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지산유고에 나오는 선유동(仙遊洞)과 대정(大井)

도솔산인 2022. 7. 16. 13:56

지산유고에 나오는 선유동(仙遊洞)과 대정(大井)

 

 

▣ 일 시 : 2022년 07월 12일(화)

▣ 코 스 : 대정(한우물)-선유동-문경 왕능종가 터

▣ 인 원 : 3명(청권사 부이사장 학용(學容) 종현님, 청권사 문화위원 학용(學用) 종현님)

▣ 날 씨 : 흐림

 

 

  2002년 지산유고 창의일기를 초역하면서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겨우 고등학교 교과서만 보던 사람이 지산유고 초고를 국역한다는 것이 무리였다. 단국대학교에서 간행된 한한대자전 16권에 의지했다. 창의 일기에 나오는 목천 족인 이기하라는 인물이 가장 궁금했다. 1896년 2월 8일 지산(止山) 이기찬(李起璨) 선생과 동행하여 감천(甘川)을 찾아가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을 만날 때 동행했던 인물이다. 김산의진(金山義陣)이 탄생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충청도 목천(木川)에 사는 이기하 공이 상주와 김천 지역 유생들을 연결한 것이다. 2021년 11월 30일 경북 독립운동기념관 주관으로 '국역 지산유고'가 완역되어 간행되었다. 1896년 창의를 한 후 125년, 지산 선생이 돌아가신지 113년, 광복이 된 지 76년 만의 일이다.

 

  2022년 6월 16일~17일 양일 간 사단법인 청권사 주관으로 문경 유적지 순례를 하였다. 내가 찾고 싶었던 선유동과 대정이 운강 이강년기념관과 농암면에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선유동과 대정은 1896년 3월 27일과 28일 김산의진이 머물렀던 곳이다. 7월 12일 이기하 공의 독립운동유공자 추서 신청 문제로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하였고, 문경에 거주하는 청권사 문화위원 학용(學用) 종현님의 안내로 선유동과 대정마을(대정숲), 왕능 종택 터를 답사하였다. 선유동은 괴산의 외선유동과 문경의 내선유동이 있어 추가 답사가 필요한 듯하다. 지금부터 125년 전의 기록을 좇아 선대의 유허지를 찾은 감회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일정을 함께하신 청권사 부이사장 학용(學容) 종현님과 청권사 문화위원 학용(學用) 종현님께 감사의 예를 올린다. 끝.

 

 

▼ 지산유고 창의일기에 나오는 선유동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소재

 

○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七日

 

  二十七日 踰葛嶺 抵高橋 問宗人秉禧 居喪中 火于壯岩李交河家 堤川召募將李華榮 執富人吳進士 與金都事 載前載後 余心不樂 先發至松面 松面近地 無一人 安業者細細 探得前到十輩 不知何許無名 而逢人必討逐戶 而索可駭 分付中營 捕捉不得 且聞炮殺尙州首吏與申倅 中房云耳 進宿仙遊洞

 

  삼월 이십칠일 葛嶺(갈령)을 넘어 高橋(고교)에 이르렀다. 宗人(종인) 秉禧(병희)를 찾아갔는데 喪中(상중)에 있었고 장암 李交河(이교하)의 집에 불이 났다. 堤川(제천) 召募將(소모장) 李華榮(이화영)이 부자인 吳進士(오진사)와 金都事(김도사)를 잡아서 곧 앞서거니 곧 뒤서거니 하니 내 마음이 즐겁지 못했다. 먼저 출발하여 松面(송면)에 도착했다. 松面(송면) 근방에는 한사람의 인적도 없었고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먼저 도착한 10여명의 무리를 찾아서 잡으려 했으나 어느 곳 사람인지도 모르고 이름도 없으나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집에서 벌하여 내 쫓고 돈이나 물품을 억지로 취하니 가히 놀랄만한 일이라 중영에 분부하여 잡도록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또한 尙州(상주) 首吏(수리)와 申守令(원님)을炮殺(총살)하였다고 中房(중방)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전진하여 仙遊洞(선유동)에서 묵었다.

 

 

※ 지산유고에 나오는 선유동은 괴산에 있는 외선유동일 가능성이 높아 추가 답사가 필요하다.

