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천상의 화원 세석 평전의 명소를 찾아서

도솔산인 2022. 5. 3. 23:07

천상의 화원 세석평전의 명소를 찾아서 

 

 

▣ 일 시 : 2022년 05월 01일(일)~03일(화)

▣ 코 스 : 거림-음양수-창불대-세석대피소-촛대봉-세석연못-영신봉-비로봉-좌고대-영신대-거림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이세본기(秦二世本紀)」에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천은 사람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해도 침묵하는 사람', '사슴을 말이라고 해도 아첨하고 동조하는 사람', 상황 파악도 못하고 '사슴을 사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 2006년 10월 중순 청학연못과 세석산장 앞 습지의 영신사지라는 곳을 다녀온 후, 김종직의 유두류록과 유두류기행시를 읽게 되었고, 뭔가 싶어서 점필재길 답사를 시작하였다.

 

  세석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서 저여원(沮洳原)으로 '낮고 습기있는 지대'를 뜻한다. 《詩經》 「魏風篇」에 '彼汾沮洳 言采其莫[저 분수가 진펄에서 나물을 뜯는다.]' 라는 시구에서 인용하였다. 저여원은 '물이 많은 습지 고원'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1545(乙巳)년 4월 점필재의 길을 역으로 오른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남긴 《錦溪集》에도 세석을 저여원(沮洳原)이라고 하였다.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에는 적석평(積石坪)이라고 하였고, 음양수 부근을 외적평(外積坪)이라고 하였다. 1871년 배찬은 「유두류록」에서 細磧平田(세적평전)이라고 하였다. 1879년 송병선의 「두류산기」에서 세석평(細石坪)이라고 하였으며, 음양수 부근을 외세석(外細石)이라고 하였다. 1903년 안익제의 「두류록」에 드디어 오늘날의 명칭인 세석평전(細石坪田)이 등장한다. 일제 창지개명설은 근거가 없다.

 

  영신암 시 1, 2구 "창불대와 거상곡을 산책하고 돌아오니/노선사의 방장은 석문이 열려있네"에서 1472년 8월 17일 오후 창불대에서 영신암 석문까지 점필재의 동선을 추정할 수 있다. 2020년 10월 23일~25일 영신대 석문을 지나 창불대로 오르는 길목의 제1전망대에서 좌고대와 석가섭을 보았다. 김종직은 창불대에서 영신암으로 내려오며 이곳에서 좌고대와 석가섭을 직접 보고 기록을 남긴 듯하다. 이번 일정은 선관물자(善觀物者) 두 분과 우천 허만수의(1916~1976) 집터를 둘러보고, 세석연못과 영신사지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다. 

 

 

 

지원 박양준 선생 書

 

 

靈神菴(영신암) - 김종직

 

箭筈車箱散策回 : 전괄(창불대)와 거상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老禪方丈石門開 : 노선사의 방장(영신암)은 석문이 열려있네.

明朝更踏紅塵路 : 내일 아침이면 다시 속세의 길을 밟으리니

須喚山都沽酒來 : 촌장을 불러서 술이나 받아오라 해야겠네.

 

