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에서 바른재를 넘어 백무동 가는 길(호남 의병길II)
▣ 일 시 : 2022년 06월 11일(토)~12일(일)
▣ 코 스 : 음정-벽소령대피소-바른재-선비샘-도덕봉-덕평(천우동 석각)-선비샘-바른재-오공능선-지네바위-백무동
▣ 인 원 : 4명(벽소령 합류 2명, 도덕봉 합류 1명)
▣ 날 씨 : 맑음
지난해 마천면지 편찬위원회에서 마천면 소재 비문과 석각을 전수 조사하였다. 함양군 마천면 도계공원 건너편 외진 곳에 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가 있다. 도계공원에는 전면장노공지현영은비가 있는데, 실상사 전투의 전후 내용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1908년 4월 29일 석상용 상원진과 백무진이 남원군 산내면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입석 수비대를 습격을 한 것이다. 동년 5월 11일 일본군은 의병을 색출하고자 도마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려고 하자 당시 노지현 면장이 막아서서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였다. 자료를 찾다가 《의병 참모장 비호장군 석상용약전》(이종인, 1976)에서 상원진과 백무진의 실체를 확인하였다.
▶ 지리산 호남 의병 활동 요약
가. 1907년 2월 13일(음 12.31) 양한규 의진과 고광순 의진 남원성 공격함.(양한규 전사함)
나. 1907년 10월 17일(음 9.11) 녹천 고광순(高光洵)이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순국함.
다. 고광순 의병장을 잃고 의병들의 일부는 이듬해(1908년)에 의신 부락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함.
라. 1908년 2월 2일(음 1.1) 설날 의신마을 하철굴암에서 야영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대부분 전사함.
마. 의신에서 생존한 호남 의병들은 벽소령을 넘어 석상용 의진에 합류하고 백무진과 상원진으로 재편함.
바. 1908년 4월 29일(음 3.29) 상원진과 백무진이 연합하여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입석 수비대를 공격함.
사. 1908년 5월 11일(음 4.12) 일본군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도마마을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려고 함.
아. 1908년 6월 18일(음 5.20)~22일(음 5.24)에 함양 수비대 제5중대와 산내면 입석 수비대가 대궐터를 토벌함.
1907년 2월 12일(음 12.31) 호남 의병이 양한규의진과 고광순 의진이 연합하여 남원성을 공격한다. 이 전투에서 양한규 대장이 전사하고 잔류 병력이 지리산으로 숨어든다. 숙성치를 넘어 화엄사에서 밤재를 거쳐 문수사와 느진목재를 넘어 연곡사에 주둔을 한다. 1907년 10월 17일(음 9.11) 고광순 의진은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수뇌부가 대부분 전사한다. 연곡사에는 고광순 순절비(義兵將高光洵殉節碑)가 있다. 이 전투로 연곡사는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탄다. 1908년 2월 2일(음 1.1) 의신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대부분 궤멸된다. 의신마을에는 대성골 초입 항일 투사 30인 의총이 있다. 목숨을 부지한 남은 소수 인원은 덕평마을 주변 산세가 험준한 도덕봉에 숨어 있다가 바른재를 넘어 오공능선을 따라 백무동으로 이동하여 마천면 추성마을 출신 석상용 부대와 합류한다. 이렇게 해서 백무진과 상원진이 만들어진다.
상원진은 박회성(대궐터)에 주둔하고, 백무진은 백무동 고점마을 인민군사령부터에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1908년 4월 29일(음 3.29) 백무진과 상원진이 연합하여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입석수비대를 공격한다. 1908년 5월 11일(음 4.12) 일본군이 도마마을 주민을 학살하려 하자 노지현 면장이 나서서 주민들의 목숨을 구한다. 1908년 6월 18일(음 5.20)~22일(음 5.24) 일본군 함양수비대와 입석수비대가 연합하여 당시 마천면장을 앞세우고 상원진이 웅거하고 있던 박회성(대궐터)을 공격한다. 이 공격으로 지리산 동북부 항일의병의 보루는 무너지고 의병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에 투항한다. 일본군 14연대 진중일지에는 투항자의 출신지와 나이 직업 이름이 기술되어 있다.
