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오는 묘적암과 서동고암

도솔산인 2022. 12. 11. 23:23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오는 묘적암과 서동고암

 

 

 일 시 : 2022 12 10()~11()

 코 스 : 무량굴-절터와 석굴-암자터-묘적암 전대-회암당 부도터-상무주암-서동고암-빗기재-영원사

 인 원 : 4명(박지합류 1명)

 날 씨 : 진눈개비 새벽맑음(-4도)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1686)」는 우담(愚潭)62세 때인 1686(숙종 12) 3월부터 1688(숙종 14) 9월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일대의 명산 고찰 및 서원 등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유람기이다. 정시한(丁時翰)3(22개월, 600) 동안 전국의 명산 고찰을 두루 유람하면서 매일매일 그날의 일과 자신의 감상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특히, 지리산에서 170여 일의 기록은 지리산 인문학의 보고(寶庫)이다. 「산중일기」17세기 지리산의 사찰 현황과 인물에 대한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된다.

 

  정시한은 1686년  4월 15일~윤 4월 16일까지 31일 동안 군자사(1일), 안국사(3일), 무주암(13일), 실상사(1일), 견성암(1일), 천인암(10일), 두타암(1일), 도솔암(1일)에서 유숙한다. 윤 4월 11일 동선을 보면 "무주암에서 무량굴로 내려갔다가 절터와 석굴을 두루 보고 묘적암으로 올라와 무주암(無住菴)으로 돌아갔다. 대략 10여 리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시한은 무주암에서 무량굴→석굴이 있는 암자터에서 회암당 승탑으로 오른 듯하다. 

 

  「산중일기」에 묘적암(妙寂菴)이 자주 등장한다. 서동고암과 함께 묘적암(妙寂菴)은 무주암의 지근거리에 있다고 본다. 묘적암의 수좌 사철(思哲) 스님은 수시로 무주암에 드나들었고, 우담 정시한 또한 묘적암에 왕래했다. 4월 24일 무주암의 윤판옥(輪板屋)이 불에 타서 수리하는 동안 실상사와 견성암에서 하루씩 자고 주로 천인암(10일)에 머문다. 「산중일기」에 언급한 천인암(千人庵)은 천인굴이 있는 지금의 문수암, 상고대암은 삼불사로 추정한다. 견성암 터는 문수암 아래 약 400m 지점 왼쪽 기슭에 있다. 샘터도 있고 기와 편과 백자 편이 수두룩하다. 조금 아래에 해우소 터도 있다.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된 견성암터에서 약 150m 위 지점이다. 「산중일기」에 나오는 천인암(千人庵)과 『천령지』에 나오는 천인암(天仁庵)은 다른 암자로 보인다. "천인암(天仁庵)이 무주암 남쪽 5리에 있다.[天仁庵在無住庵南五里]"라고 하였으니 무량굴이 천인암(天仁庵)일 가능성도 있다.  

 

  1686년 9월 2일 정시한은 무주암에서 아침 식사 후에 아들 도항(道恒)이와 혜철(惠哲) 수좌와 함께 묘적암(妙寂菴)으로 가는 도중에 계학(戒學) 스님을 만나 서암(西庵) 터에 들른다. 여기에서 서암은 서동고암(西洞古菴)을 가리키는 듯하다. 정시한은 무주암에서 서암(西庵) 터를 다녀온 후 묘적암으로 돌아와 묘적암(妙寂菴) 전대(前臺)에 올라갔다가 방으로 들어간다. 묘적암 전대는 회암당 부도터 앞 20여m를 진행하면 전망대가 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회암당 부도터를 묘적암(妙寂菴) 터로 추정한다. 서동고암(西洞古菴)은 글자 그대로 '무주암 서쪽 구렁(골짜기)의 옛 절터'로 이해가 되는데, 정시한의 「산중일기」와 일치한다.  끝. 

