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천(梵天) 성불(成佛) 법계사와 문창대를 찾아서
▣ 일 시 : 2022년 06월 06일(월)~07일(화)
▣ 코 스 : 동상원사터-중산리탐방센터-자연학습원-로타리대피소-법계사-문창대-세존암 문창대-자연학습원-중산리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문창대는 고운 최치원의 발자취이다. 문창은 문창후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려 현종이 1023년(현종 14년) 최치원 선생을 기려 문창후로 추증하면서 내린 시호이다. 이번 답사는 일정 민병태 선생과 조용헌 박사와 동행하였다. 일정 선생은 재야의 대표적인 방외지사이고, 조용헌 박사는 메이저 언론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 동양학의 고수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와 문창대이다. 사전에 법계사 종무소에 숙박 예약을 하였다. 문창대에서 고운최선생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와 월정(月汀) 인명 석각을 확인하고, 법계사 경내의 각자(刻字)를 둘러보았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다음날 아침 세존암을 찾았다. 이곳도 문창대라고 한다. 문창대가 두 곳이다. 박정민 출세 각자 아래 고운최선생장구지소 석각이 있었다고 한다(일정 민선생님). 월정(月汀)이란 인물과 육상산(陸象山)에 대한 의문이 계속 일었다. 법계사 경내 지리산법계사연기사적비(智異山法界寺緣起事蹟碑)에도 월정(月汀)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주목할 것은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육상산(陸象山, 1139~1192)의 이름을 문창대에 새겼을까 하는 의문이다. 조선시대에 육상산(陸象山)을 들먹이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智異山法界寺緣起事蹟碑(지리산법계사연기사적비)
법계사 경내의 여러 각자 중 이 연기사적비만 유일한 공식 기록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3층 탑 옆에 선 커다란 바위의 하단부에 있다. 바위 면에 커다랗게 장방형의 네모진 바탕 면을 조성하고 294자의 명문을 새기고 있다. 내용은 절의 창건 이래 역사적인 사실을 간략히 기록한 것이다.
이 각자를 쓴 이는 월정(月汀) 이병호(李炳昊, 1882~?)로 되어 있고 기술한 이는 쌍계사문 김운성(金雲城)으로 되어 있다. 두 사람의 이름은 구곡산 동쪽 중턱에 자리 잡은 도솔암의 연기비문에 나오는 인물이다. 월정(月汀) 이병호(李炳昊, 1882년생)는 본명이 이병용(李炳鎔)으로 단성면 배양 출신의 합천 이씨 후손이다. 호가 월정(月汀)인데 법계사 옆 일출봉에도 고운최선생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 각자 아래에 월정(月汀)이 새겨져있다. 석각의 시기는 연기사적비 연대(1939년)와 같은 시기로 추정한다. 1939년은 이병호의 나이 57세이다.
智異山法界寺緣起事蹟碑
法界寺方丈山之中央名刹也溯其緣起新羅眞興王午年甲子烟起祖師始刱此寺距今一千三百九十五年也其後朝鮮太宗大王五年乙酉碧溪禪師重刱焉近爲灰燼所毁今戊寅春淸信女史申德順氏發大願投臣款開拓舊址建法堂及大室僚舍凡三刱也盖烟起祖師先創華嚴寺次刱此寺又刱大源寺而皆建舍利塔所謂智異山三塔是也此寺之有舍利塔誠無雙聖跡而千有年間毁廢修理難以枚擧噫申氏慨塔之久廢盡誠建寺以守之可謂篤信善德者也自新羅時諸祖師莫不於此修道儒家大賢崔文昌常遊於此故寺前有文昌臺金濯纓先生亦留遊賞之跡本寺之形勝可知矣
義方山人月汀李炳昊書
世尊二千九百六十六年己卯 月 日
雙磎寺沙門金雲城善紋謹述
華嚴寺陳震應考閱
雙磎寺立
지리산 법계사 연기 사적비
법계사는 지리산 가운데 있는 이름난 절이다. 절의 연기(緣起,유래)를 거슬러 살펴보면 신라 진흥왕 5년 (544, 甲子)에 연기조사가 처음 이 절을 창건했으니, 지금으로부터 1천 3백 9십 5년 전이다. 그 후 조선 태종대왕 5년(1405, 乙酉)에 벽계선사가 중창하였다. 근래에 들어 불타서 잿더미가 된 채 폐사(1908)가 되었다가, 이번 무인년(1938) 봄에 청신녀(女 불교신자) 신덕순씨가 큰 원(願)을 세우고, 많은 금전을 들여 옛 절터를 손질하고 법당과 큰 방을 갖춘 요사(僚舍)를 지었으니, 무릇 세 번째 창건이다.