이번 답사는 삼정 마을에서 바른재를 넘어 오공능선을 지나 백무동의 인민군사령부터를 잇는 길이다. A팀은 삼정에서 오리정골로 올라와 벽소령대피소에서 합류하고, B팀은 원통암에서 도덕봉으로 올라왔다. 나는 2021년 12월 04일~05일 삼정에서 오리정→벽소령→바른재를 답사했기 때문에 음정에서 벽소령으로 진행했다. A, B, C조로 나누었지만 답사 인원은 4명이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유목민님 팀과 합류하여 답사를 진행하였다. 벽소령대피소에서 마침 오리정골로 올라오신 지리99 금농 강호원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해묵은 일이지만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자타불이가 아니던가. 다만 지리산이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공간이 되길 바랄 뿐이다. 바른재에서 안당재와 바깥당재 그리고 느진목재를 다시 바라보았다. 느진목재에서 삼정까지 1박 2일 걸어온 루트가 한눈에 들어왔다. 덕평봉에 오르니 백무동과 인민군 사령부터 장구목을 넘어 초암능선 박회성까지의 루트가 이어진다. 오공능선은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에도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다음은 도촌에 살았던 오동춘 박사의 곤달래산 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마천 곰달래산 전투
곰달래산은 지리산의 한 봉우리로 도촌마을 뒷산이다. 800m의 산 높이를 가지고 있다 이 산에 숨어 있는 공비토벌 작전이 1948년 12월 16일에 있었다. 3 연대(진주),15 연대(마산)로 구성된 토벌군이 민보단 박계원 등의 길잡이를 앞세워 진격해 정상을 향해 올라갔으나 망원경으로 지켜본 공비들이 유효사거리 지점에서 중무기(기관총)로 토벌군을 공격했다. 얼떨결에 전투준비가 부실했던 토벌군의 인명 피해가 컸다. 그러나 곰달래산(일명 웅달산) 건너 위치한 백무동 공비 아지트를 완전히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 곰달래산 기슭에 위치한 도촌에 콩 볶듯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들었다 저녁 무렵 하산하여 내려오는 군인들을 보았다.
도촌마을 위쪽에 있는 강화춘 씨 댁 그리고 우리 집 근처 논바닥에 군인들이 청솔 모닥불을 피워놓고 5, 6명의 군인들이 불을 쬐고 있었다. 나도 불을 쬐며 곁에 당거에 누워있는 군인 시체와 입에 총 맞은 군인도 보았다. 총상 입은 군인은 누가 눈(雪)을 이야기하니 눈 한 움큼 먹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다. 소위 계급 단 장교가 누가 눈(雪) 소리를 했느냐고 주변에 둘러선 부하들을 나무라고 총 맞은 군인에게 치료 없이 눈 먹으면 너는 금방 죽게 된다. 저 건너 송알 신작로에 대기 중인 군 트럭을 타고 병원 치료 후 물을 먹어야 살 수 있다며 친절하게 그 병사를 타일러 주었다.
전투 경찰로 곰달래산 800 고지 전투에 참여했던 전투 경찰 하나도 볼을 관통하는 총을 맞고 살아난 것은 자기가 조상의 덕이라 말하며 동료에 의지한 채 고통을 참으며 불을 쬐고 있었다. 많은 전사 시체를 민보 단원 동순호(원정), 표태평(강청), 박계원(실덕), 이동근(가흥) 등 30여 명이 도촌으로 운반하여 송알 신작로 군용 트럭에 실었다. 800 고지 전투가 끝난 뒤의 토벌군 군인들의 모습 일면을 나는 도촌 우리 집 앞 논바닥 모닥불 함께 쬐며 생생하게 보았다. 곰달래산은 내가 어렸을 때 나의 고모 오경남 처녀와 현 나드리 농원 사장 신평수 어머니 강두김 처녀 둘이서 나를 데리고 나물 뜯으러 갔던 산으로 내 유년 추억이 깊은 고향마을 산이기도 하다.