 

   윤판옥(輪板屋) : 보통 귀틀집으로 불리는 윤판옥은 지름이 15cm~25cm 정도 되는 둥근() 통나무를 우물정() 모양으로 쌓아 올려 벽을 삼고 나무가 맞물리는 네 귀가 잘 맞도록 짠 뒤 사이에는 진흙을 발라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했으며, 지붕은 억새, 산죽, 굴피, 너와 판자() 등으로 덮는다. 귀틀집은 이름도 다양해서 평안남도에서는 '방틀집(方機家), 목채집(木叉家)' 평안북도에서는 '틀목집(機木家), 또는 말집', 울릉도에서는 '투방집, 또는 투막집', 지리산 주변에서는 '윤판집'으로 불리며 지방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1.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무량굴과 묘적암

 

▶ 동선 : 무주암-무량굴-절터와 굴(寺基及窟)-묘적암

 

 윤 4월 11일, 아침 재식(齋食, 佛家에서의 食事)을 한 뒤에 삼응(三應) 수좌와 함께 무량굴(無量窟) 갔다가 다시 묘적암(妙寂菴)으로 올라왔다. 절터와 굴(寺基及窟)을 두루 보고 묘적암(妙寂菴)에 이르러 사철(思哲) 수좌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잠시 후에 무주암(無住菴)으로 돌아왔다. 약 10여 리를 걸었다. 돌길이 매우 험하여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閏 十一日朝齋後 與三應首坐 往無量窟 又上妙寂菴 歷見寺基及窟 至妙寂思哲坐語 少時還無住菴 約行十餘里 石路極險 登陟頗勞

 

 

 

무량굴
문확석
절터와 석굴
암자터 석축

 

2.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묘적암과 전대

 

▶ 동선 : 무주암-묘적암-서암터-묘적암-앞에 있는 臺(前臺)-묘적암 방-무주암

 

○ 1686년 9월 초이틀 맑음 아침에 얼음이 얼었다. 혜철(惠哲) 수좌가 아침을 준비했다. 식사 뒤에 아들 도항(道恒)이와 혜철(惠哲) 수좌와 함께 묘적암(妙寂菴)에 가보았다. 도중에 계학(戒學) 스님을 만나 함께 서암(西庵)를 가보았다. 군자사에서 자신(自信) 스님도 와서 만났다. 다시 묘적암(妙寂菴)으로 돌아와 앞에 있는 대(前臺)에 올라갔다가 방에 들어갔다. 안에는 박광선(朴光善)이라는 사람이 와있었는데 나이는 을축생이다. 집은 함양 읍내 서원(書院)촌이라고 한다.

 

○ 九月初二日晴朝氷 惠哲首座備饋朝食 朝食後 與恒子及惠哲首座 往見妙寂菴 過僧戒學迎見 仍與往見西菴基 君子僧自信來現 又還妙寂菴 登前臺入坐房中 朴光善稱名人來現 年乙丑生 自言家在咸陽邑內書院村云

 

※ 참고 : 윤4월 16일 도솔암, 윤4월 17일 칠불암--------8월 19일 불일암, 8월 20일 화엄사, 8월 21일 남원읍, 8월 22일 실상사, 8월 23일 실상사, 8월 24일 견성암을 경유하여 천인암, 8월 25일~9월 2일(7일) 무주암, 9월 3일 금대암

 

 

묘적암 전대
묘적암 전대 전경
묘적암 전대
회암당 승탑(묘적암터?)

 

▶ 회암당 승탑(부도)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 구간. 영원사와 상무주암 등산로 상에 소재하고 있는 승탑으로 학계는 물론이고 전문가들도 인지 못 하는 승탑이다.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회암당 승탑은 김천 청암사에 있는 부도비를 통하여 당시의 시대 상황과 분사리(分舍利), 승려들의 계보,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귀중한 탑이다. 탑은 상무주암 가까이 있는 평평한 좁지 않은 터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길을 탐방하는 이영규 님은 이곳을 1686년 정시한 선생의 산중일기에 기록된 묘적암(妙寂庵) 터로 추정(比定)하고 있다. 탑은 비지정 문화재로 방형 지대석 위에 특별한 문양을 조식하지 않고 탑신석에 회암당(晦巖堂) 당호를 음각하였고, 별석으로 제작한 큼직한 양련을 표현한 보주를 별석으로 올린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석종형 부도이다.