注 전괄(箭筈)과 거상(車箱) : 전괄은 화살 끝처럼 좁은 산마루를 말하고, 거상은 마치 수레의 짐칸처럼 우묵한 골짜기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음. 또는 전괄령(箭筈嶺)과 거상곡(車箱谷)의 명칭으로도 쓰는바, 두보(杜甫)의 망악시(望岳詩)에 “거상의 골짝에 들어서니 돌아갈 길이 없고 전괄로 하늘을 통하는 문 하나가 있구려.(車箱入谷無歸路 箭筈通天有一門)”라고 한  시에서 인용하였다. 《杜少陵詩集 卷六》 영신암 시에서 전괄은 창불대와 병풍바위 일원을 거상은 창불대 아래 창불대골을 가리키는 듯하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 탱화(족자)에 안평대군이 쓴 贊이 실려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몽산화상의 영정인지, 가섭도인지 혼란이 있다. 탁영 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에는 분명하게 가섭도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가섭도에 대한 기록은 점필재(김종직)와 탁영(김일손)의 유람록에만 나온다.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는 가섭전을 기록하고 있지만, 가섭도는 언급하지 않았다. 추강 남효온은 김일손보다 2년 먼저 영신암을 다녀갔다. 그 당시 영신암(빈발암) 법당 안에 가섭도가 있었을 것이다.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에는 가섭대만 나오고 가섭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안내하는 스님 2명[義文(계속 동행), 一冏(향적암 승려, 천왕봉만 동행)]과 지리산을 유람한 추강 남효온 선생의 두류산일과에는 다른 유람록에는 없는 소년대 계족봉 빈발암 나온다. 불교와 관련된 새로운 지명이 등장함에도 가섭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안평대군의 작품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세조에게 죽음을 당하고 대부분 유고가 逸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의 비해당(匪懈堂) 찬(贊)은 4언 8구의 고시 형식이다. 비해당은 안평대군의 호이다.

 

注 몽산화상(蒙山和尙) : 원나라 말의 스님.

 

 

蒙山畫幀迦葉圖贊

 

               匪懈堂 李瑢(1418 -1453)

 

頭陁第一 是爲抖擻 : 마하가사파존자께서는 두타 수행인 두수를 바르게 실천하시어

外已遠塵 內已離垢 : 밖으로 이미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 離垢의 경지에 이르셨네.

得道居先 入滅於後 : 앞서 (아라한과)를 깨달으시고 뒤에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雪衣雞山 千秋不朽 : 눈 덮인 계족산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길이 전하리라.

 

 注 * 몽산 : 원나라 고승 몽산화상. * 贊(讚) : 다른 사람의 書畵를 기리는 글. * 匪懈堂 : 안평대군의 호, 三絶 ; 시서화.  * 頭陁第一 : 마하가섭존자(마하카사파, Mahakassapa, 大迦葉),  * 塵垢 :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욕망이나 분노 따위의 모든 망념(妄念)을 이르는 말. * 적멸 : 번뇌의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높은 경지. * 道 : 阿羅漢果 : 아라한과, 깨달음의 경지, 聖者의 지위, 聲聞四果의 가장 윗자리. * 雪衣雞山 : 눈덮인 계족산(찬에 나오는 雪衣雞山과 유산기에 나오는 계족봉은 영신봉이 아닐는지)

 

* 雞山(雞足山, 계산, 계족산) : 인도에 있는 산. 唐 玄奘 <大唐西域記9> 莫訶河東入大林, 野行百餘里, 至屈屈吒播陀山, 唐言雞足.[단국대간 한한대자전], 계족산은 범어로는 꿋꾸따빠다산(Kukkuṭapāda-giri, 屈屈吒播陀山)또는 尊足山. 중인도 마가다국(摩揭陀國)에 있던 산. 3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현장(玄奘)이 갔을 무렵에는 정상에 탑이 있었다고 한다. 가섭이 여기서 입적하였음.[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인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가사를 다음에 오실 미륵 부처님께 전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사를 가지고 들어가서 아직까지 머물고 계시다는 산이다. 산의 모양이 닭의 발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계족산이라고 한다. giri는 산스크리스트어로 산이라는 뜻이다. 계족산의 이름은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다.[법륜종 보광사 원명스님]

 

  雞足山은 인도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吒播陁山:Kukkuṭapāda-giri)을 唐나라 현장법사(玄奘法師)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계족산으로 번역하여 소개함으로써 생겨난 이름이다. 雞足山은 마하가섭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받은 가사를 미래에 오실 미륵불께 전하기 위해 계족산의 바위 동굴에서 선정(禪定)에 들어가, 미륵불이 下生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산이다. 찬(贊)에 '설의계산(雪衣雞山)'은 '눈 덮인 계족산'으로 국역되나 인도 동북부에 위치한 계족산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혹독한 환경에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수행 정진했음을 강조하다 보니, 계족산이 와전 곡해되어 설산이 된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법륜종 보광사 원명스님]