注 곰달래산은 오공산(문헌에는 蚣達飛山)을 가리킨다.
출처 : 내가 보고 듣고 겪은 마천 공비 현황(오동춘 박사, 마천 도촌 출신 마천초등 17회 졸업)
답사팀은 도덕봉 검각에서 1박을 한 후 A, B팀은 도덕봉에서 삼철굴암으로 내려가고, 나는 홀로 바른재를 넘어 오공능선으로 내려섰다. 능선 곳곳에는 참호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능선길은 백무동에서 덕평마을로 연결되는 옛길이다.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의 『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에 "1934년 4월 1일에 백무촌(白武村)을 떠나 직치(直峙)를 거쳐 덕평(德坪)을 찾았다. 길은 점점 넓어진다. 평평한 곳에는 비록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더라도 종종 인가가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직치(直峙)는 바른재를 가리키듯 싶다. 덕평에는 일제강점기 때까지 30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지네 바위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석문에서 백무동 방향 산밭골로 내려섰다. 한말 항일 의병 길이 곧 빨치산 루트이다. 끝.
▶ 천우동 경태임오춘 이청련서(天羽洞 景泰壬午春 李靑蓮書)
움막터 샘터 바위에 천우동 경태임오춘 이청련서(天羽洞 景泰壬午春 李靑蓮書) 석각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경태(景泰)는 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이다. 경태제(景泰帝)는 중국 명나라 7대 황제(재위 1449~1457)이다. 경태제(景泰帝)는 명나라 황제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天順帝)의 이복 아우이다. 정통제(正統帝)가 몽골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잠시 왕위에 올랐다. 영종(英宗)이 풀려나면서 왕위에서 쫓겨났다. 임오년(壬午年)은 대종(代宗)의 재위하였을 때가 아니고, 영종이 복위한 천순(天順) 6년으로 1462(세조 8년)년이다.
이청련(李靑蓮)은 촛대봉의 고려낙운거사 이청련서 석각과 「청학 동결(靑鶴洞訣)」을 남긴 인물이다. 천우동 석각의 주인 이청련이 지리산 속에서 중국의 황제가 바뀐 것을 모르고 경태제(景泰帝)의 연호를 새긴 것은 아닐는지. 청련(靑蓮)은 이백(李白, 701~762)의 고향으로 이백의 별호이다. 이백을 흠모하는 인물이 이백의 별호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기 이후백[李後白, 1520년(중종 15)~1578년(선조 11)]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호가 청련(靑蓮)이고 그의 문집이 청련집(靑蓮集)이다. '후백(後白)은 뒤에 태어난 이백(李白)'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천우동 석각 이청련(李靑蓮)과는 다른 인물로 보인다.
注 우화등선(羽化登仙) :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 1037~1101)는 송(宋) 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은 호북(湖北) 황주(黃州)로 좌천되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였는데, 적벽을 찾아 〈적벽부〉 2수를 지었다. 〈전적벽부〉에서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이 나온다. ‘우화(羽化)’는 원래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방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다. 번잡한 세상일을 떠나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천우동(天羽洞)은 번잡한 세상일을 떠나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신선의 세계인 덕평동천(德平洞天)을 일컫는 의미이다.