 

  회당 정혜(晦庵 定慧. 1685~1741)의 속성(俗姓)은 김 씨, 본관은 창원. 9세에 범어사 자수선사(自守禪師)에 출가하였다. 자수선사는 스님의 총명함을 간파하고 충허(沖虛) 스님에게 추천하였고, 보광 화상(葆光和尙)에게 구족계를 받고 경전을 배웠다. 추봉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보광 원민 스님의 법을 받들어 1711년 율사(栗寺)에서 처음으로 강석(講席)을 열었다. 이로써 스님은 부휴 선수,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의 법 맥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스님은 석왕사·명봉사·청암사·벽송사 등 명찰(名刹)에서 강의하였으며 57세에 청암사에서 입적하였다. 자료에 따라 회암의 한문 표기가 晦庵 晦菴으로 통일되지 않았다. 회암당 승탑이 입적한 경북 김천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에 봉안된 까닭은 스님 입적 3년 후(1744) 세운 부도비와 영원사 설파당 부도 비문, 용추사 문곡대사 비명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김천 청암사에 있는 회당대사 탑비(晦堂大師 塔碑. 1744)는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조현명이 짓고, 판부사 서명균이 쓰고 김상복이 새겼다. 회암당 다비 후 수습된 정골(頂骨)을 불영산과 지리산에 모셨다는 부도비 명문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부도비에는 지리산에 모신 까닭을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벽송사에서 머물며 강석(碧松諸名刹)을 열고, 부휴, 벽암 스님의 법맥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며, 회암의 제자이며 영원사에 주석했던 설파 상언과 장수사(용추사)에 머물던 제자 문곡대사의 강력한 의지로 분사리 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 출처 : 『지리산 마천면사』 집필위원 임병기님

 

 

회암당 승탑
무주암 서대
무주암 석축 시주

■ 無住庵 築坮施主(무주암 축대시주) 마애석각 명문

 

• 소 재 지: 함양군 마천면 마천삼정로 544-342 (마천면 삼정리 154-1번지) 상무주암

• 행 적 자: 정문수(鄭文殊)외 3인

• 연 대: 일제강점기

• 석각시기: 1924년

[ 개요 ] 1924년 상무주암(上無住庵) 축대 공사에 시주한 정문수(鄭文殊), 최정심(崔淨心), 박정연(朴淨蓮), 화주 이남파(化主 李南坡)의 인명이 있다.

 

 

3.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서동고암(西洞古菴)

 

▶ 동선 : 무주암-묘적암-서동고암-지자대의 동대

 

  ○ 윤4월 9일 흐린 뒤에 맑음 아침식사 뒤 삼응(三應) 스님과 함께 묘적암(妙寂菴)에 가서 잠시 앉아 있다가 사철·삼응 스님과 함께 서동고암(西洞古菴) 갔다. 암자는 석대 위에 자리 잡았는데 좌우의 입석이 기괴하다. 동쪽 가에는 석천(石泉)도 있다. 산세가 휘감아 돌아 바람도 많지 않으니 가히 몇 칸짜리 집을 지을 만하다. 더군다나 맑은 기운마저 서려 있으니 정말로 이 곳은 도인이 수련할 만한 곳이다. 신순 수좌를 무주암으로 오라 해서 집을 짓고 샘을 파면 어떠한지 헤아려보게 했다. 샘을 두 곳 파는 것은 샘물이 부족한 게 흠이기 때문이다.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경숙이가 군자사에서 잣을 구해왔다. 군자사 스님이 미나리 두 단을 보내왔다. 저녁식사 뒤 다시 지자대(止慈臺) 동대(東臺)에 갔다 온 다음 사철 수좌와 함께 잤다.

