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화엄사에서 삼정마을 가는 길(호남 의병길I)

도솔산인 2022. 5. 23. 08:16

화엄사에서 삼정마을 가는 길(호남 의병길I)

 

 

▣ 일 시 : 2022년 05월 21일(토)~22일(일)

▣ 코 스 : 화엄사-구층암-밤재-밤재마을-용소-느진목재-남산마을-농월관(숙)-외당재-칠불사-내당재-삼정마을-하철굴암터

▣ 인 원 : 5명

▣ 날 씨 : 맑음

 

 

  1907년 2월 13일(음 12.31) 새벽 양한규(1844~1907) 연합 의진은 남원 주둔 진위대 장병들의 연말연시 휴가를 틈타 별다른 격전 없이 남원에 입성한다. 그러나 양한규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던 중 적탄에 맞아 순국하고, 전열을 재정비한 진위대의 공격으로 양한규 연합 의진이 패퇴한다. 대장을 잃은 양한규의 일대(一隊)와 고광순 의진은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문수사와 연곡사가 호남 의병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1907년 10월 17일(음 9.11)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1848~1907)과 부장 고제량(高濟亮, 1849~1907) 이하 25~6명의 의병이 연곡사 일대에서 순국한다.

 

 진위대 : 1895년(고종 32) 9월 지방의 질서 유지와 변경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근대적 지방 군대.

 

  고광순과 고제량 등 수뇌부를 잃은 의병들은 외당재, 내당재를 넘어 의신 마을을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2일(음 1.1) 설날을 전후하여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대부분 전사한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벽소령을 넘어 마천으로 숨어들어 마천면 추성리 출신 석상용 부대와 합류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대가 상원진과 백무진이다. 1908년 4월 29일 두 부대가 연합하여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 입석 수비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한다. 일본군 14 연대 입석 수비대와 함양 수비대가 1908년 6월 18일~22일 박회성 대궐터의 상원진을 토벌한다. 내용을 정리하면 대략 이런 줄거리이다.

 

  마천면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을 접하게 되었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은 고 이종인(1896~1982) 공의 저술이다. 이공은 석상용 선생과 같은 마을 출신으로 나이가 26세 연하이다. 이공은 석장군이 1917년 출옥하여 1920년 별세할 때까지 3년간의 구술을 메모하였다가, 후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1974년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 1907년과 1908년 사이에 마천면에 상원진과 백무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22년 2월 20일 칠선휴게소 허상옥 사장의 안내로 상원사터를 답사하였다. 상원사터로 가는 길은 칠선계곡 길과 초암능선 길이 있다. 하필이면 당일 아침 기온이 영하 8도였다. 초암능선으로 올라가 상원사골로 내려왔다. 상원사터를 답사한 후 이렇게 퍼즐이 맞춰졌다. 석상용의 상원진은 박회성에서 백무동으로 은밀하게 이동하여 도마마을에 은신해 있다가, 1908 4 29( 3.29) 그믐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실상사를 공격한다. 그러나 상원진이 백무진과 의사 소통이 되지 않아 공격에 실패하고 퇴각한다. '이유인즉은 의병진에 시계가 없었다.'고 한다. 5월 11일(음 4.12) 석상용 의진을 도운 도마마을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학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당시 마천면 노지현(1861~1927) 면장이 생명을 무릅쓰고 나서서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한다.

 

   3월 중순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김준형 교수님께 일본군 수비대 14연대 『진중일지』 자료를 받았다. 『진중일지』의 기록은 상원의진 터를 박회성 대궐터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 수비대 14연대가 1908년 6월 18일에서 22일까지 상원의진을 토벌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보고 3월 24일~25일 김준형 교수님과 박회성 일원을 답사하게 되었고, 샘터와 건물터 그리고 솥단지 조각을 확인하였다. 상원진과 백무진의 자료는 고 이종인 공의 비호장군석상용약전과 일본군수비대의 『진중일지』이다.

 

  의병장 양한규와 고광순에 대한 자료를 읽어보니 호남 의병길의 동선이 그려졌다. 덕평봉 자락 도덕봉 주변도 의병들의 진지로 추정된다. 1611년 유몽인은 이곳을 촉도난의 검각에 비유하고 있다. 호남의병 루트는 남원→구례→화엄사→밤재→문수사느진목재→연곡사→농평마을→외당재→칠불사→내당재→삼정→바른재→오공능선백무동→박회성으로 이어진다. 이런 밑그림을 그리고 화엄사에서 밤재, 느진목재, 외당재와 안당재를 넘어 삼정마을까지 연결하였다. 함께하신 분들 수고하셨습니다. 끝.