 

 

선유동천 나들길
浣心坮(완심대)
山高水長(산고수장)
영각
도암 이재(1680~1746)
도암 이재(1680~1746)를 기리는 학천정(鶴泉亭)
仙遊洞(선유동)
玉舃臺(옥석대)
鶴泉(학천)/李完用
선유동
선유동과 학천정

 

 

▼ 지산유고 창의일기에 나오는 한우물(大井) : 경북 문경시 농암면 종곡리 소재

 

○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八日

 

二十八日 移陣于聞慶大井 去倭站才五十里 招諭諸將曰 吾輩用兵出於不已 而志在撥反 撥反不得 則非徒無益 此去彼站不遠 諸軍其從我進取乎 皆曰 彼强我弱 鋒不可當 俄而濃雲密布 雨下如注 非進趨之時也

 

삼월 이십팔일 陣(진)을 聞慶(문경) 大井(대정)으로 옮겼다. 倭(왜)의 驛站(역참)과의 거리가 겨우 五十里(오십리)였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깨우쳐 말하기를 '우리들이 그만 둘 수 없음에 의병으로 나왔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도로 돌아감에 뜻이 있으니, 난세를 바로잡아 태평한 세상으로 돌릴 수 없으면, 다만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곳과 저들(倭軍) 驛站(역참)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제군들이 나를 좇아 나아가 왜적들을 취하겠는가?' 諸將(제장)들이 다 말하기를 '저들(日本軍)은 强(강)하고 우리(義兵)는 弱(약)하여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짙은 구름이 빽빽하게 널리 퍼지고 비가 내리는데 마치 물을 퍼붓는 것과 같아 군사가 前進(전진)할 때가 아니었다.

 

余乃仰天歎曰 自八月以後 忠憤所激 有出位之思 而提兵數朔 內自相攻 幺麽小賊 容在垣墉 其於十八强國 何且乘輿播越 逼於外夷 哀痛之詔 反爲飭諭 有志之士 陷於無名 功成之前 措躬無地 顧此不佞 欲赴鬪以死 則人不從我 欲歸家安業 則生不如死 寧桴海竄林 待諸君報捷之日 是所望也 此間有子房 願諸君往見之 乃投書于柳兄建一 全付士卒 則建一以其從祖梁山丈 仗義一門 兩擧有所如何云 固不可强

 

내가 이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팔월 이후부터 충성심과 분개함으로 소용돌이치는 바 자리에서 나올 생각이 있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數朔(수삭) 안에 몸소 다스린 일들이 보잘것없이 매우 적다. 작은 도적들의 모습은 그 十八强國의 담 안에 있으며, 어찌 또한 임금의 수레가 도성을 떠나 난을 피하여(俄館播遷) 오랑캐에게 핍박을 당하는가?

 

애통한 詔書(조서:詔勅)는 도리어 勅諭(칙유:임금이 몸소 타이르는 말)가 되었다. 뜻이 있는 선비는 명분이 없음에 빠지게 되었고 성공하기 전에는 몸 둘 곳이 없다. 이곳을 돌아보고 내(재주가 없음:자기의 겸칭)가 나아가 싸워서 죽자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자고 하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니 차라리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돌아다니듯 流浪(유랑)을 하고 숲 속에 숨어서 제군들이 원수를 갚고 승리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이 사이에 子房(자방)이 있어 諸君(제군)들을 가서 만나기를 희망하여 이에 柳兄(유형)建一(건일)에게 글을 보내 '사졸들을 전부 부탁한다. 곧 건일은 그 從祖(종조:할아버지의 형제)가 梁山(양산) 어른으로 義兵(의병)을 일으킨 一門(일문)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높이 들어 올림이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진실로(굳이) 억지로 권할 수 없는 일이다.

 

☞ 류만식(柳萬植, 1860~1926) : 수암 류진의 10대 종손이요 溪堂 유주목(柳疇睦)의 장손이며 아버지는 海史 류도석(柳道奭, 1828-1908)이다. 자는 建一이고 호는 二江이다. 우천 수암종택에는 二江精舍라는 현판이 있다. 二江은 洛坡 柳厚祚의 曾孫인 柳萬植公의 號이다. 柳二江은 우천 수암 종가의 宗孫이기도 하다. 1860년(철종 11년)에 태어나 일정 때인 1926년 향년 67세로 졸했다. 道士林의 천거로 齊陵참봉으로 임명되었다. 박식과 담론으로 大家의 풍도가 있었다.

 

 

 

 

▼ 청흥종계안에 나오는 문경 왕릉 종가터 : 문경시 가은읍 왕능리

 

  靑興宗稧序

 

  猗歟我靖孝公裔孫之布徧國中者。不啻千萬。其居嶺南者衆多矣。況聞慶旺陵迺吾宗家之世居乎。吾家自聞慶移居于安禮靑眞之間。而爲七八世邱墓之鄕。若靑松府西池洞 自我六代祖以下至曾王考。四世墳墓所在地也。粤在辛酉歲我祖考。自靑鄕移于義興。而我祖若伯考及仲考一位墓。在於友保面朴垞山也。歲己丑先考移尙州。歲丁酉又移于湖西之文義点一山麓。於懷仁北塩峙。遷我祖考一位墓。於負巽之原。其西下向庚之原。卽我先妣墓也。嗚呼。戊申我遭天崩之痛。奉襄于文義后谷炭峴。後五年壬子春葬先妣于塩峙。秋九月二日。火葬我先考及仲弟遺骸於楚江上。罪莫大焉。特書于此。使後世子孫知之也。仲母權氏墓。在文義西面光大岩西酉坐也。庶姑之墓。在后谷西越山下晩浦上。此乃我六代以下至諸父行墳墓所在記略也。壬子余自文義還于尙。戊午又移于湖之鎭岑西細洞。今年辛酉乃定新宅于城北。與季弟及諸從兄弟團聚。嗚呼。是年也。卽皇考自靑松定居于義興之一回甲也。