 

  당시 영신암의 법당 안에는 원나라 고승 몽산화상(蒙山和尙)이 그린 가섭도에 비해당 안평대군이 贊을 짓고 썼다. 가섭도는 전해지지 않지만,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비해당이 쓴 '몽산화정가섭도찬(蒙山畫幀迦葉圖贊)'이 전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교문학사와 한문학사의 관점에서 유두류록의 가치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안평대군은 몽산화상의 제자 나옹화상, 나옹화상의 제자인 신미대사에게 불법을 배웠다고 한다. 贊을 읽어보면 비해당 안평대군이 불교에 얼마나 조예가 깊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비해당의 '몽산화정가섭도찬(蒙山畫幀迦葉圖贊)'은 '마하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가사를 가지고 계족산(영신봉) 영신대 석가섭의 자연불에 깃들어 미래의 미륵불을 기다린다.'라는 내용이다.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두타 제일로 미륵 세상과의 매개자이며 구도자인 영원불멸의 마하가섭존자를 찬양하는 글이다.

 

  1487년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는 빈발봉(빙발봉)과 빈발암, 계족봉이 나오는데, 가섭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추강 남효온은 '암자(빈발암) 뒤에 가섭전이 있는데, 세속에서 영험이 있다고 한다. 내가 자세히 보니 하나의 완연한 바위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추강 남효온이 지리산일과에서 여러 번 언급한 賓鉢峰(빈발봉)은 촛대봉으로 추정된다. 남효온은 다른 일행이 없이 승려 2명과 함께 지리산 유람길에 올라 어떤 유산기보다 자세하게 사물을 묘사했다.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 유일하게 보이는 빈발암은 과연 어디인지. 남효온은 좌고대를 보고 다시 빈발암으로 내려와 저녁을 먹고 일몰을 보았다고 했다. 따라서 빈발과 가섭과 영신은 마하가섭존자의 다른 이름으로 추강 남효온은 영신암을 빈발암이라고 한 것으로 본다.

 

注 * 빈발(賓鉢) :  빙발(氷鉢)이라고도 하며, 마하가섭이 인도의 옛 마가다국 북서쪽 바이바라(Vaibhara)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삐팔라(Pipala, 卑鉢羅, 賓派羅, 賓鉢羅)굴에서 수행하며. 대중을 교화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설도 있고, 마하가섭이 기사굴산(영취산)의 빈발라(핍팔라)굴에서 수행했다는 설도 있다. 어떤 경전에는 마하카사파 청년시절 이름이 핏파리(혹은 필바라야나)로 나온다.

 

  1489년 탁영 김일손은 가섭도를 보고 진귀한 보물이 산중에 버려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가지고가려고 하였으나, 伯勖(백욱 : 일두 정여창)이 '사가에 소장하는 것이 가섭전에 보관해두고 안목 있는 사람들이 와서 감상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며 만류하였다. 탁영 김일손이 비해당의 명필과 낙관을 보았다면, 일두 정여창은 가섭도의 비해당 贊의 내용까지 완전히 이해하였던 것 같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라는 기록과 안평대군 비해당 이용이 쓴 가섭도의 찬으로 미루어, 두 사람이 1453년 계유정난 이전에 영신암과 인연을 맺은 것 같다. 특히 비해당이 쓴 찬에 雪衣雞山(설의계산)은 눈 덮인 계족산 즉 영신봉을 가리킨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왕이 되기 위해 영험하다는 기도 도량 영신암에 다녀갔으나, 한 분은 왕위에 오르고 한 분은 죽음을 당했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영신암에 해마다 중사(中使)를 보내 향을 내렸고, 안평대군은 영신암에 있는 몽산 화상이 그린 가섭도에 贊을 남겼으며, 점필재 김종직은 그 사실을 유두류록에 기록하였다.

