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한말 의병장 석상용 선생의 묘소와 전적비를 찾아서

도솔산인 2022. 4. 24. 19:17

한말 의병장 석상용 선생의 묘소와 전적비를 찾아서

 

 

▣ 일 시 : 2022년 04월 20일(수)~24일(일)

▣ 코 스 : 군자정-일두고택-용유담-두류암터-석상용선생 묘-석상용선생 전적비-희구정(곡성)-휴휴산방 

▣ 인 원 : 2명

▣ 날 씨 : 맑음

 

 

  대둔산 석천암 암굴 입구 양쪽에 '枕石(침석)과 漱泉(수천)' 마애 석각이 있다. 석천(石泉)이 나오는 암굴(巖窟) 상단 중앙에 '一广(일엄)' 석각이 있다. 일엄(一广)은 조선 후기 영조와 순조 때에 충남 연산에 살았던 김장생의 6대손인 김상일(金相日, 1756~1822)의 號이다. 김상일(金相日)의 문집 《일엄유고(一广遺稿)》 권지삼(卷之三) 부록(附錄) 묘지문(墓誌文)에 1805년(순조 5년) '일엄(一广)'의 나이 50세에 '大芚山에 一广枕石漱泉濯纓仁智라는 열 글자를 새겼다.[一广遺稿 卷之三 附錄 墓誌文 : 弱冠遊金剛 晩年刻一广枕石漱泉濯纓仁智十字於大芚]‘라는 기록이 있다. 

 

 

枕石(침석)
漱泉(수천)
一广(일엄)

 

  침석·수천(枕石·漱泉)은 '돌을 베개로 삼고 샘물로 양치질 한다.'는 의미로 '山水를 벗삼아 자연에서 살아간다.'라는 뜻이다. 석천암의 枕石(침석)과 漱泉(수천) 석각은 송시열의 필획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조용헌 박사의 「숨어 공부하기 딱 좋은 ‘한국의 靈地’, 대둔산 석천암…(월간산4월호, 2012.02.28)」에서 우암 송시열(1607~1689)의 필획으로 소개되면서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다. 枕石(침석)과 漱泉(수천)은 일엄(一广) 김상일(金相日)의 필획이다.

 

  2020년 4월 일엄(一广)의 침석·수천(枕石·漱泉) 석각이 인연이 되어 조용헌 교수를 만났다. 심야에 대둔산 석천암에서 영랑대와 일엄(一广)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틀 뒤에 '[조용헌 살롱] [1242] 세상과 떨어져 있을 때'에 김상일(金相日, 1756~1822)의 필획으로 정정한 조선일보 칼럼을 보내왔다. 이후 조용헌 박사의 강호 동양학 영지순례에 가끔 동행한다. 이번에는 마천 출신 한말 의병장 석상용 선생 묘소와 전적비를 함께 찾았다. 얼마 전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에서 일본군 진중일지(1908)에 나오는 '대궐터와 폭도의 소굴' 박회성에서 상원진 건물터와 무쇠 솥 조각을 찾아냈다. 의병(독립) 운동 발굴과 선양에는 동서와 좌우가 없다. 끝.

 

 

 

 

박회성 샘터에서 발견한 무쇠솥 조각

 

 

[조용헌 살롱] [1344] 석상용 장군 입력 2022.04.25. 오전 12:01


지리산의 ‘허공달골’을 다녀왔다. 허공달골은 저녁 동쪽에서 달이 뜨면 새벽에 서쪽으로 달이 사라질 때까지 이 골짜기에서는 그 달을 전부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다. 허공달골의 해발 830m 위치의 언덕에는 석상용(石祥龍·1870~1920) 장군의 무덤이 있다. 1908년 남원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와 총격전을 벌였던 의병대장이었다.

석상용 무덤의 돌비석에는 ‘飛虎將軍 勇力絶人(비호장군 용력절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어찌나 몸이 날랬던지 마치 나는 호랑이 같았고, 힘도 장사라서 맨몸으로 붙으면 일본군을 집어 던질 정도였다고 한다. 석상용이 이끌던 의병들은 주로 함양군 마천면(馬川面)의 동네 사람들이었다. 깊은 산골 사람들이 석상용을 따라 화승총을 들고 의병활동을 하였다.