연기조사가 먼저 화엄사를 창건한 후 다음으로 이 절을 창건하고, 또 대원사를 창건했으며 세 곳 모두에 사리탑을 세웠으니, 이 탑들을 이른바 ‘지리산 3탑’이라 부른다. 이 절(법계사)에 있는 사리탑은 실로 둘 도 없는 성스러운 사적으로, 천여 년 동안 무너져 버려지고 수리한 것을 일일이 들어 설명할 수 없다. 아, 신덕순 씨가 탑이 낡고 무너진 것을 개탄하고 성심을 다해 절을 세우고 지켜왔으니, 믿음이 도탑고 착한 덕을 쌓은 이라 이를 만하다.
신라 때부터 여러 조사들 중 이 절에서 수도하지 않은 분이 없고, 유가의 대현(大賢, 크게 어질고 지혜로운 인물)이신 문창후 최치원 선생이 자주 이 절에서 지냈기에 절 앞에 문창대가 있다. 탁영(濯纓) 김일손 선생 또한 이 절에서 머물며 유람하고 감상한 자취가 있으니, 본사의 아름다운 경승을 알 만하다.
의방산인 월정 이병호가 쓰다.
세존 탄생 후 2966년 기묘(1939) 월 일
쌍계사 사문 운성 김선문 삼가 짓다.
화엄사 진진응이 교열하다.
출처 : 산청석각명문총람(2018, 권유현)
육상산 (陸象山, 1139~1193) 자(字)는 자정(子靜)이고 호는 상산(象山)이며 강서성 무주(撫州) 사람이다. 중국 남송의 이상주의적인 성리학자. 같은 시대의 위대한 성리학자이자 합리주의자였던 주희의 경쟁자였다. 그의 사상은 3세기 이후에 명대의 성리학자 왕양명이 새로이 다듬었다. 이들을 심학파 혹은 두 위대한 대표자의 이름을 따서 육왕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희가 끊임없는 탐구와 연구를 강조했던 데 반해, 그는 도의 가장 높은 지식은 내면의 성찰과 자습을 끊임없이 실천함으로써 습득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선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는 사람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여 그 선이 물욕으로 더럽혀지고 없어졌더라도 자신의 노력에 의해 다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육구연은 정부의 수많은 요직을 거쳤지만, 생애의 대부분은 학문을 가르치고 강의하는 데에 바쳤다.
그의 사상은 3세기 이후에 명대의 성리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새로이 다듬었다. 이들을 심학파 혹은 두 위대한 대표자의 이름을 따서 육왕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학파는 더 우세한 학파로서 정이와 주희가 중심인물인 정주학파에 반대된다.
육구연은 정부의 수많은 요직을 거쳤지만, 생애의 대부분은 학문을 가르치고 강의하는 데에 바쳤다. 주희가 끊임없는 탐구와 연구를 강조했던 데 반해, 그는 도(道)의 가장 높은 지식은 내면의 성찰과 자습을 끊임없이 실천함으로써 습득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선(善)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는 사람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여 그 선이 물욕으로 더럽혀지고 없어졌더라도 자신의 노력에 의해 다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저작들은 〈상산선생전집 象山先生全集〉에 모아져 출판되었다. 1217년 그에게 문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530년 그의 위패는 명조의 중앙 유교사원에 모셔졌다. 출처 : 다음 백과
▲ 법계사 삼층 석탑 [法界寺三層石塔]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법계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석탑. 커다란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아 삼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신라 석탑에서 벗어난 간략한 양식과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정식 명칭은 ‘산청 법계사 삼층 석탑’이다. 보물 제473호이다.
智異山法界寺緣起事蹟碑
法界寺方丈山之中央名刹也溯其緣起新羅眞興王午年甲子烟起祖師始刱此寺距今一千三百九十五年也其後朝鮮太宗大王五年乙酉碧溪禪師重刱焉近爲灰燼所毁今戊寅春淸信女史申德順氏發大願投臣款開拓舊址建法堂及大室僚舍凡三刱也盖烟起祖師先創華嚴寺次刱此寺又刱大源寺而皆建舍利塔所謂智異山三塔是也此寺之有舍利塔誠無雙聖跡而千有年間毁廢修理難以枚擧噫申氏慨塔之久廢盡誠建寺以守之可謂篤信善德者也自新羅時諸祖師莫不於此修道儒家大賢崔文昌常遊於此故寺前有文昌臺金濯纓先生亦留遊賞之跡本寺之形勝可知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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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磎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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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崔先生杖屨之所
月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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