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한말 김산 항일의병장 지산 이기찬선생 지산유고

도솔산인 2021. 12. 24. 11:07

한말 김산 항일의병장 지산 이기찬선생 「국역 지산유고」 발간

 

 

▣ 일 시 : 2021년 12월 23일(목)

▣ 장 소 : 경북독립운동기념관

▣ 인 원 : 2명(이수만 종숙)

▣ 날 씨 : 맑음

 

 

率義旅過秋風嶺[창의군을 거느리고 추풍령을 지나며]

 

                     止山 李起璨(지산 이기찬, 1853~1908)

 

三月秋風嶺 : 병신년 삼월 창의군을 거느리고 추풍령에서  

歃血誓東征 : 피를 마시고 일본을 정벌할 것을 맹서 하였네.

與爾均威惠 : 그대들과 더불어 위광과 은혜를 고르게 하여

雪讐報昇平 : 원수를 없애고 태평한 세상으로 보답하려하네.

                                  

<止山遺稿 一卷> 1896(丙申)년) 3月

 

注 歃 : 마실삽, 威惠 : 위광과 은혜, 威光 :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나 위엄, 昇平 : 나라가 태평함.

 

 

  2018년 8월 9일 종숙 수만(秀晩)씨와 지산유고 등 독립(의병) 운동 관련 자료 19점을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에 기증하였다. 2020년 2월 12일 서울에 있는 '브랜드 콘텐츠'라는 업체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귀하가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에 기증한 '지산유고의 국역 사업'을 발주받아 진행하고 있으며, 귀하에게 자료를 요청하면 도와줄 수 있는가?'라는 것이 통화의 요지였다.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조달청에 국역사업을 발주하여 업체가 선정된 것이다. 그동안 내가 「지산유고」의 창의일기와 연보, 행장을 국역한 것이 허사가 아니었다. 그 후 또 1년이 지나고 2021년 6월 3일 경북 독립기념관으로부터 지산유고 국역과 교열을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2021년 12월 21일 경북독립운동기념관으로부터 「국역 지산유고」를 받았다. 드디어 지산유고가 국역되어 간행된 것이다. 1896년 창의를 한 후 125년, 지산 선생이 돌아가신지 113년, 광복이 된 지 76년 만의 일이다. 2021년 12월 23일 종숙 수만씨와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 「청흥종계안(靑興宗契案)」 등 선대의 유묵 5점을 추가로 기증하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약 20년 전 2002년 「지산유고」 창의일기를 초역하여 당시 상주시 문화원장 강경모 선생님께 자료를 보냈다. 강경모 선생님이 「상주문화연구 제13집(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 2003)」에 「조선후기 상주지역 의병활동」논문을 기고하셨고, 김산 의병 창의일기가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국가보훈처에 여러 번 문의하였지만 후손들에게 공초 기록이나 공판기록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10여 년이 흐른 뒤, 2018년 6월 예천의 박갑로 선생(재야 사학자)이 도솔산 연소재 블로그에서 창의일기를 보시고 지산유고와 경술(1910년)통문을 보내달라고 하셨다. 그 후 그분의 안내로 2018년 6월 30일 경북독립운동 기념관에 '陶山通文(도산통문)'과 勉菴(면암崔益鉉(최익현, 1833~1906선생의 '告八道士民書(고팔도사민서)'와 毅菴(의암柳麟錫(유인석, 1842~1915) 선생의 '通告一國搢紳士林書(통고일국진신사림서)'와 '지산유고 영인본 2軸', 간찰 등 19점을 기탁하였다. 기탁한 유물은 先曾祖考 諱 康卨公(강설공, 1874~1912)과 先從曾祖考 諱 康夏公(1873~1940)의 지산유고 草稿와 倡義 通文(창의 통문)과 檄文(격문), 召募 檄文(소모 격문)과 簡札(간찰) 詩篇(시편) 등이며 지난 일백여 년 전 청흥문중의 기록이다.