 

  청흥종계 서문

 

  아! 우리 정효공의 먼 후손(裔孫)들은 나라 안에 퍼져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뿐만 아니라 아마 영남에 거주하는 사람이 衆多할 것이다. 하물며 문경의 왕릉만이 바로 우리 종가의 세거지이겠는가? 우리 집안은 안동 예천 청송 진보지간으로 이거하여 7세 8세의 선영이 있는 고장이 되었다. 또한 청송부 서쪽 지동 같으면 우리 6대조에서 曾祖考(諱宅奎)까지 4世의 분묘가 있는 곳이다. 지난 1861년(辛酉) 나의 조고께서 청송(靑鄕)에서 의흥으로 이사를 하여 나의 조부와 伯父와 仲父 묘 一位가 우보면 朴垞山(박택산)에 있다. 1889(己丑)년에 先考께서 상주로 이사를 하였고, 1897년(丁酉)에 또 호서의 청원 문의 点一山 기슭으로 이사를 하였다. 회인 북쪽 염티에 조고(祖考) 묘 一位를 이장하였고, 동남을 뒤로 한 언덕의 그서쪽 아래 서향(向庚)의 언덕이 곧 나의 어머니(先妣) 산소이다. 아! 1908년(戊申)에는 아버지의 상사를 만나서(天崩之痛) 문의 후곡 탄현에 장례를 모셨다. 5년 뒤 1912년(壬子)년 봄 염티에 어머니(先妣)의 장례를 모시고, 가을 9월 2일 나의 先考(아버지)와 동생(仲弟 : 諱康殷 휘강은)의 유해를 금강변(楚江上)에서 화장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큰 것은 없다. 다만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 자손들이 알게할 뿐이다. 둘째 큰어머니 산소는 문의 서면 광대암 서쪽 유좌(酉坐)에 있고, 庶할머니 산소는 후곡 서쪽 월산 아래 만포 위에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육대조 이하 諸父 항렬까지 분묘의 所在를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다. 1912년(壬子) 내가 문의에서 상주로 돌아갔고(이사), 1918년(戊午)년 또다시 호서의 진잠 서쪽 세동으로 이사를 하였으며, 금년 1921년(辛酉)에 바로 진잠 성북에 새집을 마련하여 막내 동생과 여러 종형제들이 모두 모였다. 아! 이해가 선고(皇考)께서 청송에서 의흥으로 정주한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當是時我祖考。惟孝友克勤儉成立門戶。而爲子孫基業買置田土。而爲祖先奉祀矣。今我不肖諸孫離先墓棄舊土。罔奠厥居。使靑義先塋。將無奉香禁火之道。豈不大惶極悚底地頭乎。是年卽亦我伯從兄回甲之辛酉也。十一月四日卽其生朝也。是日也諸從諸侄及若干族人齊會。遂發此設稧之論。僉謀詢同。非余一人獨創之義也。玆豈非事有興廢。時有偶合者乎。凡我同爲子孫者。皆當勅念。我先祖靖孝之諡稱實德。而子孫衆多之洪福。追慕我皇考。勤儉之業垂後昆。而門戶成立之。貽謨則庶得免。前日不肖之思。而其永有後承。勿替之望矣。詩曰。無念爾祖。聿修厥德。

 

  이때를(克勤克儉) 가문의 지체를 만들어 세우고 자손을 위하여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으로(基業) 田土를 사두었으니, 선조들을 위하여 제사를 받들어 모셔야 할 것이다. 지금 못난 나와 여러 손들이 선영의 묘를 떠나 옛터를 버리고 그 살 곳(居所)을 정한 곳이 없다. 청송과 의흥의 선영에서 장차 봉향과 금초의 도리를 못하게 되니, 어찌 크게 두렵고 지극히 황송하여 땅에 머리를 숙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해가 곧 또한 나의 백종 형님(諱 康秀, 1861~1934)의 회갑인 신유년이다. 11월 4일이 그분의 생신이니 이날 여러 종형제와 조카들과 약간의 족인들이 모두 모였다. 드디어 이 設稧之論(종계를 설립하겠다는 의논)이 시작되었고, 모두의 의견(謀詢)이 일치해서이지 나 한 사람만의 독창적인 뜻이 아니었다. 어찌 일에는 흥폐(興廢)가 있고, 때에는 우연과 일치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우리 같은 자손 된 사람들은 모두 마땅히 삼가(勅捻)해야 한다. 우리 선조 효령대군 정효공은 진실한 은덕(實德)에 시호를 받고 칭송받아서(諡稱) 많은 자손들은 큰 복이다. 나의 선고를 추모하는 근검지업이 후손에게 드리워 가문의 지체(門戶)가 만들어지고 세워진다(成立). 후손에게 주는 선대의 가르침(貽謨)은 재앙을 벗어날 수 있다. 전날 못난 나의 생각이나 영원히 후손들이 계승하여 폐하지 말기를 바란다. 시경에 이르기를 '그대들 조상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그 덕을 닦아라.‘

