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의병장 지산 이기찬의 삶과 의병항쟁

도솔산인 2022. 1. 9. 10:59

의병장 지산 이기찬의 삶과 의병항쟁

 

 

1. 출생과 성장

 

  이기찬(李起璨, 1853-1908)1853년 음력 1012일 청송부(靑松府) 서덕동(西德洞)의 고향 집에서 태어났다. 고조부 이윤화(李允華)가 이곳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후손들이 계속 살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참봉 이태효[李泰孝, 상의(象儀)]와 의성 김씨 김만필(金萬弼)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경능(敬能) 호는 지산(止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선왕조 태조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후손이다.

 

  이기찬은 6세 때부터 글을 읽게 되면서 효경·소학 등을 배웠다. 특히 백부 덕암공(德庵公)은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다가 1861년 이기찬은 아버지를 따라 의흥현(義興縣) 나호동(羅澔洞, 현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남서(楠西) 박춘립(朴春立)의 문하로 들어가, 경서(經書)와 역사서 등을 배웠고, 1868년 스승의 딸과 혼인하였다. 하지만 그해 10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12년 뒤인 1880년에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이어 스승이자 장인인 박춘립(朴春立)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15여 년 동안 부모와 스승이 그의 곁을 떠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이후 이기찬은 스승의 유언에 따라 을묘소청동고록(乙卯疏廳同苦錄)』을 편찬하였으며, 심경·근사록 등을 강론하는 등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러다가 1889년 겨울 상주(尙州) 화서(化西) 금천(錦川)으로 이사하였는데, 스스로 금초(錦樵)라 호를 짓고 은둔하였다. 금천은 지금의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錦山里), 본래 속리산 남쪽 지연인 화령현(化嶺縣)에 속해 있었다. 화령은 호서와 영남의 경계 지역으로 산이 깊고 풍속이 순박한 곳이다.

 

 

 

 

2. 김산의진 대장으로 의병항쟁을 펼치다.

 

  금천에서 은둔하며 학문에 매진하던 이기찬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1896년 김산의진(金山義陳) 대장에 추대가 되면서였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금천 부근 천탁산(天卓山)에 성을 쌓고 동학을 피하였는데, 노여경(盧與敬홍귀주(洪龜疇정홍묵(鄭弘黙) 등이 함께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통곡을 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경북 곳곳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18961월부터 안동·청송·진보·영양·영덕·영해·영주·예안·봉화·순흥·풍기·용궁·예천 등 14개 군현에서 의진이 결성되었다.

 

  당시 김천에서는 여영소(呂永韶)와 여중룡(呂中龍)이 각처에서 창의한 의병에 자극받아 1895년 음력 12월에 통문을 돌리면서 거의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관청의 위세와 일본군의 의병 탄압 소식에 크게 위축되었다. 창의 격문과 통문이 계속 날아들어 창의를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정월 다시 창의를 논의하였는데, 329일 향회를 개최하고 창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이기찬은 상주와 선산인들을 중심으로 상주에서 창의를 준비하였다. 그는 이기하(李起夏조동석(趙東奭) 등과 함께 왕산(旺山) 허위(許蔿)를 만나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여러 번 논의만 거듭하였을 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천의 통문을 보고 합세를 요청하였고, 323일 이기찬은 양제안(梁濟安) 등 수십 명을 이끌고 가서 동월 24일 새벽 김천읍으로 들어갔다.

 

  그 결과 1896324일 김천·상주·선산 등의 인물들이 모여 김산향교에서 연합 의진인 김산의진을 창의하게 되었다. 김산의진은 우선 군례(軍禮)를 행하고, 대장기를 세우면서 그 진용을 정비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대장 : 이기찬李起璨
중군 : 김기력金基櫟
찬획 : 조동석趙東奭·이용주李龍周·강일선姜馹善·허겸許蒹·이능규李能圭·이상설李相卨·여중룡呂中龍
군관 : 강무형姜懋馨·이기하李起夏종사 : 이숭주李崇周·최동은崔東殷
참모 : 허위許蔿·여영소呂永韶
군량도감 : 조석영曺奭永·여승동呂承東·이현삼李鉉參·조남식趙南軾
장재관 : 배헌裵瀗·강명숙姜明淑·박래환朴來煥

 

  김산의진은 김산·개령·지례·상주·선산 등지의 유생들에 의해 연합의진으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그리고 계당(溪當) 류주목(柳疇睦)의 문인들이 주도하던 향촌 사회를 기반으로 창의한 유생들이었다.