 

   그럼 정말 두 사람(수양과 안평)이 영신암에 다녀갔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 해답은 비해당 안평대군 이용이 가섭도에 쓴 찬에 들어있다. '마하가섭 존자가 선정에 들어가 영신봉 아래 가섭대에 깃들어 석가섭이 되어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에게 전하기 위해 기다린다.'라는, 인도에 있는 계족산(꿋꿋따빠따산)을 영신봉에 그대로 옮겨다 놓은 지리산의 빈발라(賓鉢羅)굴이기 때문이다. 불심이 깊었던 수양과 안평이 다녀갔다는 것은 나의 비약적인 추론인지 모른다. 그러나 청파 이륙과, 점필재 김종직, 추강 남효온,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금계 황준량, 감수재 박여량, 고대 정경운, 어우당 유몽인 등 조선 후기까지 수많은 관료들과 사족뿐만 아니라, 왕실과 일반 백성과 무당,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갖게 하는 구도의 도량이자 ··의 성지였다.

 

  마하가섭존자의 출가 전의 이름은 빈발[핏파리(혹은 필바라야나)],이다. 출가 후의 이름은 가섭(카사파), 부처님의 가사를 가지고 계족산 가섭대에 깃들어 적멸의 경지에 들어간 후의 이름은 영신으로 이해한다.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 나오는 빈발봉(유몽인은 사자봉)은 촛대봉, 계족봉(계족산)과 비해당 찬의 雪衣雞山(설의계산)은 영신봉으로 추정한다. 끝으로 giri(기리)는 산스크리스트어와 힌디어로 山이라는 의미로 현재에도 인도에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인도 비하마르주 중부 남쪽에 있는 불교 성지인 붓다 가야(Buddha Gayā)를 한자로 가야(伽倻/伽耶/加耶)로 표기했듯, 지리산(智異山) 지명의 유래giri(기리)에서 音借를 하여 '地理/地利' 또는 '智異'라고 한 것은 아닐는지... 개인적인 생각이다. 끝.

 

 

산천재
음양수샘
창불대
사진 : 이명희님
사진 : 이명희님
세석연못(적석동소지)
비로봉(1625봉)
비로봉(1625봉) : 서불과차(徐市過此) 영신대를 찾아서(201023~25)
좌고대
좌고대
좌고대
창불대에서 영신대로 내려오는 제1전망대 안부
제1전망대에서 좌고대와 석가섭
영신대의 석가섭(사진 : 일정 민산생님)
창불대와 영신대 옛길을 찾아서(210226~27)

 

 

※ 참고자료 : 영신대 관련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1. 1463 8월 <이륙>선생의 [유지리산록]

 

靈神寺東壇. 迦葉石像. 肩臂如火燒然. 諺傳. 燒盡人世當更. 卽有彌勒佛住世. 甚有靈驗云. 後峯有奇石削立如檣. 北臨萬丈. 復戴小石如床. 向般若峯稍低. 人有攀緣而登. 四向拜者. 以爲根性. 然其能之者. 千百僅有一二.

 

영신사(靈神寺) 동쪽 제단에는 가섭(迦葉)의 석상이 있는데 어깨와 팔에 불에 탄 듯한 자국이 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이 석상이 다 타면 인간 세상이 변해서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올 것이니 매우 영험함이 있다.”라고 한다. 뒤쪽의 봉우리에는 기이한 바위가 돛대처럼 솟아 있는데 북쪽으로 만 길이나 되는 벼랑에 맞닿아 있고 상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또 이고서 반야봉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다. 부여잡고 올라 사방을 향해 절하는 자는 근기가 잘 잡혀 있다고 여겨지는데 해낼 수 있는 자는 천 명 중에 한 두 명이 있을까 말까할 정도이다.

 

庭下有小泉. 水性堅. 香甚味. 號神泉. 下而爲花開川. 東有石峯. 如浮屠狀. 居僧以爲龜社主崔文昌. 不死在此云.