▶ 오공능선(蜈蚣稜線)
오공산(蜈蚣山)의 지네 바위 부근에 의령(宜寧) 여씨(余氏)(1864~1939)의 무덤이 있는데,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다. 의중마을에 살았던 만송 '임영택(林暎澤, 1866~1925) 공 부인의 무덤이다. 의중마을 나주임씨세보에 무덤의 위치가 공달비산(蚣達飛山), 도마마을 청주한씨세보에는 공달산(蚣蟽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문호성 회장님은 '곰달비산'이라고 하셨다. 함양의 치암(恥菴) 이용근(李榕根) 翁이 웅달비산비천오공결(熊達飛山飛天蜈蚣訣)에서 웅달비산(熊達飛山)이라고 한 것은 곰달비산을 한자로 바꾸면서 곰웅자를 쓴 것으로 이해한다. 금대산에서 오공능선을 바라보면 길게 뻗어 내려온 능선에 좌우로 작은 골들이 발달된 지네의 형상이다. 지네 능선은 곳곳에 그 지명이 산재해 있다. 오공능선(蜈蚣稜線), 오공산(蜈蚣山), 공달비산(蚣達飛山), 공달산(蚣蟽山)은 같은 의미이다. 蜈蚣(오공, 지네오, 지내공)은 지네라는 뜻이다.
熊達飛山飛天蜈蚣訣(웅달비산비천오공결)
치암(恥菴) 이용근(李榕近, 1938~ )
頭流一脉向坎來 : 두류 한 맥이 북쪽으로 내려와
七丙七坤七巽開 : 칠병 칠곤 칠손으로 벌려 있네.
乾亥三相袍玉帶 : 건해방 삼상은 도포 옥대요
乙辰倉庫品資嵬 : 을진방 창고는 품자로 높다.
庚申尖筆層巒聳 : 경신방 첨필은 층만으로 솟았고
寅甲印岩跪揖堆 : 인갑방 인암은 괴읍으로 높네.
疊疊靑龍多字橫 : 첩첩한 청룡은 다자로 비켰고
重重白虎似弓回 : 중중한 백호는 활같이 돌았네.
☞ 이용근(李榕近, 1938~ ) : 본관은 경주 호는 치암(恥菴) 한학자. 의중마을에 살았던 竹圃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의 증손자. 조부는 죽포공의 次子 諱 鍾七, 父 諱 整雨(1908~1996), 가학으로 부친께 한학을 배웠고 독선생을 모셔놓고 세 분이 9년간 한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함께 공부한 분 중 한 분은 벽송사에 출가한 원응스님이다. 榕은 相자와 같은 항렬이다. 자손이 귀해서 항렬자 相대신 榕을 썼다고 한다.(圭-鍾-雨-相-熙)
※ 일본군의 『진중일지(1908)』와 『조선폭도토벌지(1913)』
1. 1908년 6월 29일 咸陽수비 제5중대 西原 중위 보고 요지(6.23,함양)
6월 18일부터 22일에 걸쳐 함양 서남방 지구 검거를 위해 출장한 當隊(立石 수비대를 포함)는 6월 21일 지리산의 절정 方丈峰 북방 幽谷 및 동북방 斜面에 있는 大闕基에 적의 巢窟이 있어서 그 幽谷에 있는 銃器製造所는 過日 求禮 수비대로 인해 破却했지만, 대궐기에는 아직 토벌대가 진입할 수 없음을 알고서 馬川(입석 동남방 2리)면장을 嚮導하게 해 屛風然이라는 險山에 深入해 荊棘을 排하고 榛莽을 밟고 간신히 대궐기에 도달하였다. 賊影을 탐지할 수 없었지만, 목하 적이 신축중인 가옥은 80여 명을 수용하기에 족한 규모로서, 그 공사를 끝내고 그 주위에는 石壘를 설치해 樹枝鹿柴를 편성하여 소굴로 삼았다. 따라서 가옥 및 방어설비를 파괴하고 일부로 하여금 주위를 수색하여 좌의 諸品을 획득함. 화승총 12, 탄환 4貫目, 白米 7두, 기타 잡품. 파괴가옥은 마천면장이 방화,소각하고 말하기를 면민을 위해 적의 근거를 끊었다고 함.(?(步兵 第14聯隊) 陣中日誌? Ⅱ, 391-392쪽)
2. 명치 41년(1908) 4-12월 경상남도에서의 토벌
경상남도 지리산은 경북 日月山과 같이 폭도의 소굴지로서 전년 이래 누차의 토벌을 가하였으나 심산유곡에서 교묘하게 우리 감시선을 벗어나 潛匿하면서 陰으로 향촌에 출동하여 약탈을 자행. 그들은 지리산 중 인적이 없는 곳에 가옥을 구축하고 장벽을 설치하고 防柵을 만들고 주식을 저축하여 永久之策을 강구하고 있었으나, 6월 21일 함양수비대는 심한 곤란을 무릅쓰고 드디어 그 근거지를 발견하여 총기탄약을 노획하고 기타는 전부 소각. 그 후부터 폭도는 거의 사산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꺼지고 일부는 전라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朝鮮暴徒討伐誌?(1913), 767쪽)
3. 1907. 10.23: 남부수비관구사령관으로부터의 통보: 鎭海灣要塞司令官으로부터의 통보
가. 폭도는 鷰谷寺,七佛寺 및 文珠庵(구례의 文殊庵의 誤記일 듯)에 근거, 그 수 300명 정도. 그 斥候는 섬진강 연안에 출몰.
