 13일부터 1687년 1월 23일까지 10개월간 속리산, 지리산, 덕유산 일대를 유람함.
- 2차 : 1687년 3월 8일부터 3월 17일까지 8일간 치악산 일대를 유람함.
- 3차 : 1687년 8월 2일부터 10월 20일까지 2개월여 동안 금강산 일대를 유람함.
- 4차 : 1688년 4월 10일부터 9월 19일까지 5개월간 경상도 안동, 의성, 청송 등지의 서원 및 팔공산 일대를 유람함.
정시한(丁時翰)은 3년(22개월, 총 600일) 동안 전국의 명산 고찰을 두루 유람하면서 매일매일 그날의 일과 자신의 감상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여행기간 동안 총 300여 사찰에 들러 주위 환경과 감상, 만난 승려들의 이름과 성품까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히, 지리산에서 170여 일의 기록은 지리산 인문학의 보고(寶庫)이다. 산중일기는 17세기 지리산의 사찰 현황과 인물에 대한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된다. 다음은 1686년 윤4월 14일 부터 윤 4월 17일까지 무주암에서 칠불암까지 4일간의 일정이다. 우담 정시한은 1686년 윤4월 14일 무주암을 출발하여 무량굴을 거쳐 두타암(宿)→도솔암(宿)→칠불암으로 넘어가는데 영원사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 의문이다. 뇌전마을 위 불당골(절골)에 암자터가 두 곳이 있는데 무량굴과의 고도가 비슷하다. 두타암에서 도솔암까지의 거리가 20리라고 하였으니 발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윤4월 14일 맑은 뒤 흐려짐∥무주암
천인암(千人庵)의 능연(能衍)과 추우(秋祐)와 지응(智應) 등이 왔다 갔고, (妙寂庵의) 사철(思哲) 수좌도 왔다 갔다. 오후에 다시 윤판옥(輪板屋)으로 옮겨서 유숙하였다.
☞ 윤판옥(輪板屋) : 보통 귀틀집으로 불리는 윤판옥은 지름이 15cm~25cm 정도 되는 둥근(輪) 통나무를 우물정(井) 모양으로 쌓아 올려 벽을 삼고 나무가 맞물리는 네 귀가 잘 맞도록 짠 뒤 사이에는 진흙을 발라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했으며, 지붕은 억새, 산죽, 굴피, 너와 판자(板) 등으로 덮는다. 귀틀집은 이름도 다양해서 평안남도에서는 "방틀집(方機家), 목채집(木叉家)" 평안북도에서는 "틀목집(機木家), 또는 말집", 울릉도에서는 "투방집, 또는 투막집", 지리산 주변에서는 "윤판집" 으로도 불리며 지방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윤4월 15일 흐림∥두타암
아침 식사 뒤 자겸(自謙) 스님이 돌아와 반갑게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상고대암(上高臺庵, 현 삼불사 추정)의 수좌 보인(寶仁) 스님, 천인암(千人庵, 현 문수암 추정)의 행총(幸聰) 스님이 찾아왔다. 이들과 잠시 이야기하다 무주암(無住庵)을 떠나면서 여러 스님들과 작별하고 요열(了悅) 스님과 경숙(庚宿)이를 데리고 무량굴(無量窟)에 도착했다.
의철 수좌를 도솔암(兜率菴)으로 보내 온돌을 준비토록 했다. 두타암(頭陀菴)으로 내려가니 원혜(圓慧)와 석겸(釋謙) 두 노장 스님이 서로 영접하였다. 저녁 식사 뒤 숙박문제 때문에 요열(了悅) 스님은 인사하고 떠났다.
윤4월 16일 흐린뒤 맑음∥두타암→도솔암
아침 식사 뒤에 석겸(釋謙)과 경숙(庚宿)이를 도솔암으로 먼저 보냈다. 잠시 뒤 사철(思哲)과 삼응(三應) 스님이 묘적암(妙寂菴)과 무주암(無住菴)에서 내려왔고, 두 수좌 스님과 함께 요열(了悅)도 왔다. 요열(了悅)은 인사하고 갔다. 우리는 고개 둘을 넘어 사철 수좌가 봐둔 암자터에 올라가 보았다. 터는 바위로 둘러싸여 있고 그 가운데는 기괴한 입석이 많았다. 잠시 머물다가 나무 그늘로 해서 밑으로 내려와 도솔암(兜率菴)에 도착했는데 의철 스님이 먼저 와 있었다. 온돌이 너무 뜨거웠다.
저녁을 먹은 뒤 삼응(三應) 상좌와 상현(尙玄) 스님이 해인사에서 왔는데 엿(飴糖)을 대접했다. 모두 함께 유숙하였다. 오늘은 약 20여 리를 걸었다.
윤 4월 17일 흐린 뒤 맑아졌고 저녁에 비가 내림∥도솔암→칠불암
아침 식사 뒤 의철(義哲)·상현(尙玄) 스님과 작별하였다. 사철(思哲)·삼응(三應)·석겸(釋謙) 스님과 경숙(庚宿) 스님과 함께 도솔암(兜率菴)을 출발하여 주봉으로 약 5리쯤 올라갔다. 다시 산등성이를 따라 돌만 있고 길이 없는 땅을 약 15리쯤 걸어서 반야봉 응막(鷹幕)에 닿았다. 점심 때 청옥채(靑玉菜)를 한 단 캤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니 구름에 걸친 산과 푸른 바다가 아득하게 눈에 들어온다. 동·서·남 세 방향으로 바다와 하늘이 맞닿았으며 구름과 노을이 명멸한다. 계룡산(鷄龍山)·속리산(俗離山)·가야산(伽倻山) 등도 눈 밑에 나열해 있다. 실로 반평생 만에 보는 기이한 경관이었다. 산 위에는 수십리에 걸쳐서 철쭉꽃이 만발하였는데, 밀집해 피어있는 곳은 높이가 네다섯 장이나 되며 노송나무 숲 사이에서 붉은 꽃과 흰 꽃이 가득 피어있다. 천천히 걸으며 못 보던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을 감상했다. 이들을 보느라 다른 일을 할 틈이 없었다. 고봉준령에 올라갔는데 돌이 삐죽삐죽 높이 솟아 있어 비할 데 없이 길이 험하였으나 다리가 아프고 몸이 피곤한지를 느끼지 못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칠불암(七佛庵)에 닿았다. 수좌 해청(海淸) 스님과 승당승(僧堂僧) 광삼(廣森) 스님이 맞아주셨다. 해청(海淸) 스님이 저녁을 준비해 주었는데 이 스님은 그 됨됨이가 밝고 민첩한 것이 사랑스럽다. 건물이 퇴락되어 차제에 중창하여 모두 수리하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 다하지는 못했다. 석겸(釋謙) 스님과 함께 승당에서 묵었다. 이 방은 바닥의 높낮이가 고르지 않지만 (구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만들었는데,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그 따뜻한 기운이 끝에까지 이르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사철(思哲) 스님과 삼응(三應) 스님도 선당(禪堂)에서 묵었다. 오늘은 약 40리를 걸었다.
출처 : 정시한의 산중일기(신대현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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