 

청흥문중 : 1861년 청송(靑松)에서 의흥현(義興縣,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으로 이거한 참봉 상의(초명 泰孝 효령대군 17世)공 후손 소문중. 대전 등지에 50여가구가 살고 있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1895년 11월 29일 안동 향교에서 '陶山通文'이 전국의 유림에게 발송된다. 12월 초 안동에서 예안문경을 거쳐 상주에서 化嶺縣(화령현) 錦川(금천)에 은둔(隱遁)하고 있던 止山 선생에게도 전해졌다당시 止山 李起璨(이기찬,1853~1908) 선생은 스스로 錦樵山人(금초산인)이라 일컫고속리산 남쪽 尙州郡 化嶺縣 錦川(현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에 은거하고 있었다. 1894년 보은과 상주 화서 지역은 손병희의 북접 동학이 성하던 지역이다. 동학의 환란이 인근 보은과 상주를 휩쓸었다. 천탁산(天卓山)에 마을 주민을 피하게 하고 동학의 수괴와 담판을 하여 환란을 막았다. 동학이 패퇴하면서 관군과 일본군에 쫓긴 동학도의 수괴가 선생을 찾아와 몸을 숨겼다는 기록이 있다동학 농민군을 진압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기에 이르렀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俄館播遷(아관파천)이라는 굴욕을 당했으니,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급박한 시기였다안동 향교에서 온 '陶山通文(도산통문)'이 창의를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김산(金泉, 김천)과 상주, 선산, 무주와 영동그리고 보은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지산 이기찬 선생의 청흥문중은 그 폭풍의 중심에 서있었다.

 

☞ 김산 의병장 이기찬 선생 세계

 

효령대군보(1세)-의성군채(2세)-무송군전(3세)의성군임(5세)-승원(5세)-창인(6세)-숙(7세)-사건(8세)-二子 응서(9세)-충민(10세)-二子 형(11세)-세현(12세)-三子 창겸(13세)-윤화(14세)-제환(15세)-二子 택규(16세)-二子 상의(17세)-三子 기찬(18세)

 

  경북 독립운동기념관 정진영 관장님, 김말술 처장님, 학예연구부 한준호 부장님, 김동현 학예연구사님께서 후손들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셨다. 특히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상주박물관과 함께 지산유고에 나오는 170여 명의 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조사하여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서훈 신청까지 직접 해주신다고 하였다. 나는 이기하(李起夏) 선생의 서훈 신청을 당부하였다. 어둠의 긴 터널 속에서 무려 1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부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북 독립운동기념관 관계자 여러분과 예천의 박갑로 선생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청흥문중 종계안 : https://blog.daum.net/lyg4533/16488131

 

 

국역 지산유고
이기찬(李起璨)
이강하(李康夏)

 

▼ 대전국립현충원 고유제(211224)

告由文。

曾孫秀晚 謹告曾祖考 過世已有113載 我等後孫 有眼無珠 不解先祖之意 無法自決 宣揚祖宗之氣 然爾今年靠慶北獨立紀念館的協助下 止山遺稿譯成韓文 後代有的解釋 幸載多幸 我等甚感 先祖陰德 以此告文 以後銘記 在心先祖遺囑 各自努力 宣揚家風 為人民服務 教育後代 不忘先祖之義 請見證保佑 曾孫秀晚謹告

 

고유문.

증손자 수만은 삼가 고하나이다. 증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어언 113년이나 되었습니다. 저희 후손들이 마치 눈이 있으나 눈동자가 없는 것처럼 선조의 뜻을 헤아려 알지 못하였으며 선조님들의 기개를 선양할 길이 없었나이다. 그러나 금년에 경북독립기념관의 협조 아래 지산유고가 한글로 완역되어 후손들로 하여금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다행스러운지 모를 일이 옵니다. 저희들은 또한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알아 깊이 감동하고 있습니다. 이에 고문을 짓고 앞으로 저희들은 선조들의 유훈을 가슴 깊이 새겨 각자 노력하여 가풍을 선양하고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며 후대를 가르침에 옛 어른들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할 것이니 지켜봐 주시옵고 또한 보살펴주시옵소서. 증손 수만 삼가 고함.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 473호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5묘역 3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