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동부 영랑대와 아홉모랭이길(220416~17)

도솔산인 2022. 4. 18. 09:19

지리동부 영랑대와 아홉모랭이길(220416~17)

 

 

▣ 일 시 : 2022년 04월 16일(토)~17일(일)

▣ 코 스 : 광점동-일곱모랭이-방장문-청이당-영랑대-하봉(소년대)-국골사거리-쑥밭재-방장문-미타봉-광점동

▣ 인 원 : 산친들과

▣ 날 씨 : 맑음 영하 1도

 

 

  광주 ○○팀과 지난 2월 말 촉도난의 검각 도덕봉에 이어 두 번째 산행이다. 나는 아직도 산행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전날 오후에 내려와서 마적대님의 신농산삼약초원에서 숙면을 하였다. 토요일 아침 마적대님은 천왕봉으로, 나는 광점동에서 영랑대로 향했다. 일행들과 영랑대에서 1박을 하고 구롱길을 역으로 진행하였다.  1472년 김종직선생이 4박 5일 동안 지리산을 유람한다. 8월 14일 함양 관아를 출발하여 고열암에서 1박을 하고 천왕봉으로 올라간다. 구롱길은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약 5km 구간의 상허리길 루트를 말한다. 평균 고도 1050m 고원의 지능선 모롱이를 돌아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아홉모랭이 길은 일강(一岡)을 넘어, 삼·사롱(三·四隴), 동부(洞府), 구롱(九隴)을 지나 청이당에 닿는다.

 

  고열암에서 쑥밭재로 이어지는 아홉 모랭이(구롱) 길 초입은 남쪽 사면으로 너덜지대를 지난다. 언덕 위로 조금 올라서면 산죽밭이 이어지는데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계곡 허리길을 따라가면 점필재가 언급한 도사목(倒死木)의 약작(略彴, 통나무 다리)이 있었던 건 계곡을 건너 대형 숯가마터에 이른다. 숯가마터에서 50m 아래 송대 계곡의 발원지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 친절한 샘이 있다. 일강샘이다. 경사지를 가로질러 능선에 오르면 위로는 향로봉(상내봉) 방향이고, 아래로는 미타봉과 벽송사로 이어지는 등달길을 만난다. 경사지 길은 오래 묵어 흙이 많이 흘러내려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 첫 번째 일강(一岡, 벽송사 능선)을 넘으면서 안내한 승려 해공이 점필재에게 '구롱(九隴) 중 첫 번째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이곳에서 미타봉은 바로 지척이다. 일부에서 아직도 미타봉을 상내봉이라고 하는데... 창지개명하는 속내를 잘 모르겠다.

 

  일강(一岡)에서 사립재골 방향 상 허리길로 진입하면,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또 숯가마터를 만난다. 여기에서 아래로 진행하다가 실계곡을 건너고 사립재골 집터와 습지를 지난다. 길은 평탄하게 남쪽으로 향하고 산죽밭을 지나 작은 모랭이를 돌면 바위가 나타나는데 세 모랭이 이정표 바위이다. 이어서 네 모롱이 바위와 넓은 터를 지난다. 유두류록에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鷄犬牛犢)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 ,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 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부(洞府)는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너덜이 없고 평탄하고 넓은 지형으로, 마을을 형성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구롱(九隴)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홉 언덕'이지만 순수한 우리말인 '아홉 모롱이(아홉 모랭이)'를 한자로 한역한 어휘이다. '아홉 모롱이'는 사투리로 '아홉 모랭이', 또는 '아홉 모래이'라고도 하는데, '산기슭의 쏙 내민 귀퉁이'라는 의미이다. 롱(隴)은 ( 언덕부)+龍(용용, 언덕롱)으로 '용의 형상처럼 구불구불한 산모롱이 언덕 길'을 뜻한다. 순수한 우리말인 '모롱이'를 롱(隴)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등산의 개념에서 생각한 산길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그 한계였다. 산촌 사람들의 생활길은 가축(牛馬)을 끌고 또는 짐을 지고 이동하기 때문에 가장 편안한 길이어야 하고, 시간과 거리 또한 단축해야 하니 최대한 지름길이다.