 

 

 

지자대
무주암 동대
동대 전망
필단사리탑(210614)

 

함양 마천면 상무주암 필단(筆端)사리 삼층석탑

 

  861(신라 경문왕 1)에 영원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후의 사적은 전하지 않고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스님이 팔공산 자락 영천 은해사 거조암에서 정혜결사를 주도한 후 승보사찰 순천 송광사의 전신인 수선사(修善寺)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3년을 머물렀다. 그 사실은 1210, 왕명으로 김군수가 지은 지눌국사 비에 지거지리 득대혜보각(至居智異, 得大慧普覺) 명문으로 확인된다. 보조 지눌 이후 상무주암에서는 수선사의 6대 사주인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冲止. 1226~1293)1284년부터 1286년까지 약 2년 동안 주석하였다고 원감국사 비문에 새겨져 있다.

 

  이후 탁영 김일손(1464~1498)의 속두류록(1498년)에는 선생이 금대암에서 상무주암과 군자사를 바라보며 달려가고 싶었지만 폭우로 계곡물이 불어 갈 수 없었다(遙指上無柱君子寺. 欲往而不可渡矣)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에도 상무주암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많은 대선사들이 수행처로 삼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쳤으며, 현존하는 당우는 법당과 요사를 겸한 인법당(因法堂)과 산신각, 필단사리탑으로 불리는 삼층석탑이 있으며, 오래전부터 근대의 큰 선승인 현기 스님이 주석한다.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은 고려 말 승려 각운(覺雲)의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으로 일제강점기에 보수한 석축 위에 위치한 삼층석탑이다. 탑 명칭은 각운 스님이 스승 진각국사 혜심이 전한 30권의 염송을 정리한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30권의 저술을 완료하였을 때 붓끝에서 빗방울처럼 떨어진 오색 사리를 수습하여 봉안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한 사실은 1538. 선문 염송설화에 우주옹이 쓴 발원문 중에 사이기시 필단오색사리낙여우점(寫斯記時 筆端五色舍利落如雨點) 명문으로 확인된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임에도 우담 정시한의 산중일기(1686년 윤 414)에는 천인암의 능연·추우·지웅 스님 외 여러 스님이 왔다 갔고 사철 수좌도 다녀갔다. 오후에 다시 윤판옥으로 옮겨서 묵었다.”에는 사리탑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금명보정스님(1881~1933)의 상무주암 시()에는 리변주탑귀난지(離邊珠塔鬼難知)라는 구절이 실려 있으나 필단사리탑을 지칭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현재 필단사리탑의 크기는 귀신도 알아보지 못할 작은 탑은 아니기 때문이다.

 

 

  上無住庵-금명(錦溟) 보정(寶鼎) 스님(1881~1930)

 

  登庵橫擧一衝推 : 암자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살펴보니

  萬里群山似局棋 : 만리(萬里)에 여러 산은 바둑판 같네

  庭上玉波天不隱 : 마당 위의 우물은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離邊珠塔鬼難知 : 울타리 가의 사리탑은 귀신도 알아보기 어렵네

  月生水國龍開眼 : 수국에 달이 떠오르니 용이 눈을 뜨고

  霧溢雲江野闢池 : 운강에 운무가 넘치니 들판에 연못이 열리네

  入定高僧無住着 : 선정(禪定)에 든 고승은 집착(住着)이 없으니

  木牛禪翁覓牛時 : 목우자(木牛子) 선승이 소를 찾을 때가 되었네

 

 

  필단 사리탑은 단층 기단의 2, 3층 탑신석이 결실된 삼층석탑으로 비지정 문화재이다. 석축 위에 단층 방형 기단을 두었다. 초층 탑신에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隅柱)가 희미하게 모각 되었고, 2, 3층 탑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기울기)는 급하고, 하부의 옥개석 층급 받침은 전층 3단이며, 절수구는 생략되었다. 옥개석 상부에 탑신 굄은 없으며, 내림 마루는 높고 전각의 반전은 경쾌하다. 3층 옥개석 상부에는 1단 각형 굄을 조출하였고 상륜부의 일석(一石)으로 조성된 석탑 부재는 노반과 복발, 보주로 추정되지만 분명하지 않다.