 

뜰아래 작은 샘이 있는데 물이 세고 매우 맛있어서 신천(神泉)이라고 불리는데 흘러 내려가 화개천이 된다. 동쪽에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부도(浮屠) 모양처럼 생겼다. 여기 사는 승려들은 귀사(龜社)의 주인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이 죽지 않고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1-1. 1463 8 <이륙>선생의 [지리산기]

 

두류산은 최고봉이 두 개가 있다. 동쪽은 천왕봉(天王峯)이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이다. 두 봉우리의 거리는 1백 리가 되는데 항상 구름으로 덮여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서쪽에 향적사(香積寺)가 있다.  40리를 가면 가섭대(迦葉臺)가 있다. 가섭대 남쪽에는 영신사(靈神寺)가 있다. 또 서쪽으로 20리를 내려가면 공터가 있다. 평평하고 비옥한 땅인데, 그곳의 넓이는 습지가 있어서 곡식을 심을 수 있다. 큰 잣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나뭇잎이 무릎까지 쌓였다. 가운데서 사방을 둘러보면 끝없이 넓은 평야다.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 개의 절은 모두 목판으로 지붕을 덮었는데, 살고 있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만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 그러나 거처하는 중은 한 두 명뿐이다. 산세가 험준하여 마을 사람과 접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히 고승이 아니면 정착할 사람이 없다. 영신사의 작은 샘에서 발원한 물은 신흥사 앞에서는 큰 냇물이 된다. 이 냇물이 섬진강으로 흘러간다. 이곳이 화개동천(花開洞天)이다.

 

 

2. 1472년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

 

暮登唱佛臺. 巉巉斗絶. 其下無底. 其上無草木. 但有躑躅數叢. 羚羊遺矢焉. 俯望荳原串麗水串蟾津之委. 山海相重. 益爲奇也. 空指衆壑之會曰. 新興寺洞. 李節度克均. 與湖南賊張永己戰于此. 永己. 狗鼠也. 以負險故. 李公之智勇. 而不能禁遏其奔逬. 卒爲長興守之功. 可嘆已.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너무 높아서 그 아래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 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이한 광경이었다. 해공이 여러 산골짜기가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장영기는 개나 쥐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략과 용맹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

 

 

宿靈神寺. 但有一僧. 寺之北崖. 石迦葉一軀. 世祖大王時. 每遣中使行香. 其項有缺. 亦云爲倭所斫. . 倭眞殘寇哉. 屠剝生人無餘. 聖母與迦葉之頭. 又被斷斬. 豈非雖頑然之石. 以象人形而遭患歟. 其右肱有瘢. 似燃燒. 亦云劫火所焚. 稍加焚. 則爲彌勒世. 夫石痕本如是. 而乃以荒怪之語誑愚民. 使邀來世利益者. 爭施錢布. 誠可憎也.

 

영신사(靈神寺)에서 머물렀는데 여기는 승려가 한 사람뿐이었고, 절 북쪽 비탈(절벽)에는 석가섭(石迦葉) 한 구()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을 내렸는데,  (석가섭) 목에도 갈라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 왜구는 참으로 도적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칼로 베는 화를 입혔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사람의 형상을 닮은 까닭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서로 다투어 돈과 베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迦葉殿之北峯. 有二巖突立. 所謂坐高臺. 其一. 下蟠上尖. 頭戴方石. 闊纔一尺. 浮屠者言. 有能禮佛於其上. 得證果. 從者玉崑廉丁. 能陟而拜. 予在寺望見. 亟遣人叱土之. 此輩頑愚. 幾不辨菽麥. 而能自判命如此. 浮屠之能誑民. 擧此可知. 法堂有蒙山畫幀. 其上有贊. .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네모난 돌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 거의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법당(法堂)에는 몽산 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

 

 

蒙山畫幀迦葉圖贊

 

               匪懈堂 李瑢

 