 

 

 

 

 

1. 연곡사 전투(1907년 10월 17일)

 

  1907년 10월 17일(음력 09.11) 새벽,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의병장을 잃고 흩어진 의병들의 일부는 이듬해(1908년)에도 화개동의 의신 부락에 거점을 마련하고 계속 활동하였다. 『화개면지』 (김동곤, 2002) 1907년 10월 17일(음력 09.11)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일제 군경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일제 군경은 총공격을 가하며 피아골을 유린한 끝에 의병들을 연곡사 구석으로 몰아갔다.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1848년~1907년)과 부장 고제량(高濟亮, 1849~1907) 이하 25~6명의 의병이 연곡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요약 개항기 을미사변 후 기우만과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본관은 장흥(長興). 초명은 고광욱(高光旭) 또는 고광순(高光珣·高光詢). 자는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 전라남도 담양 출신. 생부는 고정상(高鼎相), 양부는 고경주(高慶柱), 항일투사 기산도(奇山度)가 사위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각 읍에 격문을 띄우고,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모집하여 좌도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나주를 본영으로 의병을 불러모으자 일본군이 나주로 집결하므로 광주(光州)로 옮겼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북진하던 중 선유사(宣諭使)의 권고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1906 4월 최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고제량(高濟亮)과 순창에 이르렀으나, 최익현은 이미 패전하여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기우만·백낙구(白樂九)와 모사하였으나, 그들도 곧 붙잡혔다. 1907 1 24일 저산(猪山)의 제각(祭閣)에서 고제량·고광훈(高光薰고광채(高光彩) 등 족친들과 윤영기(尹永淇박기덕(朴基德)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2월 말 남원의 양한규(梁漢圭)와 남원성을 공격, 관군과 접전을 벌이던 중 양한규가 죽고 남원의진이 붕괴하여 퇴진하였다. 1907 5월에는 능주(綾州), 8월에는 동복(同福)을 습격하였다.

 

  그 뒤 지리산 문수암(文殊庵)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김동신(金東臣)과 연합작전을 구상, 지리산으로 집결하였다. 그 동안 고광순의 종가는 적의 습격으로 사당만 화를 면하였을 뿐 피해가 컸다. 8월 구례 연곡사(燕谷寺)로 가서 화개동(花開洞)과 문수암 일대를 거점으로 대원들을 머무르게 한 뒤,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보충하며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의기를 북돋웠다. 그 뒤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9월 적의 연곡사 복멸작전에 의한 야습을 받아 부장인 고제량을 비롯, 주요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출처 : 다음백과]

 

 

2. 의신 전투(1908년 2월 2일)

 

  연곡사에서 패한 고광순 부대 잔여 의병들은 외당재와 내당재를 넘어 의신으로 들어온다. 도덕봉 주변 검각을 거점으로 활동하다 설을 쇠기 위해 의신마을에 내려왔다가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대부분 전멸하였다. 무신(1908)년 정월 초하루 떡국 한 그릇과 목숨을 바꾼 것이다. 도덕봉 아래 샘터 주변 군데군데 석축은 한말 항일 의병들의 주둔지로 추정된다. 도덕봉 아래 샘터 부근의 바위 암벽에는 탄흔 자국이 남아있다. 여기에서 살아난 의병들은 벽소령을 넘어 석상용의 상원의진에 합류한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에 나오는 "고려천(고록천의 오기일 듯)이 이끄는 일대"는 의신에서 살아 남은 "고광순(高光洵, 1848년~1907년)의 잔류부대"로 이해가 된다. 녹천(鹿川)은 고광순의 호이다.