 

  필단사리탑이 붓끝에서 쏟아진 사리를 수습한 탑이라는 설화는 불교 이적(異跡)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따라서 상무주암 삼층석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 또는 법사리(法舍利. 불교 경전, 스님의 유물 등)를 봉납한 석탑 이거나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를 저술한 각운 스님의 승탑, 마지막으로 함양 마천면 금대암, 지리산 법계사 바위 위에 조성된 석탑처럼 고려초기에 널리 유행하여 전국에 많이 분포하였던 산천 풍수비보탑 계열의 삼층석탑으로 소형화되고 세부가 간략화된 고려탑으로 추정된다.

 

* 출처 : 『지리산 마천면사』 집필위원 임병기님

 

 

상무주암
서동고암 터
1201.6봉에서 바라본 삼정산(서동고암과 회암당 승탑터가 가늠된다.)

 

 

4.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영원암(靈源菴)과 마이봉

 

  4 2일 신미일. <중략> 해가 뜰 때부터 등산을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 비로소 갈월령(葛越嶺)을 넘었다. 갈월령은 반야봉(般若峯)의 세 번째 기슭이다. 가느다란 대나무가 밭을 이루고 몇 리나 펼쳐져 있었지만, 그사이에 다른 나무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사람이 개간하여 대나무를 심어놓은 듯하였다. 다시 지친 걸음을 옮겨 영원암(靈源菴)에 이르렀는데 영원암은 고요한 곳이면서 시원하게 탁 트인 높은 터에 있어서, 눈 앞에 펼쳐진 나무숲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왕대나무를 잘라다 샘물을 끌어왔는데, 옥 구르는 소리를 내며 나무통 속으로 흘러들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암자는 자그마하여 기둥이 서너 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깨끗하고 외진 것이 사랑할 만하였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마이봉(馬耳峯)을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상무주암을 등지고 있다. 이 암자에 사는 이름난 승려 선수(善修)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풀어내어 사방의 승려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순지와 퍽 친한 사이여서 우리에게 송편과 인삼 떡, 팔미다탕(八味茶湯)을 대접하였다. 이 산에는 대나무 열매와 감과 밤 등이 많이 나서 매년 가을 이런 과실을 따다 빻아 식량을 만든다고 한다. 해가 기울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산 봉우리에 구름이 모여들어 비가 올 징조가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떠나 사자항(獅子項)을 돌아 장정동(長亭洞)으로 내려갔다. 긴 넝쿨을 잡고서 가파른 돌길을 곧장 내려가 실덕리(實德里)를 지났다. 그제야 들녘의 논이 보였는데 처음으로 물을 대는 도랑에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내렸다.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영원사
1394.2봉(영원암에서 남쪽으로는 마이봉(馬耳峯)을 마주하고...)
양정마을 영원사 옛길

 

※ 우담 정시한의 일정

 

414일 안양사(함양관아-안양사)

415일 군자사(안양사-용유동-군자사)

416~18일 안국사(3)

419~24일 무주암(6)

425일 실상사(무주암-천인암-상고대암-실상사)

426일 견성암(실상사-견성암, 10여 리)

427~29일 천인암(3)

41~7일 천인암(7)

48~14일 무주암(7)

415일 두타암(무주암-무량굴-두타암)

416일 도솔암(두타암-도솔암, 20여 리)

417~18일 칠불암(2)

419~30일 금류동암(12)

51~29일 금류동암(29)

61~11일 금류동암(11)

612일 오향대암

613~30일 금류동암(18)

71~13일 금류동암(13)

714~26일 금강대암(13)

727~30일 길상대암(4)

81~14일 길상대암(4)

815일 범왕대

816~17일 쌍계사(2)

818~19일 불일암(2)

820일 화엄사

821일 남원읍

822~23일 실상사(2)

824일 천인암(실상사에서 견성암을 경유하여 천인암)

825~92일 무주암(7)

93~6일 금대암(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