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지산유고의 동학창궐과 討東 대한 기록

도솔산인 2019. 8. 12. 16:31

지산유고의 동학창궐과 討東 대한 기록


1894년 상주의 화령과 보은의 삼산 장내리에 동학이 창궐하자 인근 양반사족들과 금천동약을 짓고 천탁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피신한 기록이다. 10월 동비들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동학의 수괴들이 선생을 찾아와 '선생님의 문에 고난을 들이지 않았으니, 바라옵건대 위태로운 목숨을 거두어 보호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한 달 남짓 임치(맡아서)하여 몸소 보호하였고 이에 인사를 하고 떠났다.'라는 기록이 있다. 녹도의 유배에서 돌아와 소모사가 된 해사 유도석이 선생에게 일을 논의할 것을 청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고, 얼마 되지 않아 유도석이 물러나고 소모사가 된 전승지 정의묵이 선생에게 참모가 될 것을 청하였으나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참모의 제안을 받은 시점이 선생께서 천탁산에 동학의 수괴들을 숨겨주고 있는 상황이니, 당시 선생의 입장이 얼마나 곤란하였는지 짐작할만 하다. 창의일기에 1896년 2월 10일 창의군이 김산에 진입하는데, '무장한 화포군 300명은 본래 약속한 사람들이다(火炮軍三百名素所約束者也)'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火炮軍 三百名은 동학의 잔여 세력으로 추정된다.


1. 지산연보

高宗三十一年甲五先生四十二勢呂永勛來築室而居永勛有篤學之志如此時金健秀亦來課。○ 東學猖獗 : 化嶺與三山接境三山乃東徒窟穴也境內士大夫避難者多就謀於先生先生與共築於天卓山中以避之盧都士事敬洪進士龜疇鄭進士弘黙李進士建晩鄭永愚羅采正諸公皆與焉。○ 柳參奉萬植(時慈仁柳公道奭自鹿島解歸故致書於其胤二江以慰之) 柳公以討東召募使陞叙而請先生議事不赴(二江柳公又以先生之子康夏薦爲召募營書?先生命往辭之)(錦川洞約成

[1894] 고종 31년 갑오, 선생 42, 봄에 여영훈이 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영훈은 학문에 돈독한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때에 김건수 또한 와서 공부하였다. 동학이 창궐하였다. 화령과 삼삼은 접경인데 삼산이 바로 동학도의 소굴이다. 경내 사대부들이 피난하는 사람이 많아서 선생에게 나아가서 상의를 하니 선생이 함께 천탁산 속에 성을 쌓아서 피난하였다. 도사 노사경과 진사 홍구주, 진사 정홍묵, 진사 이건만, 정영우, 나채정 등 여러 공들이 모두 함께하였다. 참봉 유만식 공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때에 자인현감 류도석공이 녹도에서 유배가 풀려나 돌아오자, 그러므로 그의 장남 이강에게 서신을 보내 위로하였다.)  海史 柳道奭 討東召募使로 승서(陞叙)하여 선생에게 일을 논의할 것을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이강 유만식 공이 선생의 아들 강하를 소모영의 ?가 되는 것을 천거하였으나 선생께서 가서 사양하게 하였다.) 錦川洞約을 지었다.

 

召募使 :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기 위()해 임시(臨時)로 파견(派遣)하던 벼슬아치.

* 도사 노사경은 행장에는 노여경으로 나오는데 오기로 보인다.  

 

建陽元年高宗三十二年乙未先生四十三歲鄭承旨宜黙爲召募使請先生以參謀謝不往。○ 著拾橡說戒諸子。○ 八月二十日中宮殿遇禍聞變而痛哭。○ 鄭承旨宜黙

[1895] 건양 원년, 고종 32년 을미, 선생 43, 승지 정의묵이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선생에게 참모가 될 것을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拾橡說戒諸子를 지었다. 820일 중궁전이(명성황후가) 화를 만나서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통곡하였다. 승지 정의묵에게 보내는 서찰을 썼다.


2. 지산행장

甲午. 東徒猖獗. 報恩帳內. 頗接壤. 騷擾方熾. 境內士大夫多被侮辱. 亂魁等. 尙不犯吾家.(從姪康模與諸從子皆團聚於錦川) 只以煽動流言. 有朝夕燎原之狀. 化寜望族, 如盧都事輿敬. 洪進士龜疇. 鄭進士弘黙, 李進士建柱. 諸公來就. 謀以防禦之策. 共入築室於天卓山中. 以避之. 十月東徒逮令方急. 有巨魁數人. 來乞曰. 惟先生之門. 荊棘不入. 願收庇危命. 任置月餘. 自以得保. 乃辭去, 時人倚望類如此. 前慈仁相. 柳公道奭. 自鹿島放歸. 仍有朝家叙令. 爲討東召募使. 柳公請府君議事. 辭病不行. 未幾柳公辭遞. 又有傳旨. 以前承旨鄭宜黙爲代之. 鄭公亦請府君從事. 辭以不堪. 盖以出于時世事無義也.

 

갑오년(1894, 선생 42) 동학도가 창궐하였다. 보은 장내리와 자못 땅이 접해있어 소요사태가 바야흐로 맹렬하게 일어나서 경내 사대부들이 모욕을 많이 당했으나 난의 수괴들이 오히려 우리 집을 범하지 않았다.(조카 강모와 여러 조카들이 모두 금천에 모였다.) 다만 선동과 유언비어로 조석으로 무서운 기세로 벌판에 불이 타들어가는 상황이 있을 뿐이었다. 화령의 명망 있는 집안인 도사여경 홍진사구주. 진사정홍목, 진사이건주 와 여러 공들이 와서 방어의 대책을 도모하여, 함께 천탁산 중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난을 피하였다. 10월 동학도 체포령으로 바야흐로 위급해지자, 동학도 우두머리 몇 사람이 찾아와서 빌면서 말하기를, ‘생각건대 선생님의 문에 고난을 들이지 않았으니, 바라옵건대 위태로운 목숨을 거두어 보호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한 달 남짓 임치(맡아서)하여 몸소 보호하였고 이에 인사를 하고 떠났다. 당시 사람들이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時人倚望類如此. 前慈仁相 유도석공이 녹도에서 벼슬을 놓고 돌아오자 이에 조정에서 관직을 내려(叙令) 討東小募使가 되었는데 유공이 부군에게 일을 논의할 것을 청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유공이 사직하고 물러났다. 또한 임금의 敎旨가 있어 전승지 정의묵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鄭公 또한 부군에게 종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대개 가치가 없는 당시 세상일에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燎原之狀 : 무서운 기세(氣勢)로 벌판에 불이 타 가는 상황. * 倚望 : 자녀(子女)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 : 어려운 사람을 구제(救濟)하는 일. 소모사(召募使) : 조선시대 병란이 발발했을 때 그 지역의 향병(鄕兵)을 모집하기 위하여 국왕이 임시로 임명하던 관리. * 辭遞 : 벼슬을 내놓고 물러남. 예전에, 상과 벌에 관한 임금의 뜻을 해당 관청이나 관리에게 전하여 알리는 일을 이르던 말. 慈仁相 : 경상북도 경산지역의 옛 지명. (전 경산 자인 읍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