 

  김종직 선생이 동부(洞府)에서 청이당에 이르는 길도 상 허리길을 이용하였다. 모롱이를 돌 때마다 연이어 실 계곡이 나오고 너덜지대는 돌을 깔아 포장을 하였으며, 쓰러진 고목나무와 거대한 바위가 그림처럼 즐비하게 펼쳐진다. 집터를 지나 어름터에서 진주독바위로 오르는 능선을 넘어 같은 고도에서 평탄한 지형으로 상 허리길은 계속 이어진다. 송대 마을 지인(知人)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그 길은 노장대(독녀암)에서 시작하여 쑥밭재로 이어지는데, 지금도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나물을 뜯을 때 가끔 왕래하는 길'이라고 한다. 혹자(惑者)들이 모랭이의 숫자를 가지고 '시시비비'를 論하는데... 유두류록에서 이미 1, 3, 4, 9 모랭이를 언급하였으니, 나머지 모랭이에 숫자를 붙이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구롱(九隴) 길은 어름터에서 쑥밭재로 오르는 길과 연결된다. 마지막 구롱(九隴)은 쑥밭재로 올라오는 길과 동부 능선이 만나는 부근으로 추정한다. 점필재는 이곳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홉 모랭이를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니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 풀과 나무들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 멀지 않음을 알았다. 몇 리를 못 가서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를 조망할 수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 유두류록에 첫 모랭이 일강(一岡)과 마지막 모랭이 구롱(九隴)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김종직 선생은 상 허리길로 구롱(九隴) 지나 쑥밭재를 넘어 청이당에 닿는다.

 

  2020년 3월 말 아홉모랭이 길을 연결했지만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갈 때마다 구롱길이 새롭다. 지난 2년 동안 도사목(倒死木)과 덩굴을 걷어내고 묵묵히 케른을 쌓았다. 산길은 암자터에서 암자터, 집터에서 집터, 움막터에서 움막터, 숯가마터에서 숯가마터, 샘터에서 샘터, 이정목에서 이정목, 이정표 바위에서 바위, 고개에서 고개, 모랭이에서 모랭이, 돌 포장에서 돌 포장 조합으로 이어진다. 1000m가 넘는 지리산 동북부 고원지대에 5km가 넘는 인공으로 조성된 도로가 있다. 개인적으로 가야인(伽倻人)들이 건설한 가야(伽倻)의 고도(古道)라고 생각했지만, 방장문 석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리가 산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이다. 산행은 독서와 같아서 심독(心讀)을 해야 하고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답사팀은 수없이 답사를 반복하고 토론한 후에 현장을 찾아 퍼즐을 맞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다. 귀를 열어야 비로소 사물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최고라는 생각은 비상(砒霜)이 들어간 독약과 같다. 이 세상에 나만 못한 사람은 없더라. 끝. 

 

 

 

오늘의 목적지 영랑대
지산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소재 芝山䑓 석각(180624)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소재 芝山䑓(지산대) 석각(180624)  지산대 석각을 찾아간 것은 1580년 변사정이 언급한 자진동(紫眞洞)과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方丈山賦)에 보이는 氷峙(빙치)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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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터 독가
일곱모랭이 이정표 고사목
방장문

 

김종직의 구롱(九隴) 길 방장문 석각 탁본(200709)

김종직의 구롱(九隴, 아홉 모랭이)길 방장문 석각 탁본(200709) 금년 3월 14일~15일 김종직 선생의 구롱(九隴, 아홉 모랭이) 길을 찾으면서, 점필재 길 복원의 속도를 더하였다. 5월 16일에는 구롱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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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밭재~청이당 초입
천례탕-천예당-천녀당-청이당
청이당터 앞 계석
청이당터 석축

 

지리동부 쑥밭재와 청이당의 어원에 대하여

지리동부 쑥밭재와 청이당의 어원에 대하여 ​ 1. 문헌에 나타난 쑥밭재의 명칭 쑥밭재의 명칭은 1871년 배찬의 유듀류록에는 애현(艾峴), 1877년 박치복 남유기행과 허유의 두류록, 1937년 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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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대

 

※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타난 永郞臺(영랑대)의 명칭

 

유람록 명칭 비고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영랑재(永郞岾)  
2    1586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영랑봉(永郞峯)  
3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영랑대(永郞臺)  
4    1823년 김선신의 두류전지 영랑참(永郞站)  

 

 

 

일몰
3월 16일 기망
소년대굴
曉月(효월, 새벽달)
일출
일곱모랭이 고사목
주막터(집터)

 

  이곳은 실제로 주막터였다. 광점동에 살았던 故 이봉덕(대략 51년생)씨 선대부터 1968년까지 이곳에서 주막을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골짜기마다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다. 이 집터는 천왕봉을 오르는 아홉 모롱이 길과 얼음터에서 새재 마을로 넘어가는 교차점 4거리에 위치해 있다. 1968년 김신조와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태로 화전민이 소개되면서 정부에서 화전민들에게 벽송사 입구에 주택을 지어주었다. 지금도 그 집들이 남아있다.

 

 

네모랭이 초입 바위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가운데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라는 문구이다. 국역본마다 해석이 다른데(이름을 쓰게 하였다), 내 생각은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전면(복판 腹板)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묵서로 썼다면 당연히 지워졌을 것이고, 석각을 새겼다고 해도 550년 세월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없다. 혹시 이 바위가 아닐까. 개인적인 생각이다.

 

 

세모랭이 바위
일강바위
코끼리바위
두류암 북쪽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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