5,6일 전부터 폭도의 척후는 매일 하동 정찰을 위해 그 近鄕에 왔다 감. 10일은 興龍店 부근에 11일은 石隙店 부근에 왔다. 적의 首領은 연곡사에 있는 듯하지만, 연곡사를 공격하면 칠불사 및 문주암 방향으로 도주할 관계가 있음.
나. 적의 수령은 구례 부근의 豪家의 주인을 인질로 해서 포박, 군자금의 多額을 강취하였음. 또 鍛冶屋에 2명을 연달아 돌려보내 목하 刀劍이나 刃器를 제조시키고 있음.
다. 지리산 북록 마천(속칭 마천면)은 종래 東學黨時代부터 不良民이 집합하는 장소로서 지금까지도 폭도가 근거하는 곳으로서 유명. 칠불사, 마천면과는 항상 기맥이 통하는 듯. 마천면,칠불사,연곡사,문주암은 동일체인 듯. 마천면 부근은 불온한 형세를 확인×.
라. 지리산, 般若峯 부근은 大森林으로 周圍 幾尋이 넘는 大木이 번무해서 주간에도 어두워 적의 소굴로서 자못 편함. 또 칠불사,연곡사,문주암,마천면은 어느 것보다도 큰 寺院을 가지고 있고 양식은 결코 欠乏하지 않음. 또 삼림 때문에 한번 이 산중으로 逃入하면 손을 쓰기가 어려움. 동학당시대에도 정부는 결국 이를 토벌하는 것을 단념.
右 情報의 결과에 의해 兒島중대가 취한 처치: 중대는 17일 정오를 기해 칠불사, 연곡사 및 문수암을 남북 양 방면에서 포위 공격하는 것으로 하고 좌의 配備를 취함: 1. 하동방면에서 1소대를 전진시키고 同小隊의 주력으로 院基 방향에서 일부로 하여금 五松亭 방향에서 칠불사를 공격하게 함. 2. 함양을 거쳐 大井 방향에서 岩本소대의 일부 및 山田소대의 일부로 하여금 마천면에서 칠불사 및 문주암의 背面을 향해 공격하게 함.