석상용 부대가 진을 쳤던 아지트는 지리산 촛대봉 바로 밑에 있는 ‘대궐터’ 였다. 해발 1300m의 아주 험준한 요새 지형이었다. 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일컬어지는 구형왕대에 구축했던 대궐이 여기에 있었다고 구전으로 전해진다. 가야국 임시정부의 피난성이 아니었나 싶다. 보통 ‘박회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밖에 있는 성’이라는 의미이다. 지리산 전체를 통틀어 가장 험준한 요새에 해당한다.

실상사에 주둔하다가 석상용 부대의 공격을 받았던 일본군은 치밀한 작전을 세워 반격한다. 현지 사람 마천면장을 앞장세우고 쳐들어와 이 대궐터 진지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 얼마 전에 가보니 의병들이 사용했던 솥단지가 조각난 상태로 발견되었다. 석상용은 이 대궐터에서 탈출한다. 1908년부터 5년 동안 일본군의 추적대를 피해 지리산 동북 지역 일대를 숨어 다닌다. 지리산 노장대(老將臺), 미타봉, 진주 독바위 일대이다. 이 일대에는 자연 바위 동굴이 대략 50~60개가 넘는다. 은신하기에 좋은 지형이다. 이 지역 토박이들은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난리 났을 때 굴로 들어가면 산다.’라는 말을 듣고 컸을 정도이다.

진주민란, 동학, 구한말 의병을 했던 사람들이 이 자연 동굴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석상용은 자연 동굴 덕택에 일본 추적대를 피해 무려 5년간이나 잡히지 않고 활동이 가능했다. 물론 고향이었던 마천 사람들이 몰래 식량을 날라다 주었을 것이다. 1912년 마침내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5년간 진주 교도소에서 징역을 살다가 나와서 마천에 돌아와 3년 있다가 50세에 죽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인물이었다. 함양군 마천의 잊혀진 인물 석상용 장군을 기린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義呑村 의탄 마을에서

 

                        점필재 김종직

 

老翁積稻過茅簷 : 늙은이가 볏단을 지붕보다 높게 쌓고서

黃犢蹊田叱小男 : 송아지가 밭에 뛰들자 아이를 꾸짖누나

削得烏椑曬溪石 : 오비시는 깎아서 시냇가의 돌 위에 말리니

紅光橫逗斷橋南 : 붉은 빛이 끊어진 다리 남쪽에 비껴 머무네 

 

土人剝柹 曝其皮於溪石上 以爲深冬之食 : 그 고장 사람들은 감을 깎아서 그 껍질을 시냇가의 돌 위에 말리어 깊은 겨울의 먹을 거리로 삼는다.

 

注 茅=띠 모.簷=처마 첨,  처마 염, 犢=송아지독, 蹊=지름길 혜. 削=깍을삭.椑=술통 비, 감나무비, 널벽. 曬=쬘 쇄. 햇볕을 쬐다. 햇볕에 말리다. 逗=머무를 두, 피해 돌아갈 기.

 

 

 

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義兵將石祥龍之頌功碑)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 두류암(頭流巖)

행적자 : 의병장 석상용  연대 : 일제강점기   입석시기 : 1921년 1월 10일 세움

[개요] 일체 치하에서 그의 셋째 아우 채용(彩龍)씨가 대담하게도 장군의 공을 기린 33자의 글을 써서 비를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의병활동 공적비는 전국에서 하나뿐이라고 史學家들은 말하고 있다.

 

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

공의 자는 용현(龍見)이다. 세칭 비호장군이라 칭한다. 장군은 용기와 힘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국가가 위망(危亡)에 처한 것을 보고서, 지리산 중에서 의병(義旅)을 일으켜 왜병을 참(斬)한 것이 매우 많았다. 마침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5년이 지난 후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로 인하여 질병의 고통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마침내 庚申(1920)년 10월 분한 마음을 품고 별세하였다. 辛酉(1921)년 정월 초 10일에 세우다.

 

義兵將石祥龍之頌功碑

公字龍見世稱飛虎將軍勇力絶人見國家危亡起義旅于智異山中斬倭兵甚多竟被日憲投獄經五年放還因此疾痛數年辛艱庚申十月含憤而別世 辛酉正月初十日竪

 

 

前面長盧公址鉉永思碑(전면장노공지현영사비)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도계공원(애향공원)

행적자 : 농천(農川) 노지현(盧址) 마천 면장   연대 : 대한제국시대   건립일 : 1983년 9월

[개요] 한일합방 전 무신년(1908년)의 사실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고 대한제국 군을 해산시키고 일본군이 전국에 배치되어 있을 때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추성의 석상룡 의병장이 부하들을 인솔하여 밤에 습격을 하였는데, 익일(翌日)→5월 11일 면내 청년들을 무조건 집합시켜 놓고  간밤의 습격여부를 추궁함에 면장으로서 무죄함을 행동과 신호로 설득하여 죽음의 場에서 구출하였음.