 

  소철굴암터(용화정사)에서 숙영을 하던 의병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화승총으로 대항했으나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신형무기로 무장한 정예 일본군에 농민·의병들은 적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형세는 흩어지고 계곡으로 도망치는 의병들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지금 의신마을에서 원대성 마을로 들어가는 논들 위 도로변에 30여 의병의 원혼이 묻혀있다. 『화개면지』 (김동곤, 2002)

 

 

3. 대궐터 박회성의 상원진

 

  1907년 남원에서 양한규와 고제량이 찾아와서 합세하고 곡성, 장성, 고창, 구례 등지에서 왜병들에게 기습작전을 하면서 싸우다가 쌍계사를 거쳐 마천으로 넘어오던 도중, 고려천(고록천?)이 이끄는 일대(잔류부대)를 만나 지리산 중턱 상원에서 합세하였다. 그후 문태수(文泰洙, 1889~1913) 신명선(申明善, ?~1908)이 이끄는 일대가 추성으로 들어와 상원에서 합세하여 대진을 이루었다.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상원진과 백무진에 대한 기록은 석상용의 구술을 기록한 비호장군석상용약전에 유일하게 보인다. 상원사터는 초암능선 자락 박회성 아래에 있다. 일본군의 『진중일지』(1908)에는 상원진을 대궐터(박회성)로 기록하고 있다.

 

※ 상원진 : 고광순 일대(一隊), 문태수, 신명선 일대(一隊)

 

 양한규(梁漢奎, 1844~1907) 요약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남원. 초명은 월서(月瑞). 호는 초계(初桂초계·측헌(則軒). 아버지는 맹석(孟錫)이다. 1882(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부사 심의두(沈宜斗)에게 장정 300명을 모집해 서울로 올라가 난군을 토벌하자고 청했으나 심의두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1891년 선략장군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1892년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하고 초계군사(草溪郡事) 겸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었으며 곧 통정대부로 가자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기병하여 난민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다 그 사실이 누설되자 중지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을 일으키니 근방의 1,000여 명이 이에 호응했으며, 유병두(柳秉斗박재홍(朴在洪양문순(梁文淳) 등이 그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1907 2 12(음력 12. 30)에 일제히 집합해 남원으로 진격할 계획을 수립하여, 다음날 새벽 남원 주둔 진위대 장병들의 연말연시 휴가를 틈타 별다른 격전 없이 남원에 입성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중 유탄에 맞아 죽었고, 전열을 재정비한 진위대의 공격으로 의진의 남원 점령은 무산되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文泰洙(문태수, 1889~1913)/문태현(文泰鉉)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창원. 본명은 태현(泰鉉). 태서(泰西)·태서(泰瑞)라고도 한다. 1904년 금강산에서 병서를 배웠으며, 1905년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팔공산으로 이동한 뒤 장수읍 함락, 무주 부남면 습격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후 무주 덕유산을 근거로 삼남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1907년 12월 각도 의병부대가 서울을 총공격하려고 할 때 호남군 100명을 이끌고 참가하여 13도연합 의병부대 중 호남창의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총대장인 대한관동창의장 이인영(李麟榮)이 부친상 때문에 귀향하면서 서울진격계획이 좌절되자 무주로 돌아왔다. 1908년 2월 무주주재소를 습격하다가 붙잡혔으나 탈출했다. 4월 신명선(申明善) 부대와 장수읍을 습격한 뒤 학교와 군청 등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그후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 습격, 5월 남원 이문성 동북방 전투, 10월 경부선 이원역 습격·방화 등 활동을 계속했다. 11월 이후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하여 금산·영동·옥천·상주·청주·보은 등지에서 활동했다. 1910년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시 덕유산으로 돌아와 재기를 꾀하던 중 1911년 8월 붙잡혔다. 대구감옥에서 서울로 옮겨진 뒤 1913년 2월 옥중에서 자결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다음백과]

 

☞ 신명선(申明善, ?~1908)/신명선(申明先),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전라북도 무주 덕유산을 거점으로 활동한 의병. 1907년 8월 일제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전라북도 무주 덕유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규합해서 의거하였다. 그해 10월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양원사(梁院寺)에서 의병장 김동신(金東臣)의 의진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순창·무주·진안 등지에서 항일투쟁과 국권회복운동의 전개를 독려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08년 4월 무주·안성 등지로 이동하여서 그들을 추격한 일본군 부대와 최후까지 분전하면서 지휘하던 중 일본군에 의하여 수명의 동지와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4. 백무동 고점마을 백무진

 

  충북 제천에서 박화선이 일대를 이끌고 백무동으로 들어왔다. 그 후 김동신, 홍영대 등이 안의에서 들어와서 지리산에서 의병진이 웅거하였다. 공은 지리 사정에 밝고 지략도 겸비하였으므로 백무진과 상원진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수백 대원들의 군량과 군기 화약의 공급과 작전과 정찰까지 맡아서 맹활약을 계속하였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백무진의 위치는 백무동 고점마을 인민군사령부터로 추정한다. 