頭陁第一 是爲抖擻 : 마하가사파존자께서는 두타 수행인 두수를 바르게 실천하시어

外已遠塵 內已離垢 : 밖으로 이미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 離垢의 경지에 오르셨네

得道居先 入滅於後 : 앞서 (아라한과)를 깨달으시고 뒤에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雪衣雞山 千秋不朽 : 눈 덮인 계족산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길이 전하리라

 

* 몽산 : 원나라 고승 몽산화상. * 贊(讚) : 다른 사람의 書畵를 기리는 글. * 匪懈堂 : 안평대군의 호, 三絶 ; 시서화

 

傍印淸之小篆. 乃匪懈堂之三絶也.

 

라고 하였고.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었다.

 

 

東砌下有靈溪西砌下有玉泉. 味極甘以之煮茗則中泠惠山想不能過之西壞寺巋然古靈神其西北斷峯有小塔石理細膩亦爲倭所倒後更累之以鐵貫其心失數層矣.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玉泉)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이 있었는데그 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웠다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을 꿰어놓았는데두어 개의 층은 유실되었다.

 

 

3. 1487년 <남효온>선생의 [지리산 일과]

 

十月丁卯朔. 留米一斗別一囧. 香積. 少年臺. 穿綿竹度鷄足. 山行三十里. 抵貧鉢庵. 庵下有霛神庵. 庵後有伽葉殿. 世俗所謂有霛驗者. 余詳視之. 一石頑然. 余從伽葉殿後攀枝仰上一山. 名曰坐高臺. 有上中下三層. 余止上中層. 心神驚悸. 不得加上. 臺後有一危石高於坐高臺. 余登其石. 俯視臺上. 亦奇玩也. 義文坐臺下. 恐懼不得上. 是日之西面淸明. 倍於曩日. 西海及鷄龍諸山. 歷歷可辨. 須臾. 還下貧鉢夕飯. 時落日在庵. 人寰夜黑.

 

1일 쌀 한 말을 남겨두고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소년대(少年臺)에 올랐다. 솜대綿竹를 뚫고 계족봉(雞足峰)을 지나 산길로 30리를 걸어 빈발암(貧鉢庵)에 이르렀다 아래에는(암자 아래에) 영신암(靈神庵), 암자 뒤에는 가섭전(伽葉殿)이 있었는데 세속에서 영험이 있다고 하였다. 내가 그곳을 자세히 보니 한 덩이의 돌이 완연히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산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상, ,  3층이 있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심신이 놀라고 두근거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대의 뒤에는 위험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기이한 풍경이었다. 의문은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 두려워하면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 날 서쪽 방면은 전날보다 훨씬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산 등의 여러 산을 두루 분별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빈발암으로 돌아 내려와 저녁밥을 먹었는데, 마침 암자에서 지는 해를 보았다. 해가 지자 온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4. 1489 4 <김일손>선생의 [속두류록(續頭流錄)]

 

()十四日壬子. 宿靈神. 前有唱佛臺. 後有坐高臺. 突起千仞. 登而目可及遠. 東有靈溪. 注於剖竹之中. 西有玉淸水. 僧云鷹所飮也. 北有石迦葉像. 堂中有畫迦葉圖. 匪懈堂三絶. 煙煤雨淋. 惜其奇寶之見棄於空山. 欲取之. 伯勖曰. 私於一家. 曷若公於名山. 以備具眼者之遊賞也. 遂不取. 百姓施財. 邀福於迦葉與天王等. 夜宿法堂. 昏霧顚風. 敲戶排窓. 氣襲人甚惡. 不可得以久留也.