 

 

前面長盧公址鉉永思碑(전면장노공지현영사비)

 

戊申義騷 : 무신년(1908년) 의병 소요에   

敵愾怒潮 : 적의 분개심은 성난 파도와 같도다.

賊反討主 : 도적이 도리어 주인을 치니 

餘波蕩勦 : 여파가 방탕하고 문란하여졌도다.

忠言切旋 : 충고의 말이 절실히 반영이 되면서 

居民安堵 : 주민이 안도하게 되었도다.

追酹爾功 : 그대의 공을 평가하니

凛凛昭昭 : 늠름하고 밝고도 밝도다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함은 사람의 본심이요 불의를 볼 때의 분심의 발로는 본연의 이치라. 이 의분심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거니와 불의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항쟁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을 감행하여 위기의 직전에 있는 수많은 면민들의 목숨을 구한 분이 있으니 즉 풍천노씨(豊川盧氏) 지현(址鉉)이다. 문효공(文孝公)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선생의 11대손으로 1861년(辛酉, 철종 12년)에 출생하셨으니 때가 한말 어려운 때라.

 

  일본이 우리 강토를 탐내고 갖가지 침략을 자행타가  끝내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고 정치에 까지 그들이 마음대로 하는지라.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하여 각지에서 봉기하였으니 이것이 의병이었고, 의병을 진압시킨다는 구실로 일본은 자기네의 병력을 끌어들여 전국 각처의 요소에 수비대를 주둔시켰으니 우리고장의 들머리에 있는 실상사에도 주둔하고 있었는지라. 의병대장 석상용(石祥龍, 1870~1920)이 이를 소탕코자 백여명의 병력을 모아 서기 1908년(戊申) 5월 11일4월 29일 이 날이 음력 3월 그믐이라 야음을 타서 실상사를 포위하고 화심포 탄환이 다하도록  공격을 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으므로 횃불을 절마당에 던졌더니 왜병이 횃불을 주워 인근에 있는 나무더미에 던져 충전하는 화광을 이용하여 조총으로 반격하는지라. 이를 대응하였으나 실탄이 없으므로 약간의 희생을 당하고 후퇴하셨는데, 이튿날5월 11일 왜병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젊은이와 부락민을 도마마을 서당 뜰에 강제로 집합시켜 그 앞에서 문초를 하는데 잡혀온 당흥마을 김학길(金學吉)이 앞줄에서 옆줄로 옮겨 앉는다고 즉석에서 사살하고 남은 사람을 처형한다는 즈음에 면장 노지현이 뒤늦게 알고 달려와서 여기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죄없는 사람들이니 죽이지 말라고 외친 즉, 왜병은 발길과 총부리로 심히 구타하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옷깃을 헤쳐 가슴을 내밀며 나를 죽이고 죄없는 자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호통하니 야만적인 왜병들도 공이 너무나 당당한 용기와 기백 그리고 줄기찬 항변과 늠름한 위엄에 감복하여 총부리를 거두고 모두 해산시켰다.

 

  이때의 상처가 끝내는 다리의 불구로 일생을 마쳤으니 향년 67이요 1927년 丁卯 9월 22일이라. 맨주먹으로 왜적의 총칼 앞에 생사를 무릅쓰고 풍전등화 같은 위기일발에 있는 면민들의 목숨을 구했으니 그 은덕은 하해와 같고 그 공은 태산과 같도다. 허경천(許敬天) 선생의 글로 사명당거리 암벽에 전면과 같이 새겼으니 1983년 馬柳선 도로 확장으로 이 자리에 옮겨 새로이 비를 세우면서 면유지 여러분의 청에 의하여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몇분의 노인을 찾아 설명을 듣고, 또 한국독립운동투쟁사와 石大將의 약전을 참고하여 사실을 간추려 적었노라.