 

※ 백무진 : 제천의 박화선, 안의 김동신, 홍영대

 

  ☞ 김동신(金東臣, 1871~1933) : 경상남도, 전라북도의 접경 지대와 덕유산, 지리산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김동신은 1906년 음력 3월경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덕유산에 있는 자원암(紫原庵)으로 내려와 머무르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군대 해산 후 의병 항쟁이 본격화되자 1907년 8월 전라북도 정읍군 백양사(白洋寺)에서 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삼남 의병 도대장(三南義兵都大將)이 되어 경상남도 거창군을 비롯하여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접경 지역에 출몰하여 활동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5. 연합의진 상원진과 백무진의 실상사 기습(1908년 4월 29일)

 

  1908년 4월 29일(음력 3월 그믐날) 캄캄한 야음을 이용해 약 50여 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습격하였다. 크게 놀란 왜군은 절 뜰에 쌓아둔 나뭇가지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고 반격하였다. 오랜 접전 끝에 의병대는 서쪽 노루목으로 퇴각하였다.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최점갑, 1995)

 

 

6. 의병에 협조한 도마마을 주민 학살 위협(1908년 5월 11일)

 

  그 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군들은 본면 도마리의 서당에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 학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당시 본면 면장 노지현(盧址鉉)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최점갑, 1995)」

 

 

7. 대궐터 상원의진 토벌 기록(1908년 6월 18일~22일)

 

  1908년 6월 29일 함양 수비 제 5중대 西原 중위 보고 요지(6.23. 함양) : 6월 18일(음력 5월 20일)부터 22일(음력 24일)에 걸쳐 함양 서남방 지구 검거를 위해 출장한 당대(當隊, 입석立石 수비대 포함)는 6월 21일 지리산의 절정 방장봉(方丈峰) 북방 유곡(幽谷, 깊숙한 골짜기) 및 동북방 사면(斜面)에 있는 대궐터(大闕基)에 적의 소굴(巢窟)이 있어서, 그 유곡에 있는 총기제작소(銃器製作所)는 지난날(過日) 구례(求禮) 수비대로 인해 깨뜨렸지만(破却), 대궐터에는 아직 토벌대가 진입할 수 없음을 알고서, 마천(立石 동남방 2리) 면장을 향도(嚮導)하게 해 병풍연(屛風然)이라는 험산(險山)에 깊이 들어가(深入) 어려움(荊棘)을 물리치고(排) 개암나무와 덤불(榛莽)을 밟고 간신히 대궐터에 도달하였다.

 

  적의 그림자(賊影)를 탐지할 수 없었지만, 현재(目下) 적(賊)이 신축중인 가옥은 80여 명을 수용하기에 족한 규모로서, 그 공사를 끝내고 그 주위에는 석루(石壘)를 설치해 목책 울타리(樹枝鹿柴)를 편성하여 소굴로 삼았다. 따라서 가옥 및 방어설비를 파괴하고 일부로 하여금 주위를 수색하여 좌(左)의 여러 물건(諸品)을 획득하였다. 화승총(火繩銃) 12정, 탄환 4貫目, 백미(白米) 7두, 기타 잡품. 파괴 가옥은 마천 면장이 방화·소각하고 말하기를 면민을 위해 적의 근거를 끊었다고 함.〔『(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Ⅱ〕

 

注 일본군 『진중일지』의 방장봉은 현재 중봉이다.

 

 

8. 지리산 호남 의병 활동 요약

 

  가. 1907년 2월 13일(음 12.31) 양한규 의진과 고광순 의진 남원성 공격함.(양한규 전사함)

  나. 1907년 10월 17일(음 9.11) 녹천 고광순(高光洵)이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순국함.

  다. 고광순 의병장을 잃고 의병들의 일부는 이듬해(1908년)에 의신 부락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함.

  라. 1908년 2월 2일(음 1.1) 설날 의신마을 하철굴암에서 야영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대부분 전사함.

  마. 의신에서 생존한 호남 의병들은 벽소령을 넘어 석상용 의진에 합류하고 백무진과 상원진으로 재편함. 

  바. 1908년 4월 29일(음 3.29) 상원진과 백무진이 연합하여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 입석수비대를 공격함.

  사. 1908년 5월 11일(음 4.12) 일본군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도마마을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려고 함.

  아. 1908년 6월 18일(음 5.20)~22일(음 5.24)에 함양 수비대 제5중대와 산내면 입석 수비대가 대궐터를 토벌함.

 

 

 

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