 

 

※청흥종계안(靑興宗契案)[1921년(辛酉)11月4日]

 

  청흥종계안은 1921(辛酉) 11 4일 종증조부 청송 이강하(李康夏, 1873~1940) 공이 작성한 문서이다. 경북 문경 왕릉(旺陵) 종가에서 안동예안진보청송으로, 1861년 청송에서 군위 의흥으로, 1889년 의흥에서 상주 금천으로, 1897년 금천에서 충북 청원 문의로, 1912년 문의에서 다시 상주로, 1918년 상주에서 충남 대덕군 진잠 세동으로, 1921년 세동에서 진잠 성북으로 이주한 기록과 선대 묘소(청송, 의흥, 문의)의 위치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북 청송과 군위 의흥에 선영이 있는데, 충남 대덕 진잠 성북에 정주(定住)하면서 경북 청송과 군위 의흥에 있는 선영을 돌보지 못하여, 후손으로서 크게 두렵고 지극히 송구한 마음을 서문(序文)에 담고 있다.

 

  청흥종계안 서문에 "壬子(1912) 가을 9 2일 나의 先考(김산 의병장 지산 이기찬) 仲弟의 유해를 楚江(금강) 가에서 화장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은 없다. 다만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의 자손들에게 알게 할 뿐이다."라는 기록을 남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일본군과 친일세력들이 의병장의 무덤을 파헤치자, 이강하(李康夏) 공은 아버지 이기찬(李起璨, 1853~1908) 선생과 동생(仲弟 諱 康殷,1883~1912)의 유해를 錦江가에서 화장하여 산골(散骨)하였다. 당시 화장(火葬)은 입에도 담지 못할 일이었지만, 일제의 만행이 얼마나 포악하고 사태가 위급하였으면, 장사를 지낸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중제(仲弟 諱 康殷, 1883~1912.7.24)의 무덤을 파묘하여 화장하였는지 짐작할만하다. 1912년은 이강하 선생의 선비(先妣) 경주 박씨(2 26일 졸), 중제(仲弟) 康殷(강은, 7 24일 졸), 종제(從弟) 康卨(강설, 1 23일 졸), 종제(從弟) 강연(康連) 配星山呂氏(배성산여씨, 1 26일 졸)가 돌아가셨다. 휘 강연(康連) 공은 절름발이 불구자가 되었고, 이강하 선생은 9월 선고(先考)와 중제(仲弟)의 무덤을 파묘하여 유골을 화장하고 충북 청원 문의를 떠나 상주로 이사를 간다. 그해 청흥 문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종계안 서문(序文)에는 다른 지역으로 흩어진 집안의 결속과 단합을 위해 종계를 시작하고자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을해수계안(乙亥修稧案) 좌목(座目)에 계유년(1933)에 출생한 廷春 廷鵬까지 기록되어 있고 1935년 추가로 작성한 듯하다. 이후 청흥종계는 이강하(李康夏) 공의 사후(1940)부터 유명무실하다가, 1994 2월에 청흥문중 종회(필자 35)를 다시 시작하여, 2017 11 11~12일 양일간 각처(청송, 의흥, 진잠, 청원 등)에 흩어져있는 산소를 논산시 벌곡면 영주사 묘역으로 이장하여, 1년에 한 번 모여 시제를 지내는 것으로 '청흥문중'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861 '청송에서 의흥(군위)으로 이거한 참봉 상의공(象儀公,1816~1880) 후손들'은 대전 인근과 서울 등지에 48가구가 살고 있다.

 

  청흥종계안을 국역하는 동안 '다만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의 자손들에게 알게 할 따름이다.'라는 문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종계안에 나오는 선대의 산소를 관리해 온 나로서는, 100년이라는 시간 여행을 통해 선대의 영혼과 소통하고 있다고 느끼니,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지고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 이강하(李康夏) 공이 말씀하신 '후세의 자손'이 어찌하여 나란 말인가?' 이강하(李康夏) 공은 천신만고 끝에 122년 후인 2018 8 15일 의병운동 독립유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왕능 종가 터(왕릉2길7)