 

1983년 癸亥  9월   일

 

羅州 林命根 撰

晋陽 鄭大甲 書

馬川面民  建立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6-1번지(전북 경남 도계)

행적자 : 해주인 석상용  연대 : 한말(1908년)  건립일 : 1995년 8월 15일

 

[개요] 일본은 1907년 강제로 정미 7 조약을 맺고 조선 관군을 해산시키고 일본군이 전국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왜병을 석상용(石祥龍) 장군이 의병과 화전민을 규합하여 1908년 음력 3월 그믐 어두움을 타고 기습하였고,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며 쑥밭재 전투, 벽소령 전투, 성삼재 등에서 기습작전을 하였다. 1912년 왜군에게 잡혀 5년간 수형 옥고 하고 고문의 여독(餘毒)으로 고생하다가 50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하였음.

 

義兵將石祥龍先生戰蹟碑

 

20세기에 들면서 이 나라에는 진한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하였다. 대륙 진출을 노리는 일본국은 드디어 친일 주구(走狗)들을 앞세워 강제로 乙巳 5 조약을 맺고 국제 외교권을 박탈하는 한편 1907년에는 조선 관군을 해산시켰으니 삼천리강산은 나라 잃은 설움으로 곡성이 메아리쳤고 눈물은 흘러서 강물에 홍수를 이루었다. 그 무렵 전국의 우국지사(憂國志士)들은 의병대를 조직하여 일본 관헌들과 맞싸우게 되었으니, 우리 고장에서는 보면 추성리 출신의 석상용(石祥龍) 선생이 지리산 일대의 화전민들을 일깨워 규합하고 의병활동을 지휘하였던 바, 그 대표적인 전투가  실상사 전투와 쑥밭재, 그리고 벽소령 및 성삼재 전투 등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소에 담대(膽大)하고 용맹하였으며 의협심(義俠心)이 강했던 선생은 나라 잃은 설움을 설욕(雪辱)하고자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들에게 불시 기습(奇襲)의 유격전(遊擊戰)을 펴왔으니 그들에게는 항상 공포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1907년 실상사에는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선생은  1908년 4월 29일(음력 3월 그믐날) 캄캄한 야음을 이용해 약 50여 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습격하였다. 크게 놀란 왜군은 절 뜰에 쌓아둔 나뭇가지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고 반격하였다. 오랭 접전 끝에 의병대는 서쪽 노루목으로 퇴각하였으나 그 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왜군들은 본면 도마리의 서당에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 학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당시 본면 면장 노지현(盧址鉉)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선생이 이끄는 의병대는 1907년 말부터 5년간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어 왔지만 운명의 신은 계속 선생의 곁에서 같이 해 주지를 아니하였다. 1870년 10월 29일생인 선생은 1912년 왜군에 잡혀 진주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고, 출옥 후에는 옥중에서 당한 고문(拷問)의 여독으로 병고에 시달리다가 1920년 12월 6일(음 10월 26일) 50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하시었다. 明의 유민(遺民)이신 선생의 귀화사(歸化史)는 멀리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선조 25년) 왜의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은 조총으로 무장한 15만의 군단을 이 땅에 상륙시켜 삼천리강산을 휩쓸게 하였고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던 선조는 급보를 명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하였지만 그때는 명도 북쪽 변방에서 몽고족의 일파인 오이 파트 따따르족의 외침에 시달리던 때여서 원군을 파병할 여력이 없다며 이를 거절해왔다. 그러나 그때 명의 병부상서(兵部尙書)이던 석성(石星)은 조선의 침략은 곧 명의 침략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을 펴 이여송(李如松)의 원군이 오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왜는 일단 물러갔으나 그는 그 후 정적들로부터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대한 외교 실패라는 문책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처형되었으며 그 후손들은 조선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하게 되었으니 그 13대손의 종손이 석상용 선생이시다. 오늘 우리 本碑 건립추진위원회 회원 일동은 조국 광복 50주년을  맞아함에 있어 대를 이러 항일에 몸 바치신 선생의 거룩한 애국정신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 삼가 명복을 빌면서 후세에 길이 귀감(龜鑑)으로 삼고자 그 내력을 이 돌에 새겨 전하는 바이다.

 

1995년 8월 15일

 

의병장 석상용 선생 전적비 건립 추진위원회 회원 일동

글지은이 智山 崔点甲

글 쓴 이 東齋 鄭麟相

 

 

휴휴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