하동방면에서 전진한 소대는 17일 예정대로 연곡사를 향해 공격. 적 100명과 충돌. 그들을 반야봉 방향으로 격퇴. 적 사자 22(수괴포함), 부상 30여,---(?(步兵 第14聯隊) 陣中日誌?Ⅰ, 401-403쪽)
4. 1908. 1.9: 함양수비제5중대 서원중위보고(1.4,함양)
함양의 四周가 목하 평온하지만 군대의 통과가 드물어서 적도가 배회하는 일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가 아니다. 따라서 當隊는 잠복한 적도소탕을 목적으로 左의 행동을 취하려고 한다.(?(步兵 第14聯隊) 陣中日誌?Ⅰ, 706-707)
兵力 | 行動地方 | 행동기간 | 記事 |
상등병 이하 7 | 馬川面 이남 지구 | 1.4-1.8 | 馬川面 이남 智異山間 각 부락에 폭도가 집합했다는 風說. 密偵을 시켜 정찰. 정보를 얻기 위해 上記의 병력을 差遣 |
5. 居秘收發 제669호(1908.2.?, 거창경찰분서장이): 폭도 정찰에 관한 건 보고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맥에 김동신이 이끄는 폭도가 맹렬히 배회하고 있으므로 함양․남원․구례․하동․진주의 각 수비대는 국지연대장의 명에 의해 16일부터 지리산맥으로 향해 토벌예정. 함양주재소 근무 4명 즉 순사부장 海江田元吉, 순사 狩野太郞, 동 安藤利助 3명과 한인 순사 房太震, 동 孫甲俊 2명이 함양수비대와 같이 정찰. 1. 16일 오전 5시반 함양을 출발하여 함양수비대 서원조장 이하 9명은 산청군 덕산 방면에서 서원대장 이하 11명과 해강전 순사부장, 순사 야수안등방손의 5명은 마천 방면에서 奧原軍曹 이하 4명은 전라북도 운봉 방면에서 또 진주․하동․구례․남원의 각 수비대 및 우수비대주재지의 경찰대도 같이 각 방면에서 백방으로 손을 나누어 지리산의 정찰을 수행. 18일 각 정찰대 전부는 하동군 화개면 신흥에 회합하였으나 아무도 얻은 바가 없었다. 김동신 일파는 12일 국지연대장이 1중대를 이끌고 함양에 來着한 것을 재빨리 알고 그 근거지를 어디론가 이전한 것 같으므로 해강전부장 외 4명의 순사는 30일 함양수비대와 같이 일단 철수. 1. 12일 밤 수괴 李圭喆이 이끄는 40여 명의 폭도들은 함양 서방지를 통과하였는데 전라북도 장수 방면으로 도주한 것 같다.(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9(義兵篇Ⅱ), 166-168)
6. 居秘收 제344호의 1(1908.6.11, 거창경찰분서장이 경무국장에게)
歸順者에 관한 건 보고: 좌기 16명은 본년 6월 11일 폭도의 수괴 朴東義의 협박에 의해 일시 該徒에 隨從하여 전라북도 운봉군 입석수비대를 습격하자 그 향도가 된 자인 바 이후 前非를 悔悟하고 귀순신청하므로 취조 후 免罪文憑을 下付하였음. 좌기: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堂興村 農 文星朱(45), 동상 농 朴春元(55) 동상 농 金文成(44), 동상 농 李聖三(45), 동상 농 金仁仲(59), 동상 농 金明云(49), 동상 농 朴成彦(42), 동상 都馬川洞 농 韓泰西(53), 동상 농 朴寬之(53), 동상 농 張明俊(57), 동상 농 韓聖瑞(76), 동상 堂興村 농 朴文汝(73), 동상 都馬村 농 申慶彦(56), 동상 농 林善慶(67), 동상 농 韓致明(26), 동상 농 韓元淑(55).(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1(義兵篇Ⅳ), 242-243)
7. 1910. 9.21.報
함양군 지리산 및 산청군 덕산 방면에는 폭도의 출몰이 빈번. 마천,엄천면 내에는 폭도에 참가, 일시 양민을 가장하고 귀래한 자가 다수 있다. 이들은 그 부근에 격문을 발하고 함양읍을 습격한다고 양언.(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2(義兵篇Ⅴ), 142쪽)
8. 1910. 10.26. 산청, 함양의 귀순자인명표
曺采淳(산청군 上三壯面 弘溪上村), 安致明(下삼장면 後川), 孫九龍(상삼장면 石南洞), 金聖培(함양군 馬川面 楊田촌), 姜水成(마천면 倉村), 權秉璣(休知面 眞寬洞), 林正洛(嚴川面 松台洞), 全李見(마천면 楸城洞), 申南圭(柏田面 下薪洞) 9명.(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2(義兵篇Ⅴ), 224-225)
자료 출처 :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김준형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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