 

영신사(靈神寺)에서 묵었는데,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솟아 있어 올라가면 눈으로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는데, 대나무 홈통을 따라 물이 흘러들었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매가 마시는 물이라고 승려가 말하였다. 북쪽에는 석가섭상이 있었다. 당 안에는 찬()이 적힌 가섭도(伽葉圖)가 있는데, 비해당의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 흔적이 있으나 이 진귀한 보물이 빈 산에 버려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자 백욱이 말하기를, 사가(私家)에 사사로이 소장하는 것이, (어찌누락)명산에 공적으로 보관해두고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 유람하며 감상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라고 하여 가져가지 않았다. 백성들이 시주하여 가섭상에 복을 비는 것이 천왕봉의 성모상에게 비는 것과 같았다. 밤에 법당에서 묵었는데 안개가 자욱하고 바람이 휘몰아쳐 문짝을 후려쳤다. 사람을 엄습하는 찬 기운이 매우 사나워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5. 1545년 <황준량> 선생의 [遊頭流山紀行篇(유두류산기행편)]

 

* 乙巳夏四月 遊山川(225구~228구)

 

千尋迦葉日邊影 : 천 길의 가섭대가 햇빛에 그림자 드리웠는데

刃斫亦被島夷兇 : 흉악한 섬 오랑캐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구나.

民生血肉不堪說 : 백성들이 당한 피해는 말로 감당할 수 없지만

石木胡然逢鞠詾 : 바위와 나무도 어찌 그런 큰 재앙을 당했던가.

 

* 鞠詾 : 큰 재앙

 

注 : 1545년 황준량은 두류산을 유람하고 13제 16수의 시를 남겼는데, 장편고시(장단구) 遊頭流山紀行篇(유두류산기행편)] 225구~230구는 가섭대의 경관을 노래하였다. 참고로 遊頭流山紀行篇은 176운 352구 2,516자로 이루어진 장편고시이다.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3(최석기, 강정화)'의  p36에 가섭대의 注에 '영신사지 근처에 가섭대라는 절벽이 있다. 갓(모자)을 쓴 모습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저자가 가섭대를 직접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 석가섭 찾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황준량의 장편고시 [遊頭流山紀行篇(유두류산기행편)]의 '천 길의 가섭대가 햇빛에 그림자 드리웠는데/흉악한 섬 오랑캐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구나.'라는 詩句이다. 햇빛과 시간에 따라 바위가 돌출된 절벽으로도 보이고, 석가섭이 깃든 자연佛로도 보이니 빛과 그림자의 오묘한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석가섭(가섭대)

천 길의 가섭대가 햇빛에 그림자 드리웠는데/흉악한 섬 오랑캐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구나.

 

 

6.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仍降萬丈蒼壁. 靈神菴. 諸峯環拱面内. 如相向而揖. 毗盧峰在其東. 坐高臺峙其北. 阿里王塔樹其西. 迦葉臺壓其後. 遂投杖. 手足行陟毗盧峯上. 凜乎不可久留也. 菴有茶鼎. 香爐. 而不見居僧. 將樵蘇白雲而不知處耶. 抑厭避塵人而潛跡亂峯間耶. 節屆淸和. 始見杜鵑花半綻. 亦知山候稍暖於上峯也.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암자에는 차솥향로 등이 있었지만 살고 있는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흰 구름 속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인가? 아니면 속세 사람을 싫어하여 수많은 봉우리 속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인가? 청명하고 온화한 계절이어서 두견화가 반쯤 핀 것을 비로소 보았고 산 속의 기후도 천왕봉보다는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7.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지명

 

구분 좌고대 석가섭 비로봉 창불대 영신봉 촛대봉 비고
1463/이 륙 奇石削立如檣 迦葉臺/迦葉石像 東有石峯. 如浮屠狀        
1472/김종직 坐高臺 石迦葉/迦葉殿   唱佛臺 雪衣鷄山 甑峰  
1487/남효온 坐高臺 迦葉殿     雞足峰 賓鉢峰 貧鉢庵/少年臺
1489/김일손 坐高臺 石迦葉像   唱佛臺      
1545/황준량   千尋迦葉   唱佛臺      
1611/유몽인 坐高臺 迦葉臺 毘盧峰     獅子峰  

* 촛대봉을 1851년 하달홍은 中峰(중봉), 1879년 송병선은 燭峰(촉봉) 이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