 

  김산의진의 진용을 출신지역에 따라 분류하면, 김천 출신은 김기력·여중룡·여영소·여승동·이용주·강일선·이상설·이숭주·최동은·조석영·이현삼·배헌 등이며, 상주 출신은 대장인 그를 비롯한 조동석·강무형·이기하·조남식·박래환·이시좌(李時佐)등이고, 선산 출신은 허위와 허겸(許蒹) 등이었다.

 

  대장에 오른 이기찬은 대구로 진격하기 위해 325일 김산의진을 이끌고 김산향교를 출발하였다. 이들은 지례를 거쳐 328일 구성(龜城)으로 나아갔는데, 다음날인 329일 관군 수백 명이 김천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에 조직·전략 등이 완비되지 않았던 김산의진은 흩어졌다. 그는 할 수 없이 상주로 돌아갔다가 4월이 되어서야 김천으로 돌아왔고, 47일 직지사에서 여영소 등을 만났다.

 

  이후 이기찬은 직지사에서 통문을 돌리고 다시 창의하였다. 그는 의진을 황계로 옮겼다가, 진용을 또다시 정비하기 위하여 417일 지례의 홍심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용직의 도움으로 군량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421일 구성면 도곡촌에서 관군과의 전투 패배로 홍심동 방어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무주로 의진을 옮겼다.

 

  김산의진은 다시 428일 영동을 거쳐 황간으로 이동하였는데, 55일 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이기찬은 양제안·조동석 등과 전투를 펼치며, 보은·괴산·문경 등을 거쳐 상주 화서면 하송리 청계사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김산의진 대장직을 사임하고, 진사 조동석(趙東奭) 군문도총에게 대장의 임무를 넘겼다.(四月三日戊辰傳任于趙都摠) 그날이 515(음력 43)이다. 6월 그의 장남인 이강하가 상주 감옥에 갇혔고, 후임 의병대장 구운(九雲) 조동석(趙東奭) 부자는 체포되어 상주 감영에서 순국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산의진은 해산되었다.

 

 

3. 순국과 추모

 

  김산의진이 해산된 뒤, 지산 이기찬은 1897년 이운(二雲) 이학사(李學士, 李義國)의 청으로 충북 청주시 문의면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서울 및 봉화 청량산과 안동 하회 마을을 유람하고 문의로 돌아와 후진을 양성하였다. 특히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효와 충을 근본으로 삼게 하였으며, 광거정(廣居亭)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게 하였다. 이때 주역』 「간괘(艮卦)의 상전(象傳)에서 뜻을 취하여 스스로 호를 지산(止山)’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기찬은 1903년 왕산 허위가 의정부 참찬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하여 의에 처하는 것이 전후가 이리도 다른가? 끝났구나, 끝났구나. 토복을 하려고 창의를 하였으나 성과를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출사를 하여 같은 조정에 함께 서다니...(何處義之前後不同也已矣已矣前旣倡義討復而未成)”라고 탄식하였다. 1905년 일본과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1907년 이기찬은 풍기(風氣)와 화기(火氣)로 오랫동안 병상에 있게 되었고, 다음 해인 1908년 정월 13일 이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순국하기 전 문생들에게 각자 해야 할 일들을 당부하였다. 그의 부고가 전해지자, 인근의 사람들과 벗들, 그리고 부녀자와 하인들까지도 애통해하였다. 청주 문의면에서 100일 장례를 치렀는데, 모인 사람들이 400여 명이었고, 만사와 뇌문을 올린 인사가 100여 명이었다. 현재 그의 묘소는 2011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 473호로 옮겼다.

 

  출처 :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 한준호 국역 지산유고(止山遺稿)해제(解題)

 

  ※ 지산연보에서 후임대장 구운(九雲) 조동석(趙東奭)의 순국과 김산의병 참모였던 왕산(旺山) 허위(許蔿)가 의정부 참찬 출사한 내용을 추가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