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서동고암

도솔산인 2022. 11. 27. 18:25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서동고암

 

 

일 시 : 20221126()~27()

코 스 : 무량굴-정자터-암자터와 석굴-암자터-묘적암 전대-회암당 부도터-상무주암-서동고암

인 원 : 3

날 씨 : 맑음(5도)

 

 

1.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무량굴과 묘적암

 

▶ 동선 : 무주암-무량굴-절터와 굴(寺基及窟)-묘적암

 

 윤 4월 11일, 아침 재식(齋食, 佛家에서의 食事)을 한 뒤에 삼응(三應) 수좌와 함께 무량굴(無量窟)에 갔다가 다시 묘적암(妙寂菴)으로 올라왔다. 절터와 굴(寺基及窟)을 두루 보고 묘적암(妙寂菴)에 이르러 사철(思哲) 수좌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잠시 후에 무주암(無住菴)으로 돌아왔다. 약 10여 리를 걸었다. 돌길이 매우 험하여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閏 十一日朝齋後 與三應首坐 往無量窟 又上妙寂菴 歷見寺基及窟 至妙寂思哲坐語 少時還無住菴 約行十餘里 石路極險 登陟頗勞

 

 

 

무량굴

정자터 석축
절터와 굴(寺基及窟)
문확석
암자터

 

 

2.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묘적암과 전대

 

▶ 동선 : 무주암-묘적암-서암터-묘적암-앞에 있는 臺(前臺)-묘적암 방-무주암

 

○ 1686년 9월 초이틀 맑음 아침에 얼음이 얼었다. 혜철(惠哲) 수좌가 아침을 준비했다. 식사 뒤에 아들 도항(道恒)이와 혜철(惠哲) 수좌와 함께 묘적암(妙寂菴)에 가보았다. 도중에 계학(戒學) 스님을 만나 함께 서암(西庵)를 가보았다. 군자사에서 자신(自信) 스님도 와서 만났다. 다시 묘적암(妙寂菴)으로 돌아와 앞에 있는 대(前臺)에 올라갔다가 방에 들어갔다. 안에는 박광선(朴光善)이라는 사람이 와있었는데 나이는 을축생이다. 집은 함양 읍내 서원(書院)촌이라고 한다.

 

○ 九月初二日晴朝氷 惠哲首座備饋朝食 朝食後 與恒子及惠哲首座 往見妙寂菴 過僧戒學迎見 仍與往見西菴基 君子僧自信來現 又還妙寂菴 登前臺入坐房中 朴光善稱名人來現 年乙丑生 自言家在咸陽邑內書院村云

 

 

 

묘적암 전대(추정)
묘적암 전대(추정)
묘적암(妙寂菴) 앞에 있는 대(前臺)에서 바라본 조망
회암당 승탑

▶ 회암당 승탑(부도)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 구간. 영원사와 상무주암 등산로 상에 소재하고 있는 승탑으로 학계는 물론이고 전문가들도 인지 못 하는 승탑이다.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회암당 승탑은 김천 청암사에 있는 부도비를 통하여 당시의 시대 상황과 분사리(分舍利), 승려들의 계보,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귀중한 탑이다. 탑은 상무주암 가까이 있는 평평한 좁지 않은 터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길을 탐방하는 이영규 님은 이곳을 1686년 정시한 선생의 산중일기에 기록된 묘적암(妙寂庵) 터로 추정(比定)하고 있다. 탑은 비지정 문화재로 방형 지대석 위에 특별한 문양을 조식하지 않고 탑신석에 회암당(晦巖堂) 당호를 음각하였고, 별석으로 제작한 큼직한 양련을 표현한 보주를 별석으로 올린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석종형 부도이다.

 

  회당 정혜(晦庵 定慧. 1685~1741)의 속성(俗姓)은 김 씨, 본관은 창원. 9세에 범어사 자수선사(自守禪師)에 출가하였다. 자수선사는 스님의 총명함을 간파하고 충허(沖虛) 스님에게 추천하였고, 보광 화상(葆光和尙)에게 구족계를 받고 경전을 배웠다. 추봉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보광 원민 스님의 법을 받들어 1711년 율사(栗寺)에서 처음으로 강석(講席)을 열었다. 이로써 스님은 부휴 선수,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의 법 맥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스님은 석왕사·명봉사·청암사·벽송사 등 명찰(名刹)에서 강의하였으며 57세에 청암사에서 입적하였다. 자료에 따라 회암의 한문 표기가 晦庵晦菴으로 통일되지 않았다. 회암당 승탑이 입적한 경북 김천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에 봉안된 까닭은 스님 입적 3년 후(1744) 세운 부도비와 영원사 설파당 부도 비문, 용추사 문곡대사 비명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김천 청암사에 있는 회당대사 탑비(晦堂大師 塔碑. 1744)는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조현명이 짓고, 판부사 서명균이 쓰고 김상복이 새겼다. 회암당 다비 후 수습된 정골(頂骨)을 불영산과 지리산에 모셨다는 부도비 명문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부도비에는 지리산에 모신 까닭을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벽송사에서 머물며 강석(碧松諸名刹)을 열고, 부휴, 벽암 스님의 법맥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며, 회암의 제자이며 영원사에 주석했던 설파 상언과 장수사(용추사)에 머물던 제자 문곡대사의 강력한 의지로 분사리 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 출처 : 『지리산 마천면사』 집필위원 임병기님

 

 

상무주암

 

 3.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묘적암과 서동고암

 

▶ 동선 : 무주암-묘적암-서동고암-무주암-지자대-동대

 

윤4월 9일 흐린 뒤에 맑음 아침식사 뒤 삼응(三應) 스님과 함께 묘적암(妙寂菴)에 가서 잠시 앉아 있다가 사철·삼응 스님과 함께 서동고암(西洞古菴) 갔다. 암자는 석대 위에 자리 잡았는데 좌우의 입석이 기괴하다. 동쪽 가에는 석천(石泉)도 있다. 산세가 휘감아 돌아 바람도 많지 않으니 가히 몇 칸짜리 집을 지을 만하다. 더군다나 맑은 기운마저 서려 있으니 정말로 이 곳은 도인이 수련할 만한 곳이다. 신순 수좌를 무주암으로 오라 해서 집을 짓고 샘을 파면 어떠한지 헤아려보게 했다. 샘을 두 곳 파는 것은 샘물이 부족한 게 흠이기 때문이다.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경숙이가 군자사에서 잣을 구해왔다. 군자사 스님이 미나리 두 단을 보내왔다. 저녁식사 뒤 다시 지자대(止慈臺) 동대(東臺)에 갔다 온 다음 사철 수좌와 함께 잤다.

 

 

 

서동고암 추정터
서동고암 추정터
회암당 승탑
묘적암 전대(추